소설리스트

1화 빙의를 자각하다 (1/65)


#1화 빙의를 자각하다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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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

리즈는 오늘도 수프 세 숟갈을 넘기지 못하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입맛이 없으세요?”

“응.”

“아이고, 이를 어째.”

주인 아가씨의 몸을 제 몸보다 아끼는 미라벨은 울상이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끼니는 꼬박 챙겨 드시던 아가씨가 며칠째 수프만 깨작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다 먹지 않았다.

미라벨은 어떻게든 아가씨가 식사를 하게 하고자 매 끼니마다 열 가지가 되는 요리를 만들어다 바쳤지만 소용없었다.

리즈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것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대체 뭐가 드시고 싶은데요? 뭐든 좋으니 말씀해 주셔요, 이러다 아가씨 굶어 죽어요.”

“내가 먹고 싶은 건 말이지…….”

리즈가 입을 열자 미라벨은 귀를 쫑긋했다.

“쫀득쫀득, 말랑말랑, 길쭉길쭉한 식재료를 빨갛고 매운 소스에 오랜 시간 뭉근하게 졸여 만든 거. 그…… 생선 연육 같은 거도 들어 있고, 또 뭐가 있더라? 아, 그렇지. 삶은 달걀도 들어 있어.”

미라벨이 당최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 요리가 있다고요? 전 금시초문인데요. 아가씬 그런 걸 대체 어디서 드셔 보셨는데요?”

“먹어 본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떠올랐지. 정말 뜬금없이 떠올랐는데 꼭 먹어 본 거 같단 말이야. 혀가 얼얼할 정도로 자극적인 맛이었어.

그 맛을 생각할 때마다 입에 군침이 고이는데, 집 요리사가 해 주는 밍밍한 음식이 입에 맞을 리가.

“그럼 이름이 뭐예요? 제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볼게요.”

이름…….

먹어 본 적도 없는데 이름을 알 리가 없잖아?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또…… 또복이? 떠벅이? 뭐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그냥 오늘은 외식하자. 집밥 먹기 싫네.”

리즈가 기억하길 포기하고선 말했다.

바깥 음식 못 믿는다며 건강한 집밥을 고집하던 미라벨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아가씨의 눈 밑 다크서클이 어제보다 내려온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얼른 가요, 얼른.”

미라벨은 마차를 준비시켜 놓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제법 선선해진 늦여름 저녁이었다. 리즈는 가벼운 긴팔 웃옷을 걸치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차는 입구에 벌써 준비되어 있었다.

마부 조너선이 문을 열어 주고 리즈와 미라벨의 손을 차례로 붙잡아 주었다.

기세 좋게 저택을 나선 마차는 널찍한 가도를 이십여 분 정도 달린 뒤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선 번화가에 도착했다.

한데, 사람들이 식당 앞에서 기다리는 모양새가 어째 심상치 않았다.

“적어도 한 시간은 기다리겠는데? 다른 데 갈까?”

리즈의 말에 미라벨이 말했다.

“지금은 어딜 가나 많이 기다릴 거예요. 그러지 말고 제가 포장을 해 올게요. 근처에 한적한 공터가 있으니 거기 가서 먹어요.”

“그래, 그게 좋겠네.”

미라벨이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선 막 내리려는 찰나, 조너선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더니 만류했다.

“제가 다녀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아니에요. 제가 다녀올게요. 당신은…… 조너선 경은 쉬고 계세요.”

“그럴 순 없소. 내가…….”

“아니라니까요. 제가…….”

두 비밀 연인들의 실랑이를 보다 못한 리즈가 말했다.

“둘이 같이 다녀와.”

“아…… 그래도 돼요?”

리즈는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 하긴, 이제 갓 사귄 연인인데 둘만의 시간이 얼마나 간절할까? 에잇. 인심 썼다.’

“괜찮으니까 다녀와.”

“그럼 얼른 다녀올게요. 잠깐만 쉬고 계세요.”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서 나란히 식당 앞에 줄을 섰다.

먹고 가는 건 한 시간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데 포장은 십 분이면 된다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로 미라벨이 멀리서 손가락 열 개를 쫙 뻗어 보여 주었다.

리즈는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곤 마차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의식은 더욱 또렷해져만 갔다.

입맛이 없으니 종일 늘어져서 잠만 잔 탓일까?

그나저나 참 신기하기도 하지. 왜 갑자기 입맛이 없어졌을까?

입이 짧은 편도 아니었는데.

하긴, 어렸을 땐 좀 짧았지. 그래서 유모가 고생 좀 했다고 들었다. 무슨 어린애가 맵고 짠 음식만 찾는다고.

하지만 다 지나간 이야기고, 성장하면서 많이 고쳤는데.

생각할수록 희한한 일이었다.

체질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리즈는 다시 한번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푸흡!”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라벨과 조너선이 새끼손가락만 슬쩍 걸쳐 놓고선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쟤들은 잡으려면 잡고 말려면 말지. 저게 뭐야? 소심하게.”

리즈는 그들을 실컷 비웃어 주었다.

하지만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 거랬는데 그래도 부럽다. 그래. 저런 게 사랑이지.

한쪽만 안달복달하는 건 집착이다.

……나처럼.

그때였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걸 리즈는 느꼈다. 그 감각이 워낙에 갑작스럽고 생뚱맞아서 자신의 일인 데도 제삼자에게 일어난 일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뭐지? 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철퍼덕-.

곧이어 리즈의 몸은 누가 메다꽂기라도 한 것처럼 벽면에 머리를 처박히고선 그대로 마차 바닥에 엎어졌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만 겨우 옆으로 돌렸다. 그랬더니…….

‘어? 어째서 누워 있는데도 창밖이 보이는 거지?’

그 순간 알았다. 지금 나 마차 사고당한 거구나.

마차가 전복되었구나.

문득 이마에서 뭔가 뜨끈하고 점도 높은 것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땀인가? 손을 들어 닦아 보았다. 땀이 아니다.

땀과는 색이 달랐다.

리즈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광경도, 미라벨과 조너선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오는 모습도 죄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아…….

근데 유독 하나만은 또렷이 보였다.

미라벨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 용기.

뭘 담았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찍어 먹을 수 있게끔 꼬치 두 개가 엑스자로 꽂혀 있는데.

리즈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뭐야, 꼭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던 떡볶이 같네……?”

그런 순간이 있다.

의식의 균열이 저도 모르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리즈는 스스로에게 경악했다. 줄곧 입속에서만 맴돌던 그 음식의 이름, 머릿속에서만 음미하던 자극적인 맛.

‘떡볶이였어.’

하굣길에 학교 앞 분식집에서 친구와 곧잘 사 먹곤 했던 떡볶이. 꼭 저런 용기에 저런 식으로 이쑤시개를 꽂아 주었지. 맵다 맵다 하면서도 둘이서 끝까지 먹었어. 소스까지 싹싹 긁어서.

그렇구나.

전생의 기억이구나. 한데 전생이라면 분명 앞 시대일 텐데, 어째서 시간상으로 후퇴한 기분일까?

후생은 조금 더 발달된 세상에 태어났어야 하는 게 아닐까?

더 얇아진 핸드폰이라든가 아니, 그런 게 없이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다 찾아지고 안내되는 그런 세상 속에 태어났어야 하는 게 아닐까?

분명 십 년 안에 그런 세상이 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죽고 나서 바로 환생했다 쳐도 이십 년은 되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는 첨단 기계는커녕 유선 전화기도 없고, 자동차 대신 마차가 있고, 말을 전달하려면 일일이 서한을 써서 시중인에게 시켜야 하는 거지? 왜?

결론은 금세 내려졌다.

그건, 이 세계가 책 속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읽었던.

“리즈 아가씨. 여기요! 여기 사람이 죽어 가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미라벨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리즈는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고 의식이 더욱더 몽롱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나 혹시 또 죽는 걸까?

가만, 내 이름이 아리스테 베리움. 줄여서 리즈. 내 미래가 어떻더라?

아…… 안 죽네.

지금은 아니구나.

죽는 건 한 절기 뒤였네.

남주한테 칼 맞아서.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흑…… 그래도 어떻게…….”

미라벨은 자신이 대신 사고가 났어야 했다며 슬퍼했다. 그래서 오히려 리즈가 달래 줘야 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모두 제 탓이에요.”

“그런 말 할 거면 거울이라도 가져와.”

“거, 거울은 왜요?”

사고가 난 이후 미라벨은 거울이란 거울은 몽땅 치워 버렸다.

아가씨가 이마에 난 흉터를 못 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열 바늘 꿰맸단다. 어제 실밥을 풀었다.

이마엔 약 삼 센티가량의 철도가 깔려 있었는데, 이제 철도는 없어졌지만 붉게 팬 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의원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긴 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없어지지도 않을 거란 말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예상외로 꽤 슬퍼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귀족 영애 얼굴에 흉터라니.”

하지만 그건 리즈의 아픔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흉터가 생긴 딸을 사교 모임에 데려가야 하는 데서 오는 걱정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슬퍼한 사람은 미라벨뿐이었다. 적어도 리즈 생각엔 그랬다.

“아가씨 걱정 마세요. 제가 앞머리 잘라 드릴게요.”

리즈는 됐다고 했지만 미라벨은 끝끝내 앞머리를 싹둑 잘라 버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른 앞머리가 묘하게 어색했다. 좀 어려 보이는 것 같긴 한데,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난 전에 머리가 더 좋은데.’

사실 리즈는 이마에 난 흉터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다.

흉터가 뭐가 대수냐?

한 절기 뒤에 죽게 되는데. 그것도…….

“아가씨, 목욕하실 시간입니다.”

지금 막 이 방으로 들어와 이 말을 하는 노예의 손으로.

“욕장으로 옮겨 드릴게요.”

그놈이 해사하게 웃으며 리즈를 번쩍 들었다. 맑고 청량한 아콰마린 색 눈에서 리즈는 언뜻 살기를 엿보았다. 이제야 이런 게 보이다니.

리즈는 평소처럼 잘생긴 노예의 목 뒤에 팔을 두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 내려 주세요.”

“……예? 아니, 아가씨. 왜 갑자기 안 하던 존댓말을…….”

너 같으면 반말하겠습니까?

황태자 전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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