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검, 은, 독(劍, 銀, 毒)(2)
츠츠츠츠.
당룡의 신형이 깃털처럼 붕 떠올라서 서백을 향해 날아왔다.
오래된 관제묘의 바닥에서 먼지 한 톨조차 떠오르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경신법.
얘기로만 들어온 무당파의 경신법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상대는 사천당문의 인물이다. 사천당문은 날쌘 암기술과 음습한 독공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반면 당룡의 경신법은 그가 사천당문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
하지만 사천당문의 악명은 어디 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당룡의 신형이 서백을 향해 쏜살처럼 쇄도했던 것이다.
쐐애애액.
마치 천둥이 떨어지는 듯한 급습.
서백은 본능적으로 검을 가로로 눕혀서 쌍검을 막았다.
까깡.
굉음이 터져서 관제묘 내부가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충격파가 서백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자 발밑에서 먼지가 훅 올라와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쌍검에 엄청난 내공이 실렸다는 뜻.
자욱한 먼지 속에서 당룡의 신형을 찾는 순간,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전해지는 전음.
[제법이군.]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당룡의 소매에서 나온 두 자루의 검이 먼지를 헤집으면서 날아왔다.
서백은 검을 풍차처럼 빙그르 회전하며 두 개의 검격을 막았다. 검과 검이 마찰하자 먼지 중에 불꽃이 튀었다.
까가가각.
[제법이군요.]
서백이 던진 한 마디에 당룡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도 일순.
서백과 당룡은 서로에게 돌격해서 수십 합을 쏟아부었다.
파파파팟.
서백의 대검은 좁은 곳에서는 쓰기 힘들다.
서백이 아무리 엄청난 용력으로 장애물을 함께 베어 버리며 검을 휘두른다고 해도 한계가 있게 마련.
비검(飛劍) 역시 마찬가지다.
당룡은 쌍검을 소매 속에 숨겼다가 찌르듯이 투척한 뒤, 卜 자 모양 손잡이를 잡아채는 것으로 검이 목표를 빗나가서 그냥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즉 지금 당룡의 검법은 일종의 비검술.
비검술은 대검보다는 장소의 넓이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관제묘는 곳곳에 기둥과 목인상(木人像)이 있어서 비검의 경로를 막고 있었다.
서백과 당룡 둘 다 약점을 안고 싸우는 상황.
그러나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듯 두 고수는 병장기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당룡은 검이 찌르는 거리를 짧게 줄여서 마치 점혈을 하듯이 서백의 급소를 노렸다. 두 개의 검이 수십 개로 불어난 듯이 보이는 초식.
쉬쉬쉬쉭.
그에 대항해서 서백은 검을 휘두르지 않고 수직으로 세운 다음, 검잡이를 중심축 삼아서 검면을 팽이처럼 돌리며 검격을 막았다.
꼭 어린애가 보랑구(拨浪鼓, 작은 북 옆에 두 개의 채를 매단 장난감)를 갖고 노는 듯한 모습.
모습은 우스꽝스러웠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당룡이 한 호흡에 내지른 수십 개의 검격 세례가 서백의 검면에 몽땅 막혀 버린 것이다.
까까까까까깡!
검격을 막는 짧은 찰나, 서백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이대로라면 결국 쌍검에 당하고 만다.’
석가검법은 자신의 신장과 체구보다 큰 검을 회초리처럼 빠르게 휘둘러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패도적인 검법이다.
그러나 현재 석가검법을 출수할 수 없었다.
석가심결을 반 시진 이상 시전했는데 운기조식을 끝내기 전에 당룡과 싸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석가심결 없이 검초만으로 놈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
서백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 검법이라면…….’
당룡의 쌍검이 재차 날아드는 순간, 서백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검을 슬쩍 옆으로 기울여서 쌍검을 상대했다.
쌍검을 검면으로 슬쩍 비껴가게 만든 다음, 검이 움직이던 동작 그대로 상대의 손목을 그어 버리는 초식.
‘일립이전(一立二展).’
스으윽.
서백의 검초가 갑자기 변화하자 당룡은 몸을 회전하며 손을 빼냈다.
하지만 당룡은 단순히 피하는데 급급하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돌려서 반대쪽 손의 검으로 서백의 뒤통수를 노렸던 것이다.
서백은 검을 막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보법을 밟았다. 그러자 당룡의 검이 서백의 뒤통수를 닿을락 말락 따라왔다.
그때 서백이 검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려서 당룡의 검에 갖다 댔다. 동시에 그의 검을 슬쩍 비껴가도록 유도했다.
먼저 검초와 비교하자면 회전력이 더해진 것이 차이점.
‘이립삼전(二立三展).’
그러자 이번에는 서백의 검이 자연스럽게 당룡의 목줄기를 그어 버리려는 태세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대로 쌍검을 휘둘렀다간 서백을 베는 것보다 자신의 동맥이 끊어질 판.
결국 당룡은 훌쩍 몸을 날려서 세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통했다.’
서백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금 서백이 시전한 두 번의 검초는 석가검법이 아니라 사모님께 배운 것이었다.
언젠가 서백이 대검을 들고 수련하느라 지쳐 있을 때 사모님이 다가와서 말했다.
-백아야(阿白, 서백의 애칭). 혹시 석가검법이 통하지 않으면 이 검법을 써 보렴.
사모님은 손수 목검을 들고 검법을 시전해 보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아름다워서 검법이라기보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검초는 일립이전. 이 검초는 이립삼전.
-그게 초식명이라고요? 바둑의 격언 아닌가요?
-맞아. 내가 만든 검법이라서 바둑에 나오는 이름을 붙였단다.
-하하…….
서백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모님다운 언행.
-그럼 검법 이름은 무엇입니까?
-바둑 격언을 딴 검법이니 옥석검법(玉石劍法)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
사모님이 석가장으로 시집올 때 갖고 온 바둑돌이 옥으로 만든 귀한 것이었다. 그걸 깨닫고 서백은 재차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검법이 지나치게 부드럽기만 하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요?
-모르는 소리.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제압하는 법이란다.
순간 사모님의 몸이 빙글 한 바퀴를 회전하더니, 상체를 지면에 닿을 정도로 낮춘 자세로 검을 찔렀다.
팟.
회전력을 검에 실은 날카로운 검초.
이어서 그녀는 단숨에 상체를 세우는 것과 동시에 비스듬히 호선을 그리며 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쉬이이익.
마치 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듯한 동작.
특히 찌르기와 베기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검초에서 서백은 어설프게 보이던 옥석검법이 실은 부드러움 속에 강맹함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강맹함은 석가검법 못지않았다. 아니, 석가심결을 시전하고 옥석검법을 펼친다면 그 위력이 석가검법을 능가할지도…….
-마지막 검초는 무엇인가요?
-이건 옥석검법의 구명절초니까, 으음…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먼저 자신부터 살고 상대를 공격하라)라고 할까?
-사모님… 옥석검법이란 이름도 초식명도 지금 즉석에서 만드신 거죠?
-들켰니? 호호호!
사모님은 서백을 놀리는 게 재밌다는 듯이 소리 높여 웃었다.
당시 사모님의 웃음소리가 지금 서백의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이때다.’
서백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는 당룡을 추격하며 회심의 일검을 날렸다.
바로 사모님에게 배웠던 옥석검법의 구명절초, 아생연후살타였다.
스으으으, 팟.
* * *
서백이 보법을 밟고 쇄도해 오자 당룡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방금 전까지 소년은 강맹함 일변도의 검법을 구사했다.
그런데 갑자기 물 흐르듯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역공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제각각 다른 검초를 써서.
이어서 소년은 뒤로 물러서는 당룡을 향해 보법을 밟으며 쇄도해 왔다.
마치 한겨울에 꽁꽁 언 얼음판을 미끄러지듯이 다가오는 보법은 중원 무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괴이함이 있었다.
당룡의 눈썹이 재차 일그러졌다.
‘사특한 놈.’
눈앞의 소년이 변방 새외의 무공을 배웠을 리가 없다. 아니면 애초에 변방에서 중원으로 온 놈이라는 말인가.
간혹 강호에 나온 은거 고수 중에 그런 자가 있다.
강맹함과 부드러움처럼, 서로 상반되는 특징의 무공을 동시에 출수하는 고수.
그런 경지는 적어도 나이가 일갑자는 되어야 이를 수 있다는 게 세간의 상식이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약관도 안 되어 보이는 나이.
당룡은 고모 당홍이 왜 소년에게 당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특유의 긴 검을 이용해 상대에게 쇄도해서 단숨에 베어 버린다. 또한 검의 엄청난 무게는 상대의 병장기를 찍어 누르거나 아예 부숴 버린다.
쓸데없이 화려하고 멋을 부리는 중원의 무공을 비웃는 듯한 검법과 보법.
‘하지만 거기까지다.’
소년은 망자 떼를 피해 도주하느라 내력을 몽땅 소모해 버렸는지 외공만으로 검을 쓰고 있었다.
당룡은 그 점이 이해가 안 됐다. 고작 그 정도의 내공으로는 당홍을 벨 수 없었을 텐데.
서백이 현재 석가심결을 시전할 수 없다는 것을 당룡이 알 수 없는 일이라서 생긴 의문.
결국 당룡은 결론을 내렸다.
‘약관도 안 된 놈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용력만으로 그 대검을 휘두르면 머지않아 지칠 터. 네놈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방금 전까지 두 눈이 반짝거리던 당룡은 앞뒤 계산이 끝나자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시시하군.’
서백이 검을 찔렀다가 호선을 그리며 베는 순간, 당룡은 발을 들어서 검면에 갖다 댔다. 이어서 발바닥을 뒤집어서 검을 밟고 바닥에 찍어 눌렀다.
처억.
엄청난 힘이 검을 통해 전달되자 서백은 양팔이 저릿저릿해서 그만 검을 놓칠 뻔했다. 서백이 검을 빼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근추(千斤錘)의 수법?’
천근추는 내력을 돋워서 순간적으로 전신의 무게를 무겁게 만드는 내가무공의 일종이다.
아무리 석가심결을 시전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내력의 차이가 이 정도일 줄이야.
사천당문의 무공은 음습한 것으로 악명 높은데, 당룡은 소문과 달리 외가무공과 내가무공의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하긴, 오랜 세월 중원 무림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문파가 외공과 내공 중 어느 한쪽만 불균형하게 발전시켰을 리가 없을 터.
당룡이 한쪽 발로 검을 밟은 채 예의 팔짱을 낀 거만한 자세로 전음을 보냈다.
[네 생각은 이미 알고 있다. 천근추라고 생각하겠지?]
[…….]
그 말에 서백은 눈썹을 찡그렸다.
당룡이 하는 말로 봐서는 천근추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수법을 알 수 없다는 것.
순간 시야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포착되었다.
자신의 양쪽 손등에서 가느다란 은사가 뻗어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은사는 허공을 가로질러서 당룡 쪽으로 이어졌다. 당룡은 왼손의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은사가 바로 그 반지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야 봤군. 검도 눈도 느리구나.]
당홍이 만천화우를 응용해서 자신만의 독문무공인 지상만뢰를 만들었을 때, 당룡은 고모의 무공을 훔쳐보면서 영감을 깨달았다.
어려서부터 무공에 천부적 자질이 있던 당룡.
그는 고모의 비검술에 사천당문의 암기술을 접합시켰다. 그 결과 비검 대신 은침을 은사에 연결해서 투척하는 수법이 탄생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은침은 아무 소리도 낌새도 없이 상대에게 날아간다.
상대가 은침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는 중요 혈도에 이미 침이 박힌 다음.
당룡이 홀로 개발한 독공,
정호잠룡(靜湖潛龍).
서백이 검을 빼지 못하는 것은 당룡이 천근추의 힘으로 검을 밟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은침이 박힌 서백의 양쪽 손등은 점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즉 양손을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백의 완벽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