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검, 은, 독(劍, 銀, 毒)(1)
객잔에서 서백에 대한 정보를 들은 당룡은 즉시 소림사로 떠났다.
어차피 잘된 일이었다. 문주가 당홍과 당조정을 죽인 자의 목을 소림사에 갖다 놓으라고 했으니까.
필사의 강행군으로 당룡은 숭산에 도착했다.
짧지 않은 여정 동안 당룡은 마주치는 망자의 목을 사정없이 베면서 이동했다. 그런데 숭산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소림사에 가까워질수록 망자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중원의 망자들이 몽땅 숭산으로 모였나.’
수십 구의 망자 떼는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망자 떼의 숫자가 수백, 수천을 넘어서고 있으니 제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강행 돌파는 불가능했다.
수천 구의 목을 베어도 한 번 물리면 끝장이니까.
당룡은 망자 떼가 올라오지 못하는 능선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암벽 위를 올라가자 마침 잔도가 눈에 띄었다.
‘소림사 놈들이 만든 잔도군.’
당룡은 잔도를 따라가면 숭산의 칠십이 봉우리를 넘어서 소림사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잔도가 곳곳에 끊겨서 길이 막혀 있었다.
소림승 진문과 피난민들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당룡은 피난민 행세를 위해 남루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을 숨길 수 있었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다고 해도 사천당문의 문양인 홍접(紅蝶, 붉은 나비)이 수놓인 도포를 걸치고 소림사에 잠입할 수는 없는 일.
그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당룡은 소림사가 두렵지 않았다.
단지 신분이 일찍 발각돼서 사냥감을 놓치는 것을 꺼렸을 뿐.
‘오히려 잘 됐군.’
계속해서 당룡은 피난민 행세를 했다. 소림승 진문을 따라가면 소림사에 쉽게 잠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한 소년이 밧줄을 연결하기 위해 암벽을 건너왔다.
순간 당룡은 깨달았다.
‘저놈이군.’
약관도 안 된 나이.
자기 몸집만큼 큰 대검.
아미파 여제자한테서 들었던 소년 고수가 틀림없었다.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소년이 소림승과 통성명을 하며 이름과 행선지를 밝혔던 것이다.
당룡은 가늘게 뜬 눈으로 서백이란 소년을 살폈다.
대검을 쓰는 것으로 보아 용력은 확실히 대단할 것이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절벽을 평지처럼 건너뛴 것으로 보아 경공과 내공도 심후할 터.
하지만…….
‘당홍 고모의 목을 벨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당룡은 서백과 일대일로 싸우고 싶었기 때문에 잠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일단 서백이 연결한 밧줄을 타고 암벽을 건너갔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지하당의 수색대가 밧줄을 놓아 버리더니 죽창에 장착된 기관장치로 쇠뇌를 발사한 것이었다.
소림승을 추락시키고 입을 막으려는 수작 같았다.
‘귀찮은 일에 걸려들었군.’
지하당이라는 방파 하나가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에 감히 전쟁을 선포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관인가? 아니면 관이랑 손을 잡았다는 무당파나 화산파 놈들 짓?’
당룡은 누가 소림사와 싸우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지하당이 서백까지 떨어뜨린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중원 땅을 가로질러서 숭산까지 왔는데 이름도 못 들어 본 방파 따위가 목표물을 죽였다고?
마치 호랑이가 사냥하는데 여우가 끼어들어서 사냥감을 빼앗은 꼴.
‘일단 서백이란 놈을 찾아서 목을 벤다.’
살아 있든, 추락해서 죽었든 간에.
‘그리고 사천으로 돌아가기 전에 지하당이란 놈들을 몽땅 죽여서 멸문시킨다.’
당룡은 지하당이 서백과 진문에게 쇠뇌를 쏘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유유히 사라졌다.
사천당문의 인물에게 암벽을 타고 내려가는 것은 어린애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이었다.
잠입과 암살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험지를 안방처럼 드나드는 것이니까.
당룡은 암벽 틈새에 쇠못을 박고 밧줄을 연결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지상에는 망자 떼가 즐비했지만, 당룡은 호흡을 참고 이동했기 때문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망자 떼와 사투를 벌이다가 쉬고 있는 서백을 찾아낸 것이다.
* * *
서백은 시침을 뚝 떼고 포권지례를 올렸다.
[저는 석가장의 서백이라고 합니다.]
[나는 당룡이다.]
[사천당문이 왜 저를 찾는 겁니까?]
[문주의 차녀 당홍, 삼녀의 아들인 당조정이 촉도관에서 죽었다. 당조정은 목인 베인 채로, 당홍은 목, 양팔, 몸통이 다섯 토막 난 채로 발견되었지.]
서백은 재차 시침을 뚝 뗐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촉도관에서 일어난 일은 아미파에게 물으면 될 텐데요?]
[정수사태가 벌인 짓이 아니다.]
[왜입니까?]
[그 아미파 년은 손속이 잔인하지 않거든.]
당룡은 심드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년은 중생을 살리는 활법(活法)을 추구한답시며 우스꽝스러운 검법을 수련하지. 인정사정없이 목과 양팔을 베어 버리는 건 그년의 무공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
[그런 무지막지한 검법은 망자를 상대로 쓰면 좋을 것 같더군.]
당룡의 지적이 정곡을 꿰뚫자 서백은 침묵했다.
서백의 석가검법은 대(對)망자 전용 검법.
당룡은 당홍과 당조정의 시신을 본 것만으로 석가검법의 특징을 정확하게 추리하고 있었다.
[당시 함께 있던 청성파는 따져 볼 가치도 없는 허접쓰레기니, 놈들이 벌인 짓도 아니다.]
[…….]
서백은 그 말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중원 무림의 구대문파 중 하나인 청성파를 허접하다고 일컫는 자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자기 이외에는 모두 바보로 여기는 자,
오직 사천당문인만이 할 수 있는 말.
[그렇다면 소속이 불분명한 놈이 벌인 일이라는 뜻. 네놈 짓이라는 걸 알아내는 데 수고가 좀 들었다.]
[그래서, 사천당문의 복수를 하려는 겁니까?]
[복수? 내가 왜?]
[그럼?]
[당홍과 당조정은 주제도 모르고 나대고 다녔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문주가 시키니까 하는 거다.]
스릉. 당룡이 검을 뽑았다.
사천당문의 고수답지 않게 그의 검은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평범했다.
암기, 독공, 그밖에도 수많은 기병으로 악명 높은 사천당문.
서백은 당룡이 다른 기병이나 암기를 숨기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저를 쫓아서 소림사까지 오다니, 끈기 하나는 칭찬해 드려야겠습니다.]
정중한 말투와 달리 가시가 있는 내용.
서백은 슬쩍 상대의 심기를 긁어 봤다.
싸움의 시작은 심리전.
하지만 걸려드는 낌새는 없었다.
당룡은 맞받아치지 않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얘기를 늘어 놨던 것이다.
[어차피 소림사에 올 생각이었다.]
[그건 또 왜입니까?]
[문주가 네놈의 목을 베어서 소림사 지객당에 갖다놓으라고 했거든.]
[굳이 왜?]
[소림사를 엿먹이려는 생각이겠지. 그 뒷방 늙은이 꿍꿍이속이야 뻔하니까.]
[그럼 소림사는 물론 중원 무림과 척을 지게 될 텐데도 말입니까?]
[척을 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휙. 당룡이 말을 끝내기 전에 검을 투척했다.
[거슬리는 건 베어 버리면 그만.]
검은 마차 바퀴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왔다.
날카로운 비검술도, 검법의 찌르기를 응용한 동작도 아니었다. 그냥 손목을 튕겨서 회전시킨 것일 뿐.
그러나 서백은 알 수 있었다.
삼류 검객이 투척한 듯 보이는 엉성한 비검(飛劍)에 엄청난 내공이 실려 있다는 것을.
깡. 서백은 검을 휘둘러서 비검을 허공으로 쳐 냈다.
순간 당룡의 신형이 나뭇잎처럼 붕 떠오르더니, 허공에 뜬 검잡이를 발등으로 찼다.
그러자 검은 먼저와 달리 쏜살처럼 서백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쐐애애액.
서백은 검면을 눕혀서 비검을 막았다. 깡. 튕겨난 검은 빙글빙글 날아가서 기둥에 박혔다.
‘내 차례군.’
서백은 어깨 뒤로 손을 돌려서 검잡이를 쥐었다.
이어서 등에 멘 고리에서 검을 떼는 찰나, 그대로 어깨 너머에서 정면을 향해 반원을 그리며 검을 베었다.
팟. 휘이이잉.
관제묘 안에 한 줄기 질풍이 불었다.
검이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천정의 대들보에 검흔을 남기며 지나갔다. 그리고 관제묘 바닥의 돌판을 쪼개면서 깊숙이 박혔다.
촤아아악. 팍.
회심의 일검을 출수했지만 서백은 침묵했다.
‘…….’
당룡이 검에 스치지도 않은 채 태연히 서서 서백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검에 몸이 쪼개졌으면 볼 것도 없이 하수.
검을 피했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무림인.
그러나 당룡은 차원이 달랐다.
그는 검이 그리는 반원에서 살짝 닿을 듯 말 듯하게 검격을 피한 것이었다.
검의 길이, 그에 따른 회전 반경, 검격의 속도 등을 순간적으로 계산했다는 뜻.
또한 그는 산책 나온 사람처럼 태연히 뒷걸음질 쳐서 검격을 피했다. 갑자기 신형을 뒤로 날리는 것보다 평범한 동작이 더욱 어렵다는 것은 경공을 수련한 자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니…….
‘고수다.’
[용력 하나는 쓸 만하군.]
당룡이 서백의 일검을 논평하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자세가 마치 제자들을 앞에 두고 무공을 논하는 늙은 고수처럼 보였다.
[길이는 웬만한 창만큼 길고, 검면은 참마도만큼 넓군.]
[창은 길이를 이용해 상대 사정거리 밖에서 일방적 공세를 펼치는 데 중점을 둔 병기.]
[하지만 네 검은 지나치게 크다. 초식 또한 창술이나 검법보다는 도법(刀法)에 가깝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대검을 휘두르는 용력 하나는 칭찬해 주지.]
[검의 사정거리를 생각 못하다가 급습을 당하면 막기가 쉽지 않겠군. 당홍이 당한 이유가 그래서인가?]
서백의 검법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분석하는 당룡.
그의 언행은 다른 무림인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상대의 장점을 깨달으면 최대한 피한다. 상대의 단점을 깨달으면 일부러 모르는 척 숨기다가 허를 찌른다.
그것이 보통 무림인들이 목숨을 건 싸움에서 행하는 처사.
그런데 당룡은 서백의 장단점을 짚으면서 얘기하고 있으니, 서백은 상대하는 자로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상대를 얕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무공에 미친 자이기 때문인가…….
[대검, 또 그걸 휘두를 수 있는 용력으로 상대를 쉴 새 없이 몰아쳐서 끝장낸다. 나쁘지 않은 전법이군.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만약 상황이 달랐다면 친절하게 무공을 품평해 주는 고수와 대화하는 것인 줄로 착각했으리라.
당룡의 언행이 하도 기가 막히자 서백은 맞장구를 쳤다.
[무엇입니까?]
[너무 느려.]
당룡의 눈빛이 반짝 안광을 발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살기가 가득한 눈빛.
맹수가 오랜만에 적수를 만난 기쁨이 듬뿍 담긴 눈빛이었다.
‘내가 오해했군.’
당룡은 상대에게 무공의 장단점을 가르쳐 주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사냥감을 앞에 두고 계산하는 것이었을 뿐.
이제 남은 것은 사냥.
스윽. 당룡의 양쪽 소매에서 두 개의 검이 미끄러져 나왔다.
날렵하게 빠진 검은 특이하게도 卜 자 모양의 손잡이가 붙어 있었다.
중간에 손잡이가 있는 곤 종류의 병장기, 즉 괴(拐)와 흡사하지만 검날로 찌르거나 벨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터.
괴 모양의 검은 소매 속에 은닉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꺼내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이 일반적인 수법이다.
그런데 쌍검을 숨기지 않고 꺼냈다?
상대의 무공을 높이 사서일까.
‘설마. 절대 그럴 자가 아니다.’
만난 지 일각도 되지 않았지만 서백은 알 수 있었다. 당룡은 상대를 철저히 무시하는 자라는 걸.
‘지금 석가심결은 쓸 수 없다.’
석가심결이 없으면 석가검법도 출수할 수 없다.
용력으로 대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눈앞의 살수를 상대할 수 있을까?
‘절대 무리다. 그렇다면…….’
순간 당룡이 서백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