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질풍무사-118화 (118/123)

118화 구사일생(九死一生)(4)

서백은 미친 듯이 망자를 베고 또 베었다.

그러나 망자들은 셀 수 없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무작정 망자를 베어서는 위기를 탈출할 수 없었다. 하나를 베면 열이 몰려드는 격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망자 떼 속에 파묻히고 말리라.

‘암벽 위로 올라가야 한다.’

서백은 검을 휘두르는 반탄력을 이용해서 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망자들의 머리를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달렸다.

퍼퍼퍼퍽.

‘저기다.’

포위망의 끝에 도달했을 때 서백이 암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푸욱. 암벽에 검을 박고 매달리는 데 성공했다.

서백은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암벽 틈새를 잡고 몸을 지탱한 뒤 검을 뽑아 더 높은 위치에 박으려고 했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면 힘들긴 해도 언젠가는 암벽 능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럼 망자 떼를 따돌릴 수 있다.

그러나 서백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망자 떼가 서백을 좇아서 몰려들더니 암벽에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망자들은 밑에 깔린 다른 망자를 짓밟고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밑에 깔린 망자들이 받침대처럼 되어서 망자 떼의 높이가 점점 서백에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혼백이 사라진 혈귀가 병법을 생각해 냈을 리는 없다.

피 냄새를 좇아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망자들이 공교롭게도 암벽에 방벽을 쌓게 된 것.

그야말로 시체들의 탑!

순간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해골 손이 뻗어 나와 서백의 발목을 붙잡았다.

덥썩.

서백은 발을 끌어올렸다가 세차게 아래로 내질렀다. 와지끈. 해골 손이 부러져 나가며 서백의 발목을 놓았다.

그러나 서백은 암벽을 오를 방법이 사라졌다.

암벽을 올라가려면 검을 뽑아서 더 위쪽에 박아야 되는데, 시체탑이 쌓이는 속도가 더욱 빨랐던 것이다.

십여 개의 손이 뻗어 나와 서백의 두 발목을 낚아챘다.

서백은 발목에 두터운 가죽 토시를 덧대고 있었기 때문에 망자들이 할퀴는 손톱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만약 상처가 난다면 언제 혈선충이 감염될지 모르는 일.

서백은 두 발을 회오리처럼 회전해서 손들을 뿌리쳤다. 휘리릭. 그러나 다음 순간 십여 개의 다른 손들이 뻗어 나와 재차 발목을 붙잡았다.

‘빌어먹을.’

이제 십여 개가 아니라 수십 개가 넘는 손들이 뻗어 나왔다.

서백은 암벽에서 검을 뽑은 다음 일검에 손목들을 베어 버렸다.

촤아아악. 키에에엑.

두 손이 잘려도 망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망자 하나가 다른 망자의 머리를 밟고 위로 뛰면서 서백의 발목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딱! 서백이 발을 비틀어서 피하자 망자의 이빨은 허공을 깨물었다.

‘감히 어딜.’

서백은 검을 휘둘러서 망자의 목을 날렸다.

그러나 더 이상 암벽에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현재 틈새에다 검지와 중지만을 넣어서 몸무게를 버티고 있는 중.

그런데 시체탑이 점점 높아지더니 급기야 서백 바로 아래까지 도달한 것이다.

제아무리 용력이 뛰어난 서백이라고 해도 검을 휘두르면서 한 손만으로 미끈한 암벽을 기어오를 수는 없는 일이니…….

‘다른 방법을 찾자.’

서백은 두 발로 암벽을 박차면서 망자 떼와 최대한 거리가 벌어지도록 도약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서백의 밑에도 어김없이 망자는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 구의 망자 떼가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어서 발 디딜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서백은 달려드는 망자를 향해 검을 수직으로 박으며 낙하했다.

검이 망자의 허리를 말 그대로 두 동강 냈다.

썩둑. 철퍼덕.

망자의 절단된 배 아래로 내장이 쏟아졌다.

그러나 망자는 죽기는커녕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죽은 시체이니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꾸웨에엑!

망자의 상체가 배 아래로 내장을 쏟으면서 두 손을 써 땅바닥을 기어왔다.

대다수 사람들은 망자를 보면 기겁을 하고 공포에 떤다. 오직 소수의 무림인들만이 망자를 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소수의 무림인들도 결국 망자라면 치를 떨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서백처럼.

‘거머리처럼 질긴 놈들.’

서백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망자의 숫자가 적어 보이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백은 협곡 암벽에 세워진 관제묘(關帝廟)에 몸을 숨겼다.

삼국연의 촉나라의 관우를 모신 사당인 관제묘는 중원 어딜 가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지러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무신(武神) 관우가 복을 가져오고 흉을 쫓아 주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지금 관제묘는 암벽을 동굴처럼 파낸 뒤 붙박이처럼 지은 것이었다. 황량한 암벽에도 관제묘를 짓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중원 사람들의 관우 사랑은 극진했다.

후우, 후우…….

서백은 잠시 망자 떼를 따돌린 틈을 타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망자 떼와 싸우는 동안 석가심결을 계속 시전하고 있었다. 새까맣게 몰려드는 망자 떼를 도륙하려면 석가심결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으니까.

문제는 석가심결을 시전한 지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백은 석가장에서 시간 경과를 체득하는 수련을 했다. 힘든 수련 끝에 서백은 일각(15분) 단위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워낙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도주했기 때문.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석가심결을 운용한 지 반 시진을 훌쩍 넘었다는 것이었다.

석가심결은 반 시진 이상 운용하면 주화입마에 들 위험이 있다.

때문에 서백은 잠시 운용을 멈추고 있었다. 하지만 곧 다시 운용해야 될지 모른다. 망자 떼를 완전히 따돌린 것이 아닌 이상은.

석가심결을 운용하지 않으니 숨을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무리 대검을 휘둘러도 심호흡 몇 번이면 금방 안정을 되찾는 서백. 그런 서백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다니, 왕이삼이 옆에 있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으리라.

지금 서백의 검은 망자들의 핏물과 살점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특히 망자들의 뼈를 갈랐을 때 그 속에서 나온 인(燐) 성분이 묻어서 검날이 번쩍거렸다.

관제묘 밖은 망자들의 목, 팔, 다리는 물론 몸통에서 쏟아진 내장이 깔려서 땅바닥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채 번쩍거리는 대검을 들고 있는 소년.

모르는 자가 보았다면 지옥에서 악귀가 나온 것으로 착각하리라.

호흡이 진정되자 서백은 정신이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서백은 혁낭에서 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옆구리에 대고 물을 부었다.

콸콸콸…….

중원 험지를 여행할 때 목숨 줄이나 다름없는 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물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당장 피 냄새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 살아난다면 물이야 언제든 다시 담을 수 있다.

어느새 큼지막한 주머니가 바닥이 났다. 서백의 옆구리는 붉게 물든 채 흠뻑 젖었다.

‘이것으로 괜찮을까?’

평소 앞뒤 계산이 확실한 서백도 지금은 상황 예측을 하기 힘들었다.

피 냄새를 완벽하게 지우려면 상처를 깨끗이 씻은 다음 금창약을 덧발라야 한다. 또한 의복을 빨거나 갈아입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흐르는 핏물을 씻었을 뿐, 의복에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게다가 이동을 재개하면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다시 흐를 테니 피 냄새를 완벽하게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물을 쓴 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래도 당장은 피 냄새가 흐려져서 망자들이 쉽게 찾지 못하리라.

‘그동안 최대한 운기조식을 해서 석가심결을 다시 시전할 수 있도록 만들자.’

그런 다음 잔도를 찾아서 암벽 위로 올라가면 망자 떼를 따돌릴 수 있다. 지금은 그 작전 말고 다른 방법이 없을 터.

서백은 운기조식을 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었다.

그때 관우의 위패를 모시는 제단 쪽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좀 쉬자, 쉬어. 사람이 쉬지 않고 싸움만 하면 바보가 된다는 것도 모르냐?’

왕이삼이나 할 법한 농담. 그만큼 망자가 지긋지긋했다.

서백은 몸을 날려 제단에서 멀찍이 떨어진 다음 몸을 돌렸다.

순간 평소 무심하던 서백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웬 젊은 남자 하나가 지붕 밑의 대들보에 걸터앉은 채로 서백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피 냄새를 맡고 덤비지 않는 것을 보면 망자는 아니었다.

“누구십니까?”

말을 꺼내자마자 서백은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턱을 치켜든 채 서백을 유심히 살피는 눈빛.

팔짱을 낀 거만한 자세.

허리춤에 찬 한 자루의 검.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살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무림인.

그런데 다시 보니 남자는 먼저 진문과 함께 잔도에 있던 세 명의 피난민 중 하나였다.

피난민들은 서백이 연결한 밧줄을 타고 지하당이 있는 암벽으로 건너갔을 텐데, 왜 망자 소굴 한복판에서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나를 추격해 왔군.’

중원 무림에서 사지(死地)까지 누군가를 추격해 오는 자의 정체는 단 하나.

‘살수(殺手).’

남자가 턱을 스윽 치켜들었다. 이윽고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전해졌다.

[암벽에서 떨어졌는데 살아남다니, 소림사로 간다는 꼬마답게 제법이군.]

남자가 전음을 쓴 것은 어딘가에 망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서백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는 소림사행을 막으려고 추격해 온 살수였다.

[목만 베어서 갖고 갈 줄 알았는데 다행이군. 죽은 놈 목을 베는 것은 싱거우니까 말야.]

그 말을 듣고 서백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굳이 목을 베어서 갖고 간다고?

소림사행 인물을 죽였다는 증거가 필요해서일까, 그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아직은 남자가 어떤 꿍꿍이속인지 알 수 없었다.

사천을 떠나 숭산까지 서백은 짧지 않은 여정 동안 수많은 악인의 목을 베고 망자를 불태웠다.

서백이 벤 자들 중에는 명문정파의 인물 또한 적지 않았다.

제갈세가나 철장방은 물론, 오가연맹은 산동악가, 하북팽가, 진주언가, 모용세가, 남궁세가로 전부 다섯 곳이다. 그들만 합쳐도 적지 않은 숫자.

그중 서백의 존재를 알아차린 곳에서 살수를 보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망자를 많이도 베었더군. 혼백 없는 놈들을 죽이는 게 재밌냐?]

남자가 시비조로 전음을 보냈지만, 그의 표정은 정반대로 심드렁했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몸에 밴 듯한 태도였다.

‘어느 문파지?’

서백은 남자의 용모와 특징을 보며 소속이 어디일지 추측했다.

그러나 딱히 짐작되는 곳이 없었다.

‘이럴 때 송현 선배가 있다면 좋으련만.’

무림 견문이 넓은 송현이라면 남자가 어느 문파 소속인지 어렵지 않게 추리해 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남자가 대들보 위에서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스으윽.

남자의 신형은 붕 뜬 채로 낙엽이 떨어지듯이 바닥에 착지했다. 남자의 경공 수위가 서백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 낮지 않다는 증거.

[지금부터 평생 배운 무공을 몽땅 펼쳐라, 꼬마야. 그래야 힘들게 쫓아온 보람이 있지.]

하수의 무공을 시험하겠다는 듯한 거만한 말투.

순간 서백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중원 무림에서 거만한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곳.

그 끈질김이 독사 같아서 한번 복수를 꾀하면 십 년이 걸려도 반드시 추적해서 성공시킨다는 곳.

무공은 물론 수법과 계책이 악독하고 잔인해서 고수라도 상대하기를 꺼린다는 곳.

중원의 무림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젓는다는 곳…….

서백은 남자가 어느 문파인지 알 것 같았다.

[사천당문 분이십니까?]

[꼬마가 눈깔 하나는 제대로 박혔군.]

남자는 문주의 명을 받고 사천에서부터 서백의 자취를 쫓아서 숭산까지 추격해 온 사천당문의 당룡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