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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17화 (117/123)

117화 구사일생(九死一生)(3)

망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성을 갖고 생각할 수 있는 망자.

혼백이 사라져서 피에 굶주린 혈귀.

정말 위험한 것은 전자다.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 속에 숨어 있다가 혈선충을 감염시켜서 하나둘 망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색출도 쉽지 않을 뿐더러 때를 놓쳤다가는 무리 전체가 망자 판이 되어 버리기 십상.

때문에 망자를 잘 아는 자들은 전자를 두고 진짜 망자라고 부른다.

반면 보통 사람들은 혈귀를 더 두려워한다. 아니, 망자의 종류가 혈귀밖에 없는 줄 알고 있다. 진짜 망자를 본 적 없는 사람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혈귀에게 물려서 죽으면 시간이 지난 뒤 감염된 시체가 되살아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

특히 시간이 흘러서 살점이 썩고 눈알에 구더기가 낀 혈귀의 몰골은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서백 입장에서는 혈귀를 상대하는 쪽이 쉬웠다.

호흡, 표정, 피 냄새.

이 세 가지만 지키면 혈귀는 산 사람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니 얼마든지 은신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

현재 눈에 보이는 혈귀들만 해도 수백 구.

안개 너머에 있을 혈귀들까지 따지면 얼마나 많은 숫자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즉 지금 상황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에 처할수록 서백은 정신을 집중했다.

서백은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망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제갈세가의 지하 망자굴에 떨어졌을 때, 제갈혁의 술법에 조종되는 망자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반면 눈앞의 망자 떼는 규칙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 그 자체.

‘호흡과 표정만 감추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서백은 보법을 밟으며 망자들을 피해 이동했다.

망자들의 몰골은 각양각색이었다.

살점이 썩어서 문드러지는 망자가 있는가 하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공허한 눈빛만 제외하면 산 사람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 망자도 있었다.

그러던 중 망자 하나가 다른 망자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발견했다.

생전에 어머니였던 망자가 어린 여자애의 손을 꼭 잡고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막 열 살이나 되었을까.

앞으로 살날이 한창이었을 여자애가 망자가 된 것을 보자 설명할 수 없는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때 여자애가 고개를 홱 돌렸다.

서백은 여자애 망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방금 슬픔을 느끼긴 했지만 서백은 희노애락의 표정을 조금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석가장에서 감정을 죽이는 훈련을 수없이 반복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여자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상하군. 설마?’

순간 여자애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늑대처럼 입술을 말아 올리면서 송곳니를 드러냈다.

크르르르.

호흡을 멈추고 표정도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피 냄새.

‘어디지?’

서백은 팔다리를 비롯해서 전신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신체 어느 부분이 뜨끔한 것을 알아차렸다.

오른쪽 옆구리였다.

암벽과 충돌하고 검을 박은 채 미끄러지는 동안 갈비뼈 부분이 타박상을 입어 피멍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느라 흥분하는 바람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상처.

그런데 피멍이 들고 살이 찢겨나간 채로 계속 움직이다 보니 급기야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망자가 피 냄새를 놓칠 리 없었다.

키에에엑!

여자애가 턱뼈를 활짝 벌리며 달려들자 서백은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부웅. 촤악.

검은 망자의 목과 함께 한쪽 손목까지 베어 버렸다.

순간 주위에 있는 망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백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척!

‘들켰군.’

이제 남은 것은 둘 중 하나. 몽땅 베어 버리느냐, 망자에게 물려서 같은 망자가 되느냐.

물론 서백은 후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 서백이 방금 베어 버린 망자의 손목이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손가락을 구부리기 시작했다.

손목은 공교롭게도 검지 하나만을 일직선으로 세운 채 다른 손가락들은 접었다. 그러자 검지로 서백을 가리키는 모습이 되었다.

혼백이 사라진 혈귀가 검지로 산 사람을 가리키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네.”

서백은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피 냄새를 숨기지 못해서 들킨 마당이라 희노애락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삿대질이라니 예의범절이 형편없군.”

키에에엑!

사방에서 수백 구의 망자 떼가 서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송현 일행은 진문을 따라 잔도를 내려갔다.

징검다리 같은 잔도를 건너뛰는 일은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다음 잔도가 잘 보이지 않아서 피로는 더욱 쌓였다.

게다가 잔도에서 미끄러지는 순간 그 아래는 망자 떼가 도사리고 있으니…….

송현, 주은리, 진문은 어렵지 않게 잔도를 이동했지만 평생 외가무공을 수련하고 경신법은 소홀히 한 왕이삼은 진땀을 빼야 했다.

임시 잔도를 얼마나 이동했을까.

드디어 안개 너머로 지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왕이삼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뛰어 내리려고 했다.

“기다려라, 후배. 이제 다 왔으니까.”

그때 송현이 왕이삼을 불러 세웠다.

“잠깐.”

“왜 그러시오?”

“무작정 내려갔다가 망자 떼에게 포위되면 곤란하오.”

“그럼 후배가 눈앞에 있는데 손 놓고 구경만 하자는 거요?”

왕이삼이 역정을 내자 진문이 끼어들며 설명했다.

“송현 시주의 말이 맞소. 지금 숭산 주위의 망자 숫자는 상상을 초월하오. 한 번 망자 떼에 휘말리면 수천, 아니, 수만 구의 시체 속에 파묻히게 될 것이오.”

“…….”

진문의 말을 듣자 숭산 소림사의 현 상황이 더욱 실감되어서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망자 수만 구.

보통 사람은 물론 설령 무림인이라고 해도 수만이라는 인파는 생전에 한 번도 보기 힘든 것이리라.

수천이라면 각 문파의 연합이나 소림사에서 종종 열리던 무림대회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만이라는 숫자는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면 동원 자체가 불가능하다. 중원 무림의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를 전부 합쳐도 수만 명을 넘을지를 자신할 수 없지 않은가?

송현이 품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상황이 급박할수록 준비는 철저해야 하는 법.”

왕이삼은 송현이 뭘 꺼내는지 궁금했다.

송현의 손에 들린 것은 낡고 허름한 서책 한 권이었다.

“서책? 호언장담하더니 고작 준비한다는 게 서책이냐?”

왕이삼이 기가 막혀서 외쳤지만 송현은 반응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더니 진문에게 말했다.

“소림사에 부탁할 일이 있소.”

“말씀하시오.”

“이 서책은 흑랑비서의 사본이오. 흑랑비서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송현의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주은리가 망자한테서 용정객잔을 지킬 수 있던 까닭은 편복선생이 전해준 흑랑비서의 부적 비법 덕분이었다.

그 얘기를 해 준 것은 바로 송현.

또한 송현은 흑랑성에서 흑랑비서를 찾은 자가 자신이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흑랑비서의 사본을 품에서 꺼내 놓으니 일행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현 시주의 명성은 방장님께 익히 들었소. 한데 소림사 장경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흑랑비서의 사본을 어떻게 손에 넣으셨는지?”

진문의 말투는 차분했으나 말속에 가시가 있었다.

특히 그의 시선이 호랑이처럼 사납게 송현을 응시했다.

옆에서 보기만 하는 왕이삼과 주은리가 살짝 움찔거릴 정도였으니, 무림인이 아닌 자라면 오줌을 지릴 정도의 안광이었다.

진문이 캐묻는 의도는 왕이삼조차 깨달을 정도로 뻔한 것이었다.

‘장경각은 소림사 삼대비처잖아? 설마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는 비급을 빼돌린 거냐?’

세간에서 말하는 소림사의 삼대비처(三大秘處)는 다음과 같았다.

소림사 십팔나한의 거처인 나한당, 무림의 각종 기병을 보관하는 금강고, 그리고 소림사의 무공은 물론 무림 모든 문파의 비급을 소림승들이 연구하여 기록해 둔다는 장경각.

장경각의 비급은 소속 승려가 아니면 설령 십팔나한이라고 해도 방장의 허락 없이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다는 흑랑비서의 사본을 송현이 품에서 꺼냈으니, 진문이 의문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

송현은 예의 무심한 말투로 해명했다.

“이 사본은 제갈세가에서 갖고 온 것이오.”

송현은 흑랑비서 사본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설명했다.

동시에 아마도 제갈성이 동생인 제갈혁에게 사본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진짜 짐작하는 바는 말하지 않았다.

바로 무림맹의 명숙들 중 하나가 유출한 사본이 제갈혁의 손에 들어갔으리라는 추측.

‘아직 진문에게 그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

소림사에 가면 일단 무림맹의 배신자부터 색출해야 될 테니까.

진문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밀은 아는 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입이 많으면 소문이 퍼지는 법이지.’

송현의 얘기가 충분한 해명이 되었는지 진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겠소. 그럼 흑랑비서를 쓰겠다는 말은…….”

“여기 주 소저가 흑랑비서를 보고 망자를 쫓아내는 부적을 만들 것이오.”

송현이 주은리에게 흑랑비서 사본을 건넸다.

주은리는 도도한 표정으로 사본을 받은 뒤 아무 데나 펼쳐서 슥 훑어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빛이 어둠 속의 촛불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망자에 대한 부적이군요.”

그녀는 무심한 척 말했지만, 눈빛을 보면 잔뜩 흥분했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말코도사가 어디서 그런 재주를 배웠나 싶더니 여기에 있었군요.”

주인이 흥분한 걸 느꼈는지 소매에서 초랑이 고개를 내밀며 캥 하고 짖었다.

“호오, 이런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어디 보자, 이건 또 뭐지? 망자를 유인하는 부적이라고? 대단하군요, 대단해. 천하에 이런 보물이 다 있다니, 역시 소림사 장경각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군요.”

그런 주은리를 보며 왕이삼은 생각했다.

‘아니, 뭐 저렇게 좋아해? 꼭 천하를 다 가진 사람 같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왕이삼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주은리는 표정을 싹 바꾸며 다시 도도하게 말했다.

“뭐, 부적 몇 장은 그릴 수 있겠군요.”

왕이삼은 기가 막혔다.

‘저, 저, 표정 감추는 것 좀 보소…….’

두둑한 보수가 들어오면 도박을 즐기던 도검수 왕이삼. 그런데 지금 주은리의 얼굴이 도박판에서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 들키지 않으려고 딴청 부리는 자의 표정과 똑같지 않은가?

주은리는 폭이 넓은 돌계단 하나를 골라서 자리를 폈다.

일행은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다른 돌계단으로 옮겨 가서 지켜봤다.

송현은 주은리가 흥분한 나머지 상황을 잊지 않게 당부했다.

“시간이 없으니 꼭 필요한 몇 장만 만드시오.”

“알았어요.”

주은리가 무복 속에서 부적을 그릴 때 쓰는 핏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와 종이 묶음, 세필 붓을 꺼냈다.

무복이 품이 넓다고는 해도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자 왕이삼은 다시 한번 기가 막혔다.

“아니, 어디 장사하러 가냐? 그걸 몽땅 옷 속에 넣고 다니게.”

“평소 준비가 철저하면 후환이 없는 법입니다. 배우지 못한 자는 그걸 모르죠.”

“끄응…….”

주은리가 유비무환을 언급하자 왕이삼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유비무환은 그가 아끼는 후배인 서백의 신조 중 하나였으니…….

주은리가 붓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서 핏물을 묻힌 다음 호방하게 획을 그렸다.

돌멩이에 괸 종잇장에 기이한 도형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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