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구사일생(九死一生)(2)
당시 서백은 제갈세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서 있는 자리의 바닥이 꺼지는 기관진식 함정.
서백은 바닥을 차고 도약했으나 위에서 은사 그물이 온몸을 옭아맨 채 함정 속으로 끌어당겼다.
서백은 검으로 은사를 갈라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제갈세가가 장인을 시켜서 제조한 은사는 십성의 내공을 실은 일검이 아니라면 쉽게 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웬만한 검격은 튕겨 내버릴 정도로 질긴 은사 그물.
안개 너머의 암벽 틈새에 덩쿨처럼 뻗어 나온 나무뿌리가 보였다.
나무뿌리가 뽑히지 않을 만큼 튼튼할까?
은사 그물이 뿌리를 제대로 옭아맬 수 있을까?
보통 무림인이라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오고가리라. 지금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목숨이 달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서백은 단호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저하다가 놓치는 것만큼 바보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서백이 나무뿌리를 향해 은사 그물을 투척했다.
휙. 머리칼보다 가늘게 만들어져서 숨결만 닿아도 출렁거리는 은사 그물이 흐느적거리지 않고 화살을 쏜 것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서백이 은사 그물에다 쇠뇌를 묶어서 던졌기 때문이다.
제갈세가의 은사 그물과 지하당의 쇠뇌.
서백의 목숨을 한 차례씩 끝장낼 뻔했던 두 문파의 기병.
서백은 두 가지 기병을 임기응변으로 재활용한 것이었다.
‘대단히 고맙군.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지.’
휘리릭. 촤아악.
쇠뇌가 암벽에 충돌하면서 은사 그물이 나무뿌리에 칭칭 감겼다.
서백은 은사 그물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그러자 떨어지던 방향이 암벽 쪽을 향해 바뀌었다.
‘성공이다.’
그러나 서백의 몸무게와 낙하하던 속도가 은사 그물에 실리자 나무뿌리와 얽혔던 부분이 빠져 버렸다.
서백은 균형을 잃고 다시 추락했다.
‘빌어먹을.’
평소의 서백답지 않게 저절로 욕설이 나왔다.
그때 암벽에 또 다른 나무뿌리가 보였다. 먼저처럼 틈새에서 삐져나온 줄기 부분이 아니라 뿌리가 암벽 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서백은 빗자루로 땅바닥을 쓸듯이 은사 그물을 암벽에 대고 좌우로 흔들었다.
은사 그물이 뿌리에 꼬이면서 단단히 휘감겼다.
촤라라락.
서백은 은사 그물을 당기며 암벽으로 붙었다. 그리고 암벽과 가까워지는 찰나 그물을 놓은 뒤 두 손으로 검을 거꾸로 들어서 암벽에 박았다.
그러나 먼저 암벽을 건너뛸 때와는 달리 추락하는 속도가 붙었기 때문에 서백의 몸은 암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치 사냥한 짐승의 배를 가르는 것처럼 검이 암벽에 박힌 채 길게 자상(刺傷)을 냈다.
콰드드득.
암벽에 검을 박은 채 삼 장을 미끄러진 뒤에야 서백의 몸이 간신히 정지했다.
“후우우우…….”
서백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땅을 밟지 않고 허공에서 운신하는 것은 몇 배 이상 힘이 들었다. 내공이 심후한 서백조차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호흡을 고르는 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기 때문이다.
위기를 벗어난 것은 그만큼 기적적이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자 암벽이 까마득히 높이 수직으로 서 있었다. 중간에 짙은 안개가 끼어서 그 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실로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기분.
죽다 살아났다는 말이 이와 같으리라.
문득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과거의 삶과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서백은 아무런 추억이나 기억도 떠오른 것이 없었다.
그럼 이 정도는 죽을 위기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만…….
목숨은 건졌지만 서백은 왠지 처연한 감정을 느꼈다.
만약 정말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사모님과 사형제들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나마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심호흡이 끝나자 서백은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떨쳤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다.’
추락을 멈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암벽에 검을 박은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상황.
암벽에서 지면까지 얼마나 거리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즉 잔도도 아닌 깎아지른 암벽을 끝까지 내려가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지면까지 뛰어 내릴 수 있을까?’
서백은 지면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
주위는 짙은 안개가 감돌고 있어서 발밑은 마치 물속에 빠진 것처럼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안개가 희미해지면서 시야가 뚫리기 시작했다.
순간 서백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발밑에서 불과 일 장(丈) 아래에 땅바닥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괜한 걱정을 했군.’
일 장이라면 설령 무공을 모른다고 해도 뛰어 내릴 수 있는 높이.
어느새 지면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니.
추락을 멈추는 데 정신을 집중해서 몰랐는데 서백은 그만큼 상당한 거리와 시간을 떨어졌던 것이다.
만약 그대로 지상에 떨어졌다면 근골이 박살나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곤죽이 되었을 터.
서백은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려서 지면에 착지했다.
땅에 발바닥이 닿자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말이 실감났다.
지상에 무사히 착지해서 잠시 긴장이 풀렸던 서백의 눈빛이 다시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지하당이 어떻게 쇠뇌를 발사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하당은 진문이 암벽을 건널 때 밧줄을 놓았다.
‘실수가 아니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
지하당은 애초에 소림승 진문을 제거하기 위해 수색대를 꾸린 것이었다.
진문을 구하기 위해 도약했던 서백를 돕진 못할망정 오히려 쇠뇌를 발사한 것이 그 증거였다.
서백은 그때 지하당의 비밀을 알아차렸다.
‘쇠뇌를 발사하는 기관장치가 장착된 죽창.’
그런 죽창을 모든 당도들이 하나씩 들고 있다?
자금력이 상당하다는 뜻.
즉 지하당은 망자 창궐을 피해 땅속에서 살아가는 일개 방파가 아니었다.
소림승 진문을 떨어뜨린 것은 아마도 소림사를 중원 무림에서 고립시키는 작전이리라.
다행히 당도들이 밧줄을 놓았을 때 진문은 암벽을 절반 이상 건너갔을 때였다.
추락할 때 암벽에 부딪쳤으면 진문의 몸은 멀리 튕겨 나갔을 것이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서 살아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서백은 진문이 그대로 추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망자 창궐 지역을 오가며 소림사의 연락책을 맡고 있는 진문. 그런 소림승이 이 정도 위기에서 목숨을 다하지는 않았으리라.
‘아미타불. 부디 무사하시길.’
서백은 진문이 심심하면 읊조리던 염불을 중얼거리며 진문의 안위를 빌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진문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키에에엑…….
짙은 안개 너머 어딘가에서 망자의 괴성이 들리자 서백은 발을 멈췄다.
‘망자로군.’
서백은 즉시 석가심결을 시전하며 호흡을 멈췄다.
‘어디냐?’
서백은 괴성이 들려온 쪽을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때 암벽 사이로 한 줄기 곡풍(谷風)이 세차게 불고 지나갔다. 그러자 일시적으로 짙은 안개가 걷혀서 주변 시야가 뻥 뚫렸다.
휘이이잉.
순간 서백은 망자 앞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뜨리고 눈썹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
그러고 보니 숭산 주위는 망자 천지라고 했던가.
키에에엑, 키에에엑, 키에에엑…….
주위 사방팔방의 모든 방위에서 수백수천의 망자들이 괴성을 으르렁거렸다.
서백이 떨어진 곳은 망자 밭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 * *
송현 일행은 진문이 기력을 되찾길 기다렸다.
암벽에 부딪쳐서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나무뿌리에 매달린 채 오랜 시간을 버텼던 진문.
그는 좁은 돌계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조식을 했다.
자칫 균형을 잃었다간 추락할 만큼 좁은 돌계단이었지만 진문의 신형은 명경지수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지?’
왕이삼은 입에서 침이 바싹 말랐다. 서백이 어떤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우 일각이 지났을 때 진문이 운기조식을 끝내고 눈을 떴다.
순간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숲속에서 마주친 호랑이처럼 진문의 두 눈에서 은은하면서 동시에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진문은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타박상이 낫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기력만큼은 최고 수준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에 기력을 완전히 되찾다니 대단한 내공이다…….’
왕이삼은 소문으로만 듣던 소림사 무승의 진면목을 직접 확인하자 새삼 놀라웠다.
송현이 진문에게 물었다.
“이 근방의 잔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을 부탁하오.”
“건너편 암벽으로 가려면 길을 돌아가서 밧줄 다리를 건너야 되오. 하지만 밧줄 다리가 끊겨 있었소.”
“분명 지하당의 짓일 것이오. 다른 잔도는?”
“이 잔도를 따라 내려가면 지상까지 갈 수 있소. 그러나 여기는 정식 잔도가 아니오.”
진문의 설명은 이랬다.
눈앞에 이어지는 잔도는 소림사와 지하당을 연결하는 경로가 아니었다. 처음 잔도를 만들 때 소림승들이 암벽을 타기 위해 임시적으로 만든 곳이라는 얘기였다.
“임시로 만든 곳이나 무림인이라면 내려가는 데 별문제는 없을 것이오.”
“그렇군. 그럼 지상으로 내려갑시다.”
그 말을 듣고 왕이삼이 끼어들었다.
“잠깐만. 지상이라면 망자가 판을 친다고 들었는데…….”
“그렇소.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니오… 한시라도 빨리 후배를 찾아야지, 암!”
송현의 무심한 대답을 듣고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결심을 굳혔는지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런 왕이삼을 보고 주은리가 뜻밖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겁에 질려서 꼬리를 말 때는 언제고, 지금은 또 물불 가리지 않고 용감무쌍하니 참으로 재미있는 사내로구나. 그렇지 않니?”
“캥.”
초랑이 소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짖었다.
“이쪽이오.”
진문이 앞장서서 잔도를 내려갔다.
왕이삼은 호기롭게 외쳤지만 막상 내려가려고 하자 오금이 저렸다.
게다가 눈앞의 잔도는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것은 물론, 만들다가 만 곳도 허다했다.
말이 돌계단이지 거리가 띄엄띄엄 불규칙하게 떨어져 있어서 징검다리나 마찬가지였다. 돌계단을 하나씩 건너뛸 때마다 왕이삼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렇게 송현 일행은 서백을 찾기 위해 지상으로 향했다.
* * *
서백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서 망자 떼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살폈다.
곡풍이 안개를 걷어간 근처만 해도 수백이 넘는 망자가 운집해 있었다.
여전히 안개가 감돌아서 확인할 수 없는 곳까지 더한다면 망자 떼의 숫자는 족히 수천을 넘을 터.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그러나 서백의 눈빛은 반대로 무심함의 극치에 달했다.
‘…….’
땅 말고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새까맣게 모여 있는 망자 떼를 보자 석가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석가장에서 탈출하던 그때도 지금처럼 망자 떼가 해일처럼 밀려오지 않았던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개죽음이 따로 없었다.
그날 서백을 탈출시키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승과 사모, 사형제들을 저승에서 볼 낯이 없을 테니까.
서백은 냉랭하게 식은 눈빛으로 망자 떼를 살폈다.
경거망동은 금물이었다. 지금은 망자 떼에게 자연스럽게 섞여서 망자 구역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저기다.’
서백은 운집해 있는 망자 떼를 빠져나갈 틈새를 찾아냈다.
눈앞의 망자 떼는 모두 혈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 호흡과 표정만 조심한다면 망자 구역을 돌파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스승이 석가심결을 전수하며 경고했던 말.
-목숨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반 시진 동안 써도 좋다. 그 이상 석가심결을 운용했다간 주화입마에 들지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라.
주어진 시간은 반 시진.
‘돌파한다.’
서백은 보법을 밟아서 망자 떼를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