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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15화 (115/123)

115화 구사일생(九死一生)(1)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송현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평소 무심한 서백이 크게 화낼 때가 있었다.

바로 왕이삼과 유소운이 실수로 죽을 위기에 처하거나 적에게 사로잡혔을 때였다.

당시 서백은 약관이 된 소년답지 않게 왕이삼과 유소운을 호되게 꾸짖지 않았던가.

만약 막무가내로 지하당과 맞서다가 자신이 죽는다면 서백은 슬퍼하기보다 분노할 것이 뻔했다.

그럼 훗날 저승에서 서백을 만나도 볼 낯이 없으리라…….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소.”

“지금 중요한 것은 서백과 소림승 진문을 구출하는 것이오. 지하당을 응징하는 것은 추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아, 소림승도 있었지.”

왕이삼은 그제야 서백 말고 진문도 밧줄을 타고 오다가 추락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잔도가 암벽 옆으로 비스듬히 이어져 있으니 내려가면서 찾는 게 좋겠소.”

“좋소. 내가 먼저 가겠소.”

처음 잔도를 오를 때 주저하던 왕이삼은 한시라도 빨리 서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앞장을 섰다.

일행은 서백과 진문이 떨어졌을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후미에서 따라오는 주은리가 송현에게 물었다.

“서백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글쎄.”

“오대오? 육대사?”

“굳이 고른다면 칠대삼으로 하겠소.”

“어느 쪽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죠? 칠? 삼?”

“…삼이오.”

“그렇군요.”

주은리는 더 묻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라왔다.

평소 상황을 철저히 파악해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송현.

과거였다면 그는 서백을 버리고 소림사행을 강행했을지도 몰랐다. 서백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그만큼 낮았다.

주은리에게는 칠대삼이라고 대답했지만 송현은 마음속으로 팔대이, 아니, 구대일일지도 모른다고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수색을 나선 것은 단순히 정(情) 때문이 아니었다.

가능성은 분명 낮지만, 왠지 서백이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

잔도를 두려워하던 왕이삼은 갑자기 경신법의 고수가 된 것처럼 불안한 돌계단을 훌쩍훌쩍 뛰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서백을 아끼기 때문이리라.

사천에서 서백과 왕이삼을 만나 동행했던 유소운도 지금 함께 있다면 왕이삼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서백을 찾아 나서지 않았을까?

‘소운은 의리가 있으니 분명 그러겠지.’

유소운은 그렇다고 치고, 강호의 진흙탕에서 평생 굴렀을 중년 도검수마저 목숨을 도외시하고 의리를 앞세우게 만들다니.

송현은 서백이란 소년이 어떤 면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깎아지른 암벽에 있는 잔도 계단은 곳곳에 이가 빠지고 이끼가 끼어서 걷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야를 가리는 짙은 안개가 문제였다.

무릎 아래는 안개에 잠겨서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안개 속에서 망자의 썩은 손이 뻗어 나와 발목을 잡아챌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동 중에 왕이삼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물었다.

“그나저나 그놈들 갑자기 어디서 났길래 쇠뇌를 쏜 거요?”

“지하당은 쇠뇌를 교묘히 숨기고 있었소.”

“쇠뇌를 숨겼다고? 어디에?”

“죽창이오.”

“뭐라고? 어떻게 말이오?”

“겉으로는 죽창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용수철로 만든 특수한 기관장치가 있는 것 같소.”

“평범한 죽창인 줄 알았는데 그런 눈속임을 쓰고 있었다니…….”

왕이삼은 지하당의 비밀을 깨닫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하당도들이 쇠뇌를 발사할 때 송현이 뒷덜미를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전신에 쇠뇌가 박혀서 고슴도치 꼴이 되었을 게 아닌가.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소?”

“비슷한 병장기를 다룬 적이 있소.”

송현은 과거 흑랑성 잠행 때 일을 떠올렸다.

당시 송현은 잠행조를 소림사 금강고로 데려가서 각자 임무에 맡는 기병(奇兵)을 고르도록 했다.

그때 송현은 유소운에게 매화뢰전(梅花雷箭)이라는 기병을 추천했다.

기다란 나무통처럼 생긴 매화뢰전은 앞에 여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쇠뇌 등의 각종 투사체를 발사했다.

내부에 용수철을 사용한 기관장치가 들어 있는 매화뢰전은 보통 노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기병이었다.

그런데 죽창 속에 그런 기관장치를 숨겨 놓았다?

지하당도들의 죽창은 보통 대나무보다 조금 굵은 크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 좁은 내부에 쇠뇌 발사 장치를 넣고 평범한 죽창으로 가장했다는 것은 상당한 자금과 기술력이 없이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

망자들을 피해서 지하에 땅을 파고 사는 사람들이 그런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송현은 지하당의 정체가 짐작되었다.

왕이삼도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지 물었다.

“무슨 놈의 무림인이 그런 기병을 쓰는 거요?”

“지하당은 그냥 무림 문파가 아니오. 그들은 관에서 보낸 조직일 것이오.”

“……!”

“내부에 쇠뇌 기관장치를 숨긴 죽창을 제작하는 것은 웬만한 명문정파에서도 힘든 일이오. 죽창 또한 실전 무공을 중시하는 관군에서 주로 쓸 만한 병장기요.”

“으음…….”

왕이삼은 송현의 말이 충격적이자 신음을 흘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럼 후배와 소림승은 왜 해코지한 거요?”

“그들의 목적은 세작을 구하러 온 것일 뿐, 애초에 소림승은 안중에도 없었소. 아마 관이 무림맹을 고립 시키려는 것이라 짐작되오.”

“밧줄 다리를 끊은 것도 지하당의 짓이겠군요?”

“그렇소.”

주은리가 끼어들며 말하자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왕이삼이 곧 분노를 터뜨렸다.

“이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는 지하당 놈들! 이 왕이삼이 당장 달려가서 네놈들을…….”

“경거망동하지 말란 말을 벌써 잊었나요?”

“그럼 후배가 아무 잘못 없이 놈들 흉계에 걸렸는데 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이냐?”

“제 부적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일걸요. 봐주라는 게 아니에요. 후배부터 구하고 계획을 세워서 응징해야죠.”

“끄응.”

주은리가 차갑게 한 마디 하자 왕이삼은 억지로 분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주은리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왕이삼은 마음만 앞세워 날뛴 자신이 창피해서 더욱 크게 소리쳤다.

“지하당 놈들아 기다려라! 다시 만나면 내가 끝장을 내줄 테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주은리도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게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서백이 지하당의 술책에 걸려든 것을 내심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송현은 냉정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그리 쉽지 않을 것이오.’

중원 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관이 심은 조직.

그것이 송현이 파악한 지하당의 정체였다.

‘관이 끼었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터.’

송현은 몇 년 동안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운남에 있었기 때문에 최근 무림 소식에 밝지 못했다.

그나마 전해 들은 소문은 황제가 수도를 옮긴다는 것이었다. 망자 창궐이 바로 수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새 수도는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황제는 하북과 요녕의 접경지에 있는 임시 거처에 기거하고 있었다.

요녕은 모용세가의 본진이기 때문에, 모용세가가 황제를 모시고 있을지 모른다는 뒷소문까지 나돌았다.

즉 자신의 본진이 새 수도로 입안되어 황제를 모시게 되는 곳이 장차 중원의 권력을 휘어잡을 터.

안 그래도 권모술수가 끊이지 않는 곳이 황궁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러니 물밑에서 얼마나 많은 권력 암투가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조차 안 됐다.

‘고래로 관과 무림은 서로 상관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하지만…….’

송현은 망자 창궐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황제는 천하의 민심을 다시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으리라.

관이 지하당을 장악하고 무림맹을 제거하려는 것이 그 증거.

송현은 금분세수를 한 뒤 세상을 등지고 운남에 은거해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결심을 깨고 다시 강호에 나오자마자 바로 권력 암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망자 창궐을 막기는커녕 이 상황을 이용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이 하나둘이 아니라니…….

왜 강호의 현실은 깨달을 때마다 씁쓸하기만 한 것일까.

그러나 다음 순간 송현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강호가 언제 올바로 돌아간 적이 있었는가?

그저 자신이 선 곳에서 해야 할 일을 해 나갈 뿐.

송현이 지금 할 일은 하나였다.

‘소림사로 가서 망자 창궐을 막는 작전에 참가한다.’

결심은 끝났으니 행동만 남았다.

그때 앞서 가던 왕이삼이 소리쳤다.

“저기 소림승이 있소!”

송현과 주은리는 재빨리 앞으로 나갔다.

진문은 잔도가 끝나는 곳에서 삼 장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암벽 틈새에서 자란 나무뿌리를 잡은 채 매달려 있었다.

지하당도들이 밧줄을 던져 버렸을 때 진문은 암벽을 거의 다 건넌 참이었다. 그 덕분에 암벽에 부딪친 뒤 굴러 떨어지다가 나무뿌리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천운이었던 셈.

“여기까지 뛸 수 있겠소?”

“해 보겠소.”

송현이 제안하자 진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문은 암벽이 파인 곳에 단단히 발을 박았다. 그런 다음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서 암벽을 차며 도약했다.

탓.

소림사 십팔나한인 진문에게 삼 장을 도약하는 것은 어린 아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

그러나 암벽에 부딪쳐서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것에 더해, 오랜 시간 나무뿌리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기력이 쇠잔해져 있었다.

다행히 진문의 도약이 포물선을 그릴 때 송현이 손을 뻗어 그를 잡았다. 진문은 아슬아슬하게 잔도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아미타불. 감사드리오.”

진문을 구했으니 잠시 쉬어도 좋으련만 일행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왕이삼이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후배는 보지 못했소?”

“후배? 서백 시주 말이오?”

“그렇소. 후배도… 후배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단 말이오.”

그 말에 진문은 잠시 말을 못 잇다가 소림사 특유의 반장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빈승은 암벽에 간신히 매달리느라 서백 시주를 살필 겨를이 없었소. 아미타불.”

“후배…….”

* * *

송현 일행이 진문을 구하기 대략 일각 전.

서백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검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무리 몸을 뒤집고 회전했지만 떨어지는 속도는 조금도 늦출 수 없었다. 제아무리 무림의 고수라도 대자연의 힘 앞에서는 그저 무력할 뿐.

오히려 어디선가 불어온 질풍이 서백의 몸을 종잇장처럼 뒤집자 현기증이 일었다.

서백은 이를 악물었다.

‘정신 차려라.’

서백은 공기 저항을 최대한 받도록 팔다리를 십(十) 자로 펼쳤다. 그러자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 늦추어진 기분이 들었다.

평생 익힌 내가무공과 경신법보다는 상황에 맞춰서 반응하는 임기응변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추락하다가는 눈 깜빡할 사이에 땅바닥에 떨어져 근골이 박살날 터.

그때 안개 너머로 보이는 암벽에 비스듬히 경사진 곳이 나타났다.

‘저기다.’

서백은 팔다리를 옆으로 접어서 몸이 비스듬히 추락하도록 했다.

땅바닥이든 암벽이든 지금 속도로 날아가서 부딪치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만약 누군가가 보았다면 서백이 공포를 못 이겨서 자살하려는 것으로 착각할 만한 장면.

그때 서백이 몸을 빙글 뒤집으면서 혁낭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서백의 손에 들린 것은 제갈세가의 기관진식 함정에 설치되어 있었던 은사 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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