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새로운 위협(4)
서백은 지하에 사람들이 숨어 있었을 거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대나무를 이용한 숨구멍이 그 증거.
그러나 땅속에 잠복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대나무를 썼을 뿐, 지하에 은신처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지하당이라는 괴이한 이름은 그냥 붙인 게 아니라 실제 지하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잠복 낌새가 희미하더라니.’
지하당도는 단순히 땅을 파고 잠복해 있던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지하 은신처에서 올라왔을 터.
서백과 송현이 낌새를 알아차리자마자 순식간에 포위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길상백이 가장 먼저 통로를 내려갔다.
지상과 수직으로 연결된 통로는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사다리가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서백은 길상백의 뒤를 따라 통로를 내려갔다.
이어서 일행이 하나씩 뒤를 이었다.
왕이삼은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그답게 불평을 중얼거렸다.
“쳇, 또 대나무야? 죽창에 사다리에, 유용하게도 쓰는군.”
수직 통로를 끝까지 내려가자 지하에는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진 토굴이 보였다.
토굴은 사방으로 길이 나 있었다.
즉 지금 서백이 있는 곳은 십(十) 자 모양으로 난 토굴의 교차로라고 할 수 있으리라
‘금(金) 자 통로가 중(中)에 속하는 건가.’
십(十) 자의 끝부분 네 곳이 동서남북에 속한다면 그 중앙은 자연히 중이 될 터.
곧이어 지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지하로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내려오는 지하당도가 통로를 막는 나무 뚜껑을 덮었다.
뚜껑을 덮었지만 지하는 어둠에 잠기지 않았다. 통로의 벽에 횃불이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길상백이 재차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지하당에 출입하려면 망자에게 물린 자국 유무를 반드시 검사받아야 하오. 예의에 어긋나지만 따라 주기 바라오.”
“물론입니다.”
서백은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길상백이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강표와 지하당도들이 횃불을 들고 서백 일행을 조사했다.
그들은 주로 목덜미와 손발을 살폈다. 일행 넷의 몸에서 물린 자국을 발견 못 하자 강표는 길상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정상이니 지하당으로 안내하겠소.”
길상백이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섰다.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엥? 이게 다야?”
그는 왕가 요새 때를 떠올린 것이었다. 당시 망자에게 물린 상처를 조사받기 위해 서백과 왕이삼은 옷을 홀랑 벗지 않았던가.
그때와 비교하면 지하당의 조사는 애들 장난 같은 수준.
하지만 서백은 납득할 수 있었다.
“여기는 망자 창궐 중심지입니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망자 떼와 마주치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런가?”
“도처에 망자밭이 널려 있습니다. 망자 떼와 마주쳤다면 물린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죽거나 망자가 되었을 겁니다.”
“흐음, 그럼 그냥 넘어가도 되잖아?”
“저들은 물린 상처를 조사한 것이 아닙니다. 목에 검흔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한 겁니다.”
“……!”
그제야 왕이삼은 서백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침을 삼켰다.
그가 사천에서 서백을 처음 만났을 때, 서백은 의혈방주 진석평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목에 있는 검흔을 보고 망자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미 망자가 아닌지 확인을 받았다니…….
그런 생각을 하자 왕이삼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길상백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토굴을 이동하며 서백 일행을 안내했다.
뜻밖에도 오래 가지 않아 길상백은 발을 멈췄다.
“강표.”
그러자 강표가 앞으로 나와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는 기관장치가 붙어 있는 커다란 돌판이 있었다.
물레방아 모양의 기관장치는 왕가 요새의 문에 붙어 있던 것과 흡사했다. 기관장치를 돌려서 돌판을 들어 올리면 밑으로 가는 통로가 나오는 구조이리라.
‘토굴이 끝이 아니었군.’
서백의 짐작이 옳았다.
강표가 두 손으로 기관장치의 자루를 잡고 몇 바퀴를 돌렸다. 끼기기긱… 끽. 그런 다음 돌판을 들어 올리자 재차 통로가 나왔다.
적을 막기 위해 이중으로 입구를 만드는 것은 흔하다. 문제는 일차 입구는 나무 뚜껑이었던 반면, 이차 입구는 넓고 두터운 돌판이라는 점이었다.
혼백 없는 혈귀가 지하당의 일차 입구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혈귀가 나무 뚜껑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면?
눈앞의 돌판 입구는 그걸 위한 방지책이리라.
설령 혈귀가 나무 뚜껑을 우연히 열었다고 쳐도 자루를 잡고 빙글빙글 돌려야 하는 기관장치를 여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즉 진짜 지하당의 은신처는 지금부터 시작된다는 뜻.
서백도 지하당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절대 얕볼 수 없는 곳이군.’
물자 부족 탓에 복장은 제각각 따로이며 병장기는 죽창을 급조해서 쓰는 상황.
그러나 지하당은 지금까지 접한 어떤 세력보다 망자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나름의 대비책도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러니 망자 창궐 중심지에서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
반면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지하당 규모의 지하 은신처는 현재 시점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망자 창궐 이후 물자 수송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게 뜻하는 것은,
‘망자 창궐 이전에 만든 곳일 터.’
지하당은 망자가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이전에 앞날을 예측하고 은신처를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망자를 피하는 것 말고 은신처를 만든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었다.
망자 창궐 중심지에 굳이 은신처를 만들기보단 다른 지역으로 피난 간 후 요새를 구축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니 말이다.
길상백은 돌판 아래로 나 있는 통로를 내려갔다.
일차 입구를 내려올 때는 수직으로 난 통로였는데, 돌판 아래 통로는 특이하게도 원을 그리는 나선 모양의 돌계단이었다.
아래로 내려갈 때 나사를 돌리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게 되는 형태.
계단을 두어 바퀴 돌았을 때 왕이삼이 입이 근질거리는지 재차 불평을 했다.
“어지러워서 정신 사납네. 왜 이렇게 쓸데없이 빙글빙글 돌아가게 만들었지?”
“은신처에 침입하는 무림인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뭐라고? 망자가 아니라?”
“계단을 나선 모양으로 지은 것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병법입니다.”
“병법? 괜히 어지럽게 만든 게 아니고?”
“지금 자신이 은신처로 내려가는 침입자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싸울 것 같습니까?”
“뭐, 내려가면서 박도를 휘두르겠지.”
“한번 해 보시죠.”
“여기서? 지금?”
“정말 박도를 쓰지는 말고 시늉만 내 보시라는 말입니다.”
왕이삼은 영문을 모르지만 서백이 농담을 안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박도를 쥔 다음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왕이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도를 휘두르려고 하자 나선 계단의 중앙에 있는 기둥에 막혀서 공간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거 기둥 때문에 박도를 휘두르기가 곤란한데.”
“그렇습니다. 적이 오른손잡이라면 박도뿐 아니라 도검도 마찬가지죠.”
“……!”
그제야 왕이삼은 나선 계단의 비밀을 깨달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침입자는 자신의 오른쪽에 위치한 기둥 때문에 공간이 비좁아서 도검을 휘두르기 애매해지는 것이었다.
반면 아래에서 방공호를 지키는 자는 훨씬 수월하게 도검을 휘두를 수 있을 터.
“오른손잡이는 이 계단을 내려갈 때 공간과 시야가 한정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그, 그렇군.”
“검이 아니라 창이라면 더욱 문제가 큽니다. 둥글게 말린 계단에서는 창을 가로로 들기조차 불가능하니까요.”
침입자의 무력을 약화시키는 계단.
바로 지형지물을 이용한 병법이었다.
물론 나선 계단이 완벽한 엄폐는 아니었다.
오른손잡이가 아닌 왼손잡이에는 통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좌수검법을 익힌 자에게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고수라면 나선 계단의 비밀을 알아차리는 순간 설령 오른손잡이라도 즉석에서 왼손으로 검을 사용할 터.
그러나 좁은 계단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났을 때 선두에 선 자를 당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리라.
즉 지하당의 은신처는 통로부터 면밀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짐작이 옳았군.’
지하당의 은신처가 단순히 망자 떼를 피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예측은 정확했다. 은신처는 망자는 물론 무림인을 막기 위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망자 창궐 이전에 만들어진 이유는 충분하리라.
‘타 문파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곧이어 나선 계단이 끝나고 일행은 지하당의 은신처에 발을 들였다.
지금까지 이동한 시간으로 볼 때 은신처는 꽤 깊은 장소에 위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지하는 벽 곳곳에 기름불이 타고 있었고 복도도 생각보다 좁지 않았다. 그러나 땅속 깊은 곳에 들어왔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복도를 지나던 중 길상백이 옆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식량 창고요.”
방에는 쌀가마니가 천정에 닿을 만큼 가득 쌓여 있었다.
“곡식뿐 아니라 무와 야채를 재배해서 절인 반찬으로 만들어 먹소.”
“지하에 물이 흐르는군요.”
“먹을 물은 물론 뒷간으로 쓸 수 있도록 지하수가 흐르고 있소.”
“지하수가 흐른다면 가축을 기를 수 있겠군요.”
“돼지와 닭을 기르고 있소. 가축을 모두 잡아먹어도 벽곡단만으로 지하당도들이 최대 삼 개월을 버틸 수 있소.”
길상백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지하당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뜻.
서백은 지하당의 면면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감상과 함께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석가장도 이렇게 지하 은신처를 만들었다면 모두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생각은 망상에 불과했다.
석가장은 사천 서쪽의 험준한 산속에 외따로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 인가가 없을 뿐더러 세상 밖의 소식을 전해 듣기 힘들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 갑작스럽게 망자 떼가 들이닥쳤다. 그 바람에 스승, 사모, 사형제들은 도망칠 엄두도 못 내고 수만 구의 망자 떼에게 포위되었던 것이다.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온 자는 오직 서백 하나뿐.
‘결국 정보가 중요하다.’
서백이 목숨을 걸고 소림사로 가려는 이유도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서 망자를 멸절할 정보를.
그때 뒤에 있는 송현한테서 전음이 들려왔다.
[여기는 망자 창궐 이전에 만든 곳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백도 은밀하게 전음을 전했다.
[과거 서장 구륜사에 대항하기 위해 무림맹이 이런 곳을 준비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실제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군.]
송현의 설명을 듣자 지하당의 위치와 존재 이유가 이해되었다.
서장 구륜사가 소림사를 침범할 경우, 지하당에 잠복해 있던 인원이 뒤를 친다면 전략상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즉 지하당은 무림맹의 전략적 요충지인 셈.
[그럼 지하당은 지금도 무림맹의 명령을 따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군요.]
[그건 확실하지 않다.]
[왜입니까?]
[그랬다면 그냥 자신들이 무림맹 소속이라고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당은 그러지 않았다.
그때 복도가 끝나고 넓은 공간이 나왔다.
공간은 십여명의 사람이 들어가도 충분한 넓이였다. 또한 큰 탁자와 의자가 있어서 식사는 물론 회의까지 가능해 보였다.
“편히 앉으시오.”
길상백이 상석에 앉자 서백 일행도 자리에 앉았다.
지하당도가 물을 끓이고 차를 내왔다.
먹을 것도 부족한 망자 창궐 시대에 찻잎까지 저장하고 있다니. 서백 일행은 지하당의 철저한 준비가 새삼 놀라웠다.
서백 일행이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그럼 손님들에게 본론을 말하겠소.”
‘시작이군.’
서백은 처음부터 지하당이 어떤 속셈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비밀 은신처를 소속도 불확실한 무림인들에게 보여 줄 리 없을 테니까.
그런데 길상백이 꺼낸 말은 서백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하당은 무림맹에서 보낸 소림승을 찾고 있는 중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