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새로운 위협(3)
정체불명의 그림자들은 수십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림인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됐다.
복장이 제각각 다른 것은 물론, 몇 명은 도검, 몇 명은 활, 몇 명은 창, 이런 식으로 들고 있는 병장기 역시 달랐기 때문이다.
도검, 활, 창을 들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대나무의 끝을 뾰족하게 잘라 만든 죽창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천으로 만든 입 가리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산 사람을 보고 물어뜯으려고 마구잡이로 덤비지 않는 것을 보니 망자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망자 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이삼은 기겁하며 놀랐다.
방금까지 동서남북 사방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수십 명의 인원이 일행을 포위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차라리 망자 떼한테 포위당했다면 긴장했을지는 몰라도 이처럼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서백과 송현의 존재 때문에 의문은 더욱 컸다.
망자의 기척을 귀신처럼 알아차리던 둘이 포위당할 때까지 몰랐다는 사실이 왕이삼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설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백과 송현을 뛰어넘는 고수일 리는 없을 터인데…….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혹시 녹림인가?’
관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험준한 산속에 숨어 살다가 여행객들을 발견하면 목숨과 금품을 빼앗는 도적 무리, 녹림.
그러나 무림밥을 오래 먹은 왕이삼은 사람들이 녹림과는 다른 분위기라고 느꼈다.
눈빛이 달랐기 때문이다.
녹림처럼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은 특유의 눈빛이 있다. 상대를 먹잇감으로 보고 얕잡아보는 눈빛이 그것이다.
반면 일행을 포위한 자들의 눈빛은 적의에 가득 차 있었다. 남의 것을 빼앗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것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보이는 싸늘한 눈빛.
곧이어 포위망에서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앞으로 나오더니 적막을 깨고 말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잠복해 있다가 순식간에 일행을 포위했으니, 그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면 큰 성과를 올렸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데 공격하지 않았다?
아군인지 적인지 안 다음에 공격해도 무방하다는 뜻.
서백은 이쪽도 맞춰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암습을 펼쳤어도 가만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지.’
서백이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이쪽은 망자 떼를 피해서 숲을 지나가던 여행객입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여행객?”
사내가 냉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진 않겠지?”
“중원 땅에서 망자가 창궐한 중심지가 아닙니까.”
“그걸 알면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군!”
사내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비꼬았다.
하지만 서백은 무심한 눈빛으로 말을 계속했다.
“일행의 목적지는 소림사입니다. 소림사가 지나가던 개가 웃을 곳이라니, 요즘 개는 겁이 없나 보군요.”
“……!”
서백의 말에 사내는 물론 일행을 포위한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며 흡 하고 숨을 멈추었다.
그들 말고 놀란 자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왕이삼이었다.
‘후배, 어쩌자고 소림사행을 말한 것이냐?’
소림사행을 얘기했다가 불편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왕이삼은 서백의 심중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서백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숭산 태실봉의 산자락.
험준한 지형 때문에 소실봉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남아 있으나 엄연히 소림사의 구역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일행을 포위한 자들이 소림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 거라고 짐작한 것이었다.
만약 소림사와 적대 관계라서 일행을 공격한다면?
‘베어 버리고 길을 가면 그만이다.’
이제 숭산에 도착한 만큼 서백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속전속결. 앞을 막아선 자들이 호의를 보인다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힘으로 길을 열고자 소림사행을 말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제법 청수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림사라고?”
사람들이 좌우로 길을 비키자 한 중년인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중년인은 목소리는 물론 표정과 몸동작에 고고한 기품이 배어 있었다.
또한 얼굴이 햇빛을 많이 접하지 않았는지 여인처럼 새하얬다.
‘문사 출신인가?’
적어도 농민이나 상인 출신은 아니리라.
그러나 황색 도포의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은 거친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다시 보니 머리칼에 가려진 눈가 옆에도 길게 검상이 나 있었다.
게다가 서백 일행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빛까지.
무림인이 아니라 문사 출신인 듯 보이는 중년인은 망자 창궐 세상을 맞아서 풍상을 겪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표, 경거망동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중년인이 한 마디 하자 강표라는 이름의 험상궂은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서백은 중년인을 살피며 생각했다.
‘이자가 수장이군.’
중년인이 서백 일행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나는 지하당(地下堂)의 당주인 길상백이라고 하오. 소림사로 간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그럼 묻겠소. 소림사는 왜 가는 것이오?”
“망자 창궐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서백은 거침없이 일행의 목적을 말했다.
서백이 예상하건대, 저들은 망자 창궐의 중심지에 은신처를 두고 생활하는 자들이리라.
즉 망자 창궐을 막는다는 대의명분이 분명히 통할 것이라 예측하고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서백의 예상은 적중했다.
일행을 잠시 주시하던 길상백이 곧이어 포권지례를 하며 제안했던 것이다.
“망자 창궐을 막으러 이 험지에 오다니 고생 많으셨소. 지하당이 안전한 거처를 드릴 테니 쉬어 가는 건 어떻소?”
말도 버리고 이동 중인 서백 일행에게는 그야말로 단비 같은 제안.
그러나 길상백 말고 다른 자들은 서백 일행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당주님, 저들이 누군지 알고 들이시려는 겁니까?”
강표라는 사내가 길상백의 뒤에 붙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길상백은 그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인 뒤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지하당은 무림인이든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몸을 맡길 수 있는 곳이다. 아니 그런가?”
“…….”
강표는 눈썹을 일그러뜨렸지만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길상백의 목소리와 말투는 사뭇 자애롭게 들렸는데, 다음 순간 그가 단순한 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서백 일행을 돌아보며 서늘한 눈빛으로 한 마디 했던 것이다.
“단 망자만 빼고 말이오.”
“…….”
길상백이 신호를 보내자 사람들이 서백 일행에게 겨눴던 병장기를 내렸다.
“따라오시오.”
“그럼 잠시 폐를 끼치겠습니다.”
서백이 송현을 돌아보자 그도 가 보자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숭산의 암벽을 타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서백의 뜻에 응한 것이었다.
서백 일행은 길상백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왕이삼이 서백의 옆에 바싹 붙어서 속삭였다.
“후배, 저놈들을 따라가도 정말 괜찮겠냐?”
“괜찮은지 아닌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저들이 걸림돌이 된다면 치워 버리고 길을 가면 그만 아닙니까.”
“쩝, 하긴 그렇지.”
왕이삼은 서백과 송현의 실력을 잘 알기에 할 말이 없었다.
“주 소저도 경신법은 물론 신묘한 술법이 있으니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일도 아닐 겁니다.”
“그런가. 그럼 나는?”
“문제가 생기면 잘 도망치십시오.”
“알았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길길이 날뛰며 분노했을 테지만 자기보다 고수인 서백이 말하자 별말 없이 인정하는 왕이삼이었다.
서백이 행동 지령을 알려 주자 왕이삼은 내심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이 편하자 이번에는 남의 흠결이 눈에 들어왔다.
왕이삼은 지하당도(地下堂道) 대부분이 도검 말고 죽창을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쳇, 고작 죽창 들고 그리 위세를 떤 건가?”
“죽창이 어때서요.”
뜻밖에도 서백이 딴지를 걸었다.
“지하당? 해괴한 이름이지만 그래도 무림의 방파인데 죽창을 들다니 어이가 없지 않냐?”
“다들 피난 갔는데 대장간을 어디서 찾습니까. 죽창은 대장간이 없어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병장기죠.”
“그, 그런가.”
“또한 창은 망자 상대로 가장 효율적인 무기입니다.”
망자를 처치하려면 혈선충의 심맥을 파괴해야 되는데, 심맥은 목 뒤와 두개골의 밑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정면에서 검으로 목을 베어도 심맥은 그대로 목 위에 붙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반면 창은 길이가 길다는 특성상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찌르는 동작이 검보다 수월하다.
서백은 왕이삼에게 그 점을 지적하며 말했다.
“명문정파의 창술을 몰라도 정확한 동작만 익히면 혈선충의 심맥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설령 창이 목에서 빗나가더라도 신체 중 아무 곳이나 찌르면 무작정 돌진하는 망자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 가능하죠.”
“쩝.”
왕이삼은 재차 입을 다물었다. 서백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다.
죽창은 도검은 물론 쇠붙이가 부족한 당금,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최선의 수이리라.
서백이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지하당도 모두가 입에 두르고 있는 가리개였다.
‘망자에 대한 지식이 있군.’
망자는 산 사람의 숨결을 냄새처럼 맡는다.
내공심결을 익히지 못한 일반인은 숨을 오래 참을 수 없다. 두터운 천으로 만든 입 가리개를 한 것은 최대한 숨결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일 터.
‘천으로 완벽하게 숨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희노애락의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그것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명문정파의 무림인이 아닌 자들이 표정을 들킬 정도의 거리까지 망자가 접근했다면 아마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망자에 대한 지식은 존재한다. 반면에 물자는 부족한 상황.
서백은 지하당이 어떤 곳일지 궁금했다.
궁금함은 금세 풀렸다.
일행이 불과 수십 걸음밖에 가지 않았는데 지하당도들이 발을 멈췄던 것이다.
길상백이 서백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가 지하당의 금(金) 자 통로요.”
그 말에 왕이삼이 재차 서백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금 자 통로? 무슨 소리지?”
“확실치는 않지만 통로에 오행을 붙인 것 같군요.”
오행(五行)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중의 오행으로,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를 뜻한다.
즉 지하당의 통로는 다섯 곳이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이삼도 그걸 깨달았는지 불평을 내뱉었다.
“쳇, 복잡하게 뭔 놈의 오행이냐. 그냥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으로 하면 알기도 쉽고 얼마나 편해?”
그 말에 서백은 평소답지 않게 눈썹을 찡그렸다.
“왕 선배, 정곡을 찌르는 말이군요.”
“엥? 내가 뭘 했는데?”
뜬금없이 칭찬을 듣자 왕이삼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무심결에 내뱉은 왕이삼의 불평.
그러나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하당은 다섯 개의 통로 위치를 외부인이 모르도록 이름 붙인 겁니다. 동서남북중은 위치를 쉽게 알 수 있지만, 목화토금수로 하면 어느 쪽에 있는 통로인지 알기 힘드니까요.”
“그런가?”
허접해 보이는 죽창을 든 것도 모자라 괴상한 이름을 붙인 방파, 지하당.
그러나 지하당은 안전을 위해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때 길상백이 옆으로 비키자 서백 일행의 눈앞에 지하당의 통로가 나타났다.
“……!”
서백은 두 번째로 눈썹을 찡그렸다.
수풀과 바위로 가려져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땅 밑으로 가는 통로가 뻥 뚫려 있었다.
지하당은 이름 그대로 지하에 있는 방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