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새로운 위협(2)
일행은 오가연맹 요새가 왜 소림사로 가는 길목을 막는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요새를 떠나자마자 곳곳에서 망자 떼가 출몰했던 것이다.
특히 암벽이 사라지고 벌판이 나오자 망자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불어났다.
망자 떼가 접근하지 못하는 험준한 협곡에 요새를 세운 오가연맹의 술책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남궁진의 얕은꾀가 모든 것을 망쳤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망자들이 혼백을 잃은 혈귀라는 점이었다.
만약 소삼락 같은 명령자(命令者)가 있다면 혈귀들을 조종해서 일행을 포위하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망자 떼는 생전에 농민이나 상인이었을 법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녹림의 무리였을 것 같은 망자 떼도 보였다.
낙양, 개봉, 장안.
손꼽히는 대도시가 몰려 있는 중원의 중심지.
그런 곳에서 망자가 창궐했으니 피난 못 간 사람들은 모두 망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를 증명하듯 간혹 나오는 마을은 인기척은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황량한 마을을 보며 왕이삼이 한숨을 쉬었다.
“쥐새끼 한 마리 없군. 사천에서는 그래도 사람이 살던 흔적은 남아 있었는데.”
“점점 망자 창궐 중심지로 가고 있다는 뜻이죠.”
서백이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 왕이삼은 내심 걱정이 태산이었다.
‘역시 진작 후배한테 말하고 빠질걸 그랬나.’
하지만 소림사가 이제 코앞인데 그냥 돌아가자니 아까웠다.
길을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힘들게 망자 떼를 뚫고 중원을 가로질러 왔는데 혼자 무슨 수로 되돌아간다는 말인가?
왕이삼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동이였다.
그나마 한 가지 좋은 점은 말을 타고 있는 덕분에 지금까지와 달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행은 망자 떼를 발견하면 접근하지 않고 빙 돌아서 우회했다. 말을 타고 있어서 가능한 이동 방법.
곳곳에 퍼져 있는 망자 떼 탓에 일직선으로 길을 갈 수는 없었으나 크게 속도가 느려지지는 않았다.
숫자가 몇 안 되는 망자들과 마주치면 서백과 송현이 나서서 재빨리 도륙한 다음 그 장소를 돌파했다.
그러니 일행의 이동 속도는 어느 때보다 빨랐다.
특히 송현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표국 출신 송현은 하남 땅의 지리를 자기 집 안방처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과거 소림사를 방문한 적이 있어서 지도 없이도 길을 찾을 정도였다.
하루하루, 소림사를 향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렇게 며칠 간 망자 떼를 피하며 이동했을 때였다.
지세가 점점 험준해지더니 급기야 높은 산이 나타나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또 시작이군. 이제 산과 물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한데 말야.”
왕이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행은 말을 타고 갈 수 있는 최대한 높은 곳까지 이동했다.
그러자 하남 땅의 광활한 벌판이 눈앞에 드러났다.
문제는 벌판 곳곳이 꿈틀거리는 검은 얼룩으로 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망자 떼가 무리를 지어 방황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산과 물이 지긋지긋하셔도 어쩔 수 없겠습니다. 저래서야 벌판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요.”
“천지가 이렇게 넓은데 눈에 보이는 데가 다 망자 판이라니 거참.”
왕이삼이 혀를 차자 송현이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능선을 타고 가면 숭산과 연결될 것이오.”
이제 평지는 망자 떼가 너무 많아서 이동이 어려우니, 일행은 송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일행은 그동안 타고 온 말을 안장과 마구를 벗기고 놓아주었다. 앞으로 지세가 더 험준해지고 깎아지른 암벽이 나올 테니 더는 말을 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놔줘도 괜찮을까?”
“짐승이 사람보다 생명력이 높습니다. 망자의 기척을 본능적으로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사람이 사는 곳까지 무사히 갈 겁니다.”
말들이 떠나려 하자 초랑이 주은리의 소매에서 고개를 내밀고 캥 하고 울부짖었다. 동물끼리 서로 교감하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히히힝. 말들은 일행과 초랑을 보며 한 차례 투레질을 한 다음 남쪽으로 달려갔다.
왕이삼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씁, 아무래도 아까운데.”
도검수들은 싸움이 교착 상태가 돼서 말이 필요 없어지면 잡아먹는 버릇이 있었다.
음식은 바닥난 지 오래고 보급은 언제 올지 모르니 뭐라도 먹고서 체력을 비축해야 살아날 길이 있지 않겠는가.
“잡아서 육포를 만들면 꽤 먹을 만한데 말야.”
“육포 여기 있어요.”
왕이삼의 한탄이 어이없었는지 주은리가 객잔에서 갖고 온 육포를 내밀었다.
왕이삼은 천연덕스럽게 육포를 받아들고 씹었다.
“역시 주 소저 솜씨는 명불허전이라니까! 어떻게 말린 육포의 풍미가 이렇게 대단하지?”
“중원에는 다리 네 개가 붙어 있으면 의자만 빼고 맛있게 먹는다는 말이 있죠.”
“멋진 말이오, 와하하하!”
왕이삼은 주은리가 교묘한 말로 비꼬는 것도 모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없자 일행은 짐을 등에 메야 했다. 체력도 소진될 뿐더러 이동 속도도 자연 느려졌다.
반면 홀가분해진 점도 있었다. 말이 없으니 능선이나 암벽을 마음대로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지대는 망자가 드물다는 장점이 있었다.
일행은 밤에 노숙을 한 뒤 해가 뜨면 바로 움직이기 시작해서 해질녘까지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산을 타자 일행은 숭산에 도착했다.
“숭산이군.”
하남 지리를 안방처럼 아는 송현이 말했다.
“드디어 숭산이군! 그런데 소림사는 어디 있는 거요?”
“소림사는 아직 멀었소.”
“멀었다고? 방금 숭산에 다 왔다고 하지 않았소?”
왕이삼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송현이 설명했다.
“숭산에는 세 개의 커다란 산봉우리가 있소. 동쪽에 있는 것을 태실봉(太室峰), 중간을 준극봉(峻極峰), 서쪽을 소실봉(少室峰)이라 하오. 소림사는 바로 소실봉에 있소.”
“잠깐만. 우리가 동쪽에서 가고 있으니 그럼…….”
“그렇소. 지금 도착한 곳은 태실봉이오.”
“……!”
송현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왕이삼은 입을 딱 벌렸다.
일행이 지금 있는 곳은 태실봉이니, 숭산의 동쪽 끝자락에 간신히 도착했을 뿐이었다.
즉 앞으로 갈 길이 태산 같다는 뜻.
왕이삼은 무심한 송현이 답답해서 일부러 서백에게 귓속말을 했다.
“후배, 소림사 가본 적 있냐?”
“없습니다. 지금 생전 처음 가려는 것 아닙니까.”
“아, 그렇지. 어쨌든 숭산에 왔으니 하루 이틀이면 소림사에 도착하겠지?”
“그거야 저는 모르죠.”
그러자 송현이 왕이삼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서백과 송현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내공의 소유자이니, 왕이삼이 아무리 목소리를 죽여도 평소 말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숭산은 중원 오악 중 중악(中岳)으로 모두 일흔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서의 길이가 일백 리에 이르오.”
“이, 일백 리(里)라고?”
“그렇소.”
왕이삼은 재차 입을 딱 벌렸다.
일백 리라면 앞으로도 꼬박 며칠을 가야 하는 거리가 아닌가?
“소실봉은 숭산 반대편의 서쪽에 있으니 여기서 일백 리를 가면 나올 것이오. 단지 숭산은 지세가 험난한 것으로 유명하니 평소보다 이동 속도가 늦어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
“…….”
왕이삼은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송현은 무심한 표정과 달리 설명할 때는 항상 알기 쉽게 풀어 주었는데, 막상 얘기를 듣고 나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답답함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이제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일백 리, 그것도 험준한 산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왕이삼은 김이 빠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던 게 나았겠군.’
왕이삼은 내심 불만이었으나 말을 꺼낼 순 없었다.
길이 멀다고 짜증 내는 것은 어린애나 할 법한 불평이 아닌가?
“이동을 재개하겠습니다.”
왕이삼의 기분은 아는지 모르는지 서백은 잠시 멈췄던 일행을 독촉했다.
일행은 수풀과 나무가 울창하게 솟아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한 시진 정도 숲을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서백이 제자리에 서더니 팔을 수직으로 세워서 주먹을 쥐었다.
정지 신호.
서백 바로 뒤를 따라가던 왕이삼은 깜짝 놀라서 발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사방팔방 어디에도 망자는 보이지 않았다.
왕이삼이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후배, 망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갑자기 왜 멈춘 거냐?”
“쉿.”
서백이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뒤를 돌아보자 송현이 싸늘한 얼굴로 검자루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주은리 역시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으며, 그녀의 소매에서 담비 초랑이 살짝 고개를 내민 뒤 캥 하고 짖었다.
왕이삼은 그제야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을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서백과 송현은 왕이삼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망자의 접근을 알아차리곤 했다.
둘의 무공 수위로 볼 때 당연한 일.
그러나 소림사에 가까워질수록 망자 떼의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에 왕이삼도 어렵지 않게 망자의 울부짖음이나 기척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망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개가 짖는 것 같은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왕이삼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왕이삼이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후배, 대체 망자가 어디 있다는 거냐?”
“망자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인기척? 사람이 있다고?”
왕이삼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주위에는 밤새 내린 비로 사람 허리 높이까지 자란 수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수풀밖에 안 보이는데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냐? 하늘로 솟았냐, 땅으로 꺼졌냐?”
왕이삼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는데, 그 말에 서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정답이군요.”
“엥? 정답이라니…….”
“땅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게 그 증거입니다.”
서백이 검지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왕이삼은 검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가 서백이 가리킨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신음을 흘렸다.
“대나무?”
“네. 그냥 대나무가 아니라 사람이 일부러 땅에 박아놓은 것입니다.”
“……!”
왕이삼이 다시 살피자, 서백 말대로 땅속에 깊이 박힌 대나무가 끝이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비바람 때문에 꺾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검으로 벤 흔적!
머리 회전이 느린 왕이삼도 대나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땅에다 숨구멍을 만들어 놓았군!”
대나무는 중간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위아래를 자르면 대롱 모양이 된다.
왕이삼은 도검수 시절 문파 간의 암투에 끼어서 도망칠 때가 있었다. 당시 물속에 숨어서 자객들을 피할 때 대나무를 잘라서 입에 물고 끝을 밖으로 내놓아서 숨을 쉴 수 있었다.
즉 눈앞의 대나무는 땅 밑까지 공기가 통하도록 만든 장치였다.
“대체 어떤 자들이 땅속에 있는 거지? 두더지도 아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대던 왕이삼이 말을 마치기도 전, 수풀이 부스스 움직이더니 정체불명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 같은 장면.
“……!”
왕이삼은 화들짝 놀라서 박도를 쥐었다.
서백이 주먹을 쥔 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재차 수신호를 보냈다.
약속된 수신호를 보고 일행은 재빨리 움직였다.
서백과 송현은 선두와 후미에 해당하는 북과 남으로, 왕이삼과 주은리는 각각 동과 서에 해당하는 방위로 이동했다.
서로 등을 지고 사방위(四方位)를 지키는 진형.
곧이어 그림자들이 동서남북 네 방면에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백 일행은 포위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