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질풍무사-105화 (105/123)

105화 새로운 위협(1)

서백은 땅에 떨어진 남궁진의 목을 잠시 지켜봤다.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가 없자 왕이삼이 다가와서 말했다.

“망자는 아니었군.”

“그렇군요.”

“망자가 아니라면 용서해 줄 생각이었냐?”

“천만에요. 남궁세가를 통째로 준다고 해도 목을 벨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왕이삼이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씁, 남궁세가 재산의 절반이면 평생 놀고먹을 텐데.”

서백은 그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아무 반응 없이 평소처럼 무심했다.

왠지 머쓱해진 왕이삼은 송현을 보고 물었다.

“근데 저자가 오가연맹의 임시 맹주이자 남궁세가의 고수 맞소? 뭐 저렇게 약해빠진 건지.”

“서장 구륜사 쟁투와 흑랑성 사건 이후 중원의 고수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소. 그 틈을 노려서 세 치 혀를 잘 놀리는 자가 패권을 차지한 것이오.”

“쳇.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라더니.”

“남궁진이 여우는 맞지만 무공이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소.”

“그럼?”

“상대가 너무 강했을 뿐이지.”

남궁진의 상대는 바로 서백.

송현이 서백을 칭찬하자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흐뭇해했다.

‘저 흑도 놈도 후배가 대단한 걸 알아보는군.’

제갈세가에서 송현의 귀신같은 검법을 본 이후 왕이삼은 송현을 흑도 출신으로 오해하면서도 그의 무공만큼은 인정하는 것이었다.

서백이 일행을 보며 말했다.

“오가연맹 요새를 무사히 돌파했습니다. 남궁진이 자기 꾀에 빠져서 벽력탄 제조 시설을 폭파했으니 후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질들도 구출했죠.”

“첫 번째 잠행은 만점이군!”

왕이삼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송현도 내심 동의하는지 별말이 없었다.

“그런데 주 소저를 어떻게 할지 문제가 남았습니다.”

“아니, 주 소저가 왜?”

왕이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고수 대접이 남다른 왕이삼.

그는 요새 잠행에 주은리의 술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자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어느새 바뀐 것이었다.

그런 왕이삼을 잘 알았지만 지금은 농담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백은 주은리와 창고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씩 설명했다.

서백의 얘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사실이 그랬다.

주은리가 오가연맹의 요새를 잠입하기 위해 객잔을 구입한 것, 부적으로 서백을 속이고 모습을 감춘 것, 왕일과 왕이가 실은 흑도의 살수 출신이며 맹세를 위해 스스로 혀를 잘랐다는 것까지.

왕이삼은 얘기가 반전될 때마다 식겁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아무 동요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던 송현이 입을 열었다.

“고호문이라.”

“알고 계십니까?”

“이름은 들어 봤다. 하지만 워낙 신비에 싸인 문파라서 실제 존재하는 곳인지 표사들도 확신하는 자가 없었지.”

그 말에 주은리가 모용화정에게서 되찾은 요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고호문은 실재합니다. 가문의 신물을 되찾았으니 다시 중원 무림에 이름을 떨칠 거예요.”

“…….”

서백은 침묵한 채 송현과 시선을 교환했다.

말은 안 했지만 송현을 잠행조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의견을 묻는 눈빛.

감 좋은 왕이삼도 그 눈빛이 뜻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불평했다.

‘쳇, 저 흑도 놈이 수장이라고? 난 인정 못 해.’

그런데 송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왕이삼에게 묻는 것이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이오?”

“나, 나 말이오?”

“거기 당신 말고 또 있소?”

“…….”

왕이삼은 송현이 강하게 처벌하자고 얘기하면 즉시 반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송현이 거꾸로 자신에게 의견을 묻자 당황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으음, 어떻게 한다…….”

“솔직한 의견을 말하면 되오.”

그 말에 왕이삼은 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뭐, 같이 요새를 탈출했으면 된 거 아닌가?”

일단 말을 꺼내자 수문이 터진 것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악당 놈들도 몽땅 처치했고 벽력탄 창고도 폭발했고 소림사행 길도 뚫었잖아. 주 소저 술법이 단단히 한 몫 했으니 그 공으로 퉁치자고. 후배는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란 말야.”

무심히 있던 서백은 왕이삼의 말에 피식 미소를 흘렸다.

‘이번만큼은 왕 선배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복잡한 고민은 생략하고 단순하게 결정하는 것.

참으로 왕이삼다운 생각.

그런데 서백 역시 복잡한 것보다 일직선으로 해결하는 쪽이 직성에 맞았다.

‘그러고 보니 왕 선배를 만난 지도 꽤 됐군.’

사천에서 중원 땅을 빙 돌며 긴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

둘이 성품이 비슷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동행이 될 수 없었으리라.

서백은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주 소저의 공이 크니 과는 덮어 두겠습니다.”

“고맙군요.”

주은리는 도도하게 말했으나 그녀의 시선은 진심으로 고맙다고 서백에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감회가 남달랐다.

오가연맹 요새에 잠입할 기회를 노리고 외딴 곳의 객잔까지 인수했던 주은리. 고호문의 신물을 회수하고 할아버지의 복수까지 끝냈으니 기분이 평소와 같다면 거짓말이리라.

주은리가 왕일과 왕이가 탄 말로 다가가더니 그들을 포박하고 있는 밧줄을 자르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제 자유의 몸입니다.”

“……!”

말은 못하지만 왕일과 왕이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옛 고호문의 장원에 폐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우물 바닥에 괴어 있는 벽돌을 빼면 은원보가 있으니 그 돈으로 낙향해서 새 출발 하십시오.”

주은리는 더 말이 필요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잠시 멍하니 그녀의 등을 쳐다보던 왕일과 왕이는 주은리의 결심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잠시 후 왕일과 왕이는 각자 말을 타고 떠났다.

둘은 말 한 마리를 타고 왔지만, 죽은 남궁진의 말을 둘에게 주니 사람과 말의 숫자가 딱 맞았다.

멀리 떠나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왕이삼이 한 마디 했다.

“두 사람이 흑도 살수였다니. 어쩐지 무공이 남다른 것 같았단 말야.”

객잔에서는 숙수와 점소이가 건방지다고 무시하던 왕이삼은 주은리의 얘기를 듣자 어느새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

그러다가 왕이삼은 어떤 생각이 들었다.

“잠깐. 두 사람이 따로 떠나면 주 소저는…….”

“저는 소림사로 함께 가겠습니다.”

“……!”

갑작스러운 주은리의 발언에 왕이삼은 물론 서백과 송현마저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왕이삼이 서백과 주은리를 번갈아보다가 물었다.

“아니, 왜? 설마 우리 후배 때문에…….”

“헛소리는 집어치우세요.”

주은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백과 주은리가 남녀 간의 사정이 생긴 거라고 착각한 왕이삼은 본전도 못 찾고 입을 다물었다.

“고호문이 멸문한 뒤 중원을 떠돌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주은리가 일행에게 심정을 얘기했다.

“고호문은 술법 말고 가전무공도 대단합니다. 단지 몇 대 이전부터 술법 위주로 수련한 게 독이 되었지요. 소림사로 가서 무림맹에 합류한 뒤 고호문을 진정한 명문정파로 다시 세울 생각입니다.”

“그, 그럼 주 소저가 개파조사가 되는 건가?”

“고호문이 다시 문을 여는 건데 무슨 놈의 개파조사입니까?”

“…….”

짜증이 난 주은리가 확 쏘아붙이자 왕이삼은 식겁해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 중얼거리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거참 쌀쌀맞네.”

소림사행의 결심을 밝힌 주은리.

이로써 소림사행은 모두 넷이 되었다. 서백, 왕이삼, 송현, 주은리. 잠시 이탈해 있지만 추후 유소운이 복귀하면 일행은 다섯이 되리라.

일행은 말을 타고 떠날 준비를 했다.

“휴우, 이제야 길을 가는군. 그나저나 진땀 나는 잠행이었다.”

“그래도 소득이 있었습니다.”

서백이 말하자 왕이삼이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흥, 은자도 못 벌고 고생만 죽어라 했는데 무슨 놈의 소득이 있었다는 거냐?”

“말 네 필을 얻었으니 소림사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

뜻밖의 말에 정곡을 찔린 왕이삼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잠시 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인정한다.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구만, 와하하하!”

일행은 말을 타고 소림사를 향해 여정을 재개했다.

* * *

사천당문의 문주 당정명은 각각 청홍만리(靑紅萬里)라는 이름의 네 딸이 있었다.

노쇠한 문주 대신 사천당문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는 첫째 당청(唐靑)과 둘째 당홍(唐紅)이었다.

셋째 당만(唐萬)은 오래 전에 난산으로 죽었고, 넷째 당리(唐里)는 무공을 익히지 않아서 무림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첫째 당청이 무림맹의 일을 하다 죽었는데, 얼마 전에 촉도관에서 둘째 당홍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게다가 당홍이 죽을 때 당만이 난산으로 낳은 아들인 당조정도 함께 죽는 바람에 사천당문은 문주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권력 암투가 벌어질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였다.

반면 권력 암투에서 멀리 떨어진 자가 있었다.

넷째 딸 당리의 아들 당룡이었다.

당룡은 어려서부터 스무 살이 넘은 지금까지 세가의 찬밥 신세였다. 당문 사람들은 모두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머니가 무공에 뜻이 없으니 그 자식 또한 별 볼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당홍의 시신이 확인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문주 당정명이 비밀리에 당룡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문주가 내린 명령은 간단했다.

“당홍과 당조정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조사하고 그자를 죽여라.”

당룡에게 그 명령은 아주 손쉬웠다.

오히려 다음 명령이 복잡하고 귀찮았다.

“그자의 목을 자르고 이마에 당문의 인장을 찍은 뒤 소림사의 지객당 처마에 올려놓아라.”

소림사는 설명이 필요 없는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

지객당(知客堂)은 소림사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접대하는 곳이다.

즉 문주는 사천당문이 당홍과 당조정의 복수를 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이려는 의도였다.

명령을 듣고 당룡은 생각했다.

‘소림사가 한바탕 뒤집어지겠군.’

정체 모를 자의 목이 지객당 처마 위에서 발견되면 소림사의 고승들마저 눈썹을 일그러뜨릴 것이다.

물론 소림사가 불쾌해하든 말든 문주도 당룡도 상관하지 않았다.

천하의 사천당문이 언제 남의 시선을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

“이걸 죽은 놈의 이마에 찍어라.”

문주는 철로 주조된 사천당문 문주의 인장을 당룡에게 건넸다.

홍접인(紅蝶印), 붉은 나비 문양의 인장.

인장을 불에 달궈서 낙인을 찍으라는 뜻.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문주의 인장을 받았으니 당룡의 손에 사천당문의 명예가 걸린 셈이었다.

그러나 방을 나서는 당룡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병신 같은 연놈들 때문에 쓸데없는 고생을 하는군.’

자식이 없는 당홍은 조카 당조정을 친아들처럼 키우고 우대했다. 당룡도 조카였지만 당청과 당홍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당룡의 어머니는 당청 당홍 자매에게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어려서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자신감이 부족해서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유형.

반대로 독기를 품고 실력을 연마하여 세상에 복수하려는 유형.

당룡은 후자였다.

문주의 명령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한밤중에 잘린 목을 올려놓으면 해가 떠야 발견될 터. 그 안에 도주하면 그만이다.

당청 당홍 자매가 죽었으니 문주는 후계자로 당룡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문주의 인장을 준 것이 그런 의미일지도.

그러나 당룡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

필요하다면 사천당문의 문주 자리는 자신의 손으로 쟁취하면 그만이니까.

사천당문을 떠난 당룡이 처음 간 곳은 아미산이었다.

당룡은 명문정파의 인물인 척하면서 아미파의 여제자 한 명을 유혹했다. 사천당문도 정파에 속했지만 신분을 밝히면 여제자는 혼비백산해서 달아날 것이 뻔했으니까.

여제자는 그런 줄 까맣게 모르고 당룡을 따라왔다. 당룡이 보기 드문 미남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

당룡은 사람 없는 관제묘에 들어가자 본색을 드러내고 여제자를 점혈했다.

그가 마혈(痲穴)을 점혈한 수법은 전신에 불개미가 기어다니며 물어뜯는 고통을 주기 때문에 고문에 최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제자는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못 되어서 아는 사실을 모두 말했다.

여제자의 얘기 중에서 특히 촉도관 성벽을 바람처럼 달리며 망자를 베어 버렸다는 신진고수 얘기가 당룡의 관심을 끌었다.

당룡은 당홍을 죽인 자가 무림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진고수일 거라고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연놈들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소문이 퍼지지 않은 건 그래서였겠지.’

그런데 여제자의 다음 말에 당룡의 눈썹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 소년은 약관도 안 되어 보였어요.”

“소년? 약관도 안 됐다고?”

“네.”

당룡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여제자는 당룡이 자신을 죽여서 살인멸구할까 봐 공포에 떨었다.

이윽고 당룡이 여자제의 점혈을 풀어 주며 말했다.

“가.”

“네?”

“가라고. 마음 바뀌기 전에.”

어리둥절하던 여제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려서 도망쳤다.

애초에 당룡은 여제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약한 자는 상대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귀찮으니까.

“당홍을 죽인 놈이 약관도 안 됐다고?”

사이는 안 좋았지만 이모 당홍의 무공은 당룡도 평소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당홍의 독문무공인 지상만뢰는 암기술로 유명한 사천당문에서도 독보적이어서 당룡도 이에 질세라 나름의 무공을 개발했을 정도였다.

그런 당홍이 약관도 안 된 소년의 검에 목이 떨어졌을 줄이야!

당룡의 입꼬리가 씨익 위로 말려 올라갔다.

동시에 사천당문을 떠난 이후 줄곧 심드렁하던 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네놈은 내 손으로 죽인다.”

당룡의 심장이 주인의 살기에 반응해서 쿵쿵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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