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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01화 (101/123)

101화 술책에는 술책으로(4)

서백이 목에 검을 겨누자 주은리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나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망자가 창궐한 중원 땅을 가로질러서 소림사로 간다는 소년.

약관도 안 된 나이지만 실력이 꽤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백의 무공 수위가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가연맹의 다섯 고수인 언자성과 모용화정을 불과 몇 초식 섞지 않고 하수 다루듯이 끝장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주은리가 타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서백의 무공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서백의 눈빛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주은리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술법은 변화무쌍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인단다. 그러니 웬만한 무림인들은 술법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야.

-맞아요, 할아버지. 고호문의 술법은 천하제일이에요.

-그건 아니다. 주의해야 할 자들이 있지.

-어떤 자들인가요?

-내가무공의 고수들이다.

-내가무공…….

-일갑자의 심후한 내공을 쌓은 자들 앞에서 술법은 쉽게 파훼될지 모른단다.

-소림사의 사자후처럼 말이죠?

어린 나이답지 않게 똑똑한 손녀를 보며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사자후 말고도 강호에는 알려지지 않은 내가무공이 수없이 존재하니 조심하거라.

-흥! 소림 방장쯤 되면 모를까, 할아버지 술법을 깰 자는 천하에 몇 명 안 될 거라고요.

-그것도 맞는 말이구나.

그때 할아버지는 손녀를 다그치지 않고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할아버지가 웃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말하던 내가무공의 고수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

서백의 눈빛은 명경지수처럼 맑고 고요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명심하거라. 내가무공의 고수는 눈빛이 맑고 그윽하다. 그런 자들을 만나면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

할아버지의 대화를 떠올리며 주은리는 서백에게 술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결국 자리를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주은리는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과거 절강성에 고호문이라고 지금은 멸문한 문파가 있었습니다.”

“주 소저가 고호문 출신입니까?”

“그래요.”

주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용화정한테 했던 얘기를 서백한테도 그대로 해 주었다.

서백이 얘기를 모두 들은 뒤 말했다.

“모용세가, 하북팽가, 진주언가 세 문파에게 복수할 생각이었군요.”

“맞아요. 하지만 복수 이전에 더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

주은리가 쓰러져 있는 모용화정에게 다가갔다.

서백의 검에 팔꿈치가 떨어진 모용화정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져 혼절해 있었다. 전신의 뼈가 박살난 언자성도 고통을 못 이기고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자가 찬 요대는 고호문의 신물이자 할아버지의 유품입니다. 한데 모용세가가 훔쳐간 뒤 고작 연검이나 차는 요대로 바꾸었으니 기가 찰 일이죠.”

주은리는 무릎을 꿇은 뒤 모용화정이 허리에 차고 있는 요대를 벗겼다.

“모용세가는 이 요대를 그냥 보물 정도로 알고 있었을 겁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건 것이나 마찬가지죠.”

계속해서 주은리의 얘기가 이어졌다.

“저는 오가연맹이 요새를 세운다는 정보를 얻은 뒤 기회를 노렸습니다.”

“마침 좋은 자리에 있는 객잔이 망자 창궐로 나온 것을 알고 구입했어요.”

“그런 다음 객잔을 운영하면서 요새에 잠입하여 신물을 되찾을 날만 기다려 왔습니다.”

“요새에 대해 제가 아는 정보는 모두 서찰에 써 놨습니다. 저는 할 일을 다 했으니 각자의 목적을 위해 흩어졌을 뿐입니다.”

그녀의 얘기는 앞뒤가 잘 맞아떨어져서 거짓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으리라.

그러나 한 가지. 서백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점을 지적했다.

“그럼 왕일과 왕이는 왜 버린 겁니까?”

“제가 그 둘을 구할 이유는 없습니다. 왕일과 왕이는 본래 절강성에서 악명 높은 흑도의 살수입니다.”

“…….”

“할아버지는 둘을 붙잡아서 천하 사람들에게 저지른 죄를 물으려 했습니다. 한데 둘이 노모와 어린 자식이 있다며 목숨만 살려 달라고 구걸했죠.”

“…….”

서백은 주은리는 물론 왕일과 왕이 모두 어떤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망자 창궐 지역의 외딴 벌판에서 객잔을 운영한다는 것은 필시 숨은 이유가 있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지금 주은리의 얘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으니…….

“왕일과 왕이는 다시는 흑도에 발 들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며 스스로 자신들의 혀를 잘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평생 고호문의 하인이 될 것을 명했습니다.”

“물론 매년 둘이 고향의 가족에게 보낼 은자를 주는 것은 잊지 않았죠.”

“고호문이 멸문하는 날 왕일과 왕이는 어린 저를 데리고 탈출하면서 할아버지에게 맹세했습니다. 자신들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를 구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위험을 무릅쓰고 둘을 구하자고요? 아니, 제가 위험에 처하는 걸 왕일과 왕이가 먼저 반대할걸요.”

“저는 잠행조에서 할 일을 다 했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주은리는 고개를 삐딱하니 치켜들며 팔짱을 꼈다. 평소의 도도한 주은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소매에서 초랑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영물은 서백과 주은리의 굳은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을 번갈아 봤다.

서백은 계속 주은리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목을 단숨에 벨 생각은 아니었다. 주은리는 과보다 공이 크니까.

주은리의 얘기를 듣고 보니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일행을 배신했냐는 점이었다.

‘지금은 잠행 중이다.’

비록 네 명에 불과하나 일행은 함께 일을 도모하기로 약속한 잠행조.

문득 스승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스승은 서백에게 표사들의 잠행에 대해서 가르쳤던 것이다.

당시 서백은 의문을 표했다.

-왜 표사들의 작전 수행까지 알아야 합니까?

-훗날 망자 창궐 지역을 돌파하거나 잠입할 일이 분명 생길 것이다.

스승의 선견지명은 확실히 대단했다. 그때 배운 잠행 수법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스승에게 배운 것은 전문 표사에 비하면 기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송현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비해 송현의 지적은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으며 날카로웠다.

말로 이론을 배우는 것과 직접 실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즉 소림사행의 수장은 서백이지만, 이번 잠행의 수장은 송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그렇다면 주은리가 잠행조에서 제멋대로 빠진 것도 송현에게 처벌을 묻는 것이 좋으리라.

‘송 선배에게 조언을 듣고 정하자.’

“다시 일행을 등진다면 그때는 주저 없이 목을 베겠습니다.”

“…….”

슥. 서백이 주은리의 목에 겨눈 검을 내렸다.

초랑이 그걸 보더니 캥 하고 울부짖은 뒤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주은리는 서백의 행동이 뜻밖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는 선언.

약관이 안 된 소년은 일갑자를 산 노인처럼 노련하고 냉정했다.

주은리가 놀란 것은 서백이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보통의 무림인은 일단 검을 뽑으면 체면치레를 위해서 피를 본다.

또한 당장 죽일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화근이 될 거라 생각하는 것이 무림인이다.

서백이 마음만 먹는다면 주은리를 처치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울 터.

문득 주은리는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검을 뽑는 자보다 거두는 것이 더욱 용기 있는 자라는 것을 명심해라.

‘용기 있는 자…….’

검을 거둔 서백은 창가로 가서 밖을 살피느라 등을 돌리고 있었다.

약관도 안 된 서백의 등이 지금껏 보아 온 어떤 무림의 고수보다 커 보이는 것은 착각 때문일까?

과거 할아버지가 손녀를 안전한 곳에 두고 적을 상대하던 걸 보는 것 같았다.

그때 할아버지의 등이 저랬었다.

“할아버지…….”

주은리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서백이 고개를 돌리자 흠칫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언제 무사들이 올지 모르니 자리를 피합시다.”

서백이 혼절한 채 쓰러져 있는 언자성과 모용화정에게 다가갔다.

그때 주은리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백을 막았다.

“잠깐 기다리세요.”

“죽이지 말자는 건가요? 망자 창궐을 이용한 것은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서백은 언자성과 모용화정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죄도 죄지만 살려 두었다간 화근이 될 게 틀림없으니까.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주은리가 서백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서백도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럼 서두르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알았어요.”

그때 무사들이 이 층으로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

발소리를 듣건대 하나둘이 아니라 십여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서백은 충분히 그들을 당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좁은 방에서 십여 명을 단숨에 베어 버리는 것은 무리였다.

만약 후미에 있는 무사가 뿔피리라도 부는 날에는 잠입자의 존재가 탄로 나는 것은 물론 위치까지 들킬 수 있는 상황.

-잠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은신입니다.

-틀렸다. 상대가 잠입자의 존재를 아예 모르도록 하는 것이 최상이다.

스승이 잠행 수법을 가르칠 때 마지막으로 강조하던 말.

-손자가 말한 병법에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라는 말이 있다. 잠행도 마찬가지. 적이 존재 자체를 모르면 굳이 은신할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

상대가 잠입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중에 작전을 수행하고 탈출하는 것.

그것이 스승이 말한 잠행의 극의.

‘계속 잠행을 유지하면서 주 소저의 제안을 성공시키려면?’

서백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이 층에 올라온 무사들이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큰일 났습니다!”

서백과 주은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주은리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포기하고 도망치죠.”

“…….”

아무 대답이 없자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문을 부수고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우당탕탕.

“죄송합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순간 무사들은 무언가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창문이 바람 때문에 열렸다 닫혔다 하고 있었는데, 두 남녀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리는 것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서백과 주은리가 어두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며 이동하고 있었다.

근처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길이 솟아 있었다.

당연히 물동이를 들고 뛰어다니는 무사들이 주위에 가득했다. 하지만 서백과 주은리가 바로 옆의 그림자 속에 은신해 있다는 걸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진주언가의 무사가 서백과 주은리의 뒤로 소리 없이 접근했다.

순간 서백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제대로 찾아왔군.”

무사는 진주언가의 복장을 걸치고 있는 송현이었던 것이다.

서백은 송현이 불타는 건물 근처에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인적이 드문 곳은 망루 때문에 오히려 발각될 위험이 크다. 반면 무사들이 불을 끄느라 뛰어다니는 곳은 망루 꼭대기에서 보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 힘들 터.

즉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대로 송현은 화재 현장 근처에 은신해 있었고, 그를 찾아온 서백과 주은리를 발견해서 만난 것이었다.

서백과 송현 둘이 서로의 생각을 읽고 있기에 가능한 일.

서백은 송현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했다.

창고에 벽력탄 제조 시설이 있다는 것과 오가연맹 고수들과의 싸움에 대해서였다.

“처음 작전은 요새 후문을 빠져나가 소림사로 가는 것이었죠. 그런데 작전을 변경해야겠습니다.”

“왜?”

“오가연맹이 벽력탄을 제조하면서까지 무림맹에 반하는 걸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럼 다음 작전은?”

서백이 송현의 물음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가연맹 다섯 고수의 목을 모두 베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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