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술책에는 술책으로(4)
모용화정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냥 부채가 아니라 강철로 만든 살을 넣은 부채로군.”
“눈알 하나는 제대로 박혀 있군요.”
차락. 주은리가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허리춤에 숨겨놓은 연검으로 급습하는 게 장기라고 들었습니다. 비열한 모용세가 아니랄까 봐 독수(毒手)를 쓰시는군요.”
“강철살 부채는 무거워서 여름에 시원한 바람도 못 일으킬 터.”
“독수는 성공 못하면 정수보다 못한 법입니다.”
“네년이 할 말은 아닐 텐데.”
두 여인의 말투는 정중하나 그 내용은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주은리는 다시 양팔을 활짝 펼치며 독특한 기수식을 취했다. 언제든 상대해 줄 테니 들어오라는 뜻.
그런데 두 번째 공방이 재개되려는 찰나, 주은리의 소매 속에서 초랑이 ‘캥’ 하고 짧게 울부짖었다.
“초랑?”
순간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인영 하나가 날아들어 와서 주은리에게 쇄도했다.
“……!”
주은리는 보법을 밟으며 인영을 피했다.
그러나 인영은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주은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인영의 정체는 오가연맹의 다섯 고수 중 하나이자 진주언가의 대표인 언자성이었다.
다른 네 고수와 달리 병장기를 쓰지 않는 언자성.
그는 권법은 물론 금나수의 달인이기도 했다.
주은리는 몸을 회전하며 언자성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언자성이 두 배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그녀의 남은 손목을 붙잡았다.
탁. 언자성이 주은리의 등 뒤에서 두 손목을 잡아당겼다.
순간 그녀의 소매에서 초랑이 뛰쳐나오더니 몸을 날려서 언자성의 얼굴을 깨물려고 했다.
그러자 언자성은 한쪽 손으로 주은리의 두 손목을 움켜쥔 뒤 나머지 손으로 초랑을 쳐 버렸다.
캥. 초랑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초랑!”
“주인을 닮아서 사나운 짐승이군.”
주은리는 언자성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언자성이 그녀의 두 팔을 등에 닿도록 꺾자 꼼짝할 수 없었다.
으드드득.
“어깨가 탈골될 테니 가만히 있으시오.”
언자성이 주은리를 제압하고 있을 뿐 권격을 날리지 않자 모용화정이 어리둥절해서 외쳤다.
“당장 그년을 요절내지 않고 뭐하는 겁니까?”
“죽이면 안 되오.”
“뭐요? 왜?”
“음… 데려가서 심문을 할 것이오. 그렇지, 요새에 잠입한 목적을 밝혀야 되오.”
“심문은 주먹 한 방 때린 다음 해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포로가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요?”
“…….”
모용화정은 언자성의 표정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주은리의 두 손목을 틀어쥔 언자성이 그녀의 등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실은 언자성이 모용화정의 처소에 온 것은 음심(淫心)을 참기 힘들어서였다.
요새에 불이 났으니 수장인 남궁진은 화재를 진압하는 데 정신이 없으리라. 그러니 모용화정이 혼자 있을 때 그녀를 품으려고 한 것이었다. 만약 모용화정이 거부한다면 겁간이라도 할 생각으로…….
그런데 모용화정이 웬 미모의 여인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이 요새에 잠입했다는 것을 깨달은 언자성은 몸을 날려서 금나수로 제압했다.
그러자 언자성은 음심이 불끈거렸다. 비록 싸움이긴 했지만 여인의 손목을 잡은 것은 평생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언자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주은리의 몸매를 감상했다. 그는 음심을 풀 목표를 모용화정에서 주은리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모용화정이 그런 사내의 눈빛을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지금 제 정신입니까? 포로를 잡으려는 게 아니라 음심을 풀려는 것을 누가 모를 것 같습니까?”
“…….”
‘들켰나?’
모용화정이 눈치 채자 언자성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남궁진만 싸고도는 년이 아닌가.
“요새에 잠입한 이유를 밝히려면 일단 생포하고 심문해야 될 일이오. 한데 무작정 죽이라니, 여인의 질투인가?”
“……!”
모용화정은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렸다. 여인의 질투가 지금 여기서 왜 나와?
“좋습니다. 대신 팔 한쪽은 잘라야겠습니다. 그래야 도망치지 못하죠.”
“…….”
이번에는 언자성이 침묵했다.
그는 재빨리 잔머리를 굴려서 마음을 정했다.
모용화정이 죽어라 날뛰니 일단 포로의 팔 하나는 자르도록 놔두자. 큰 중상이지만 지혈하면 목숨은 건질 터. 그런 뒤에 음심을 채우면 그만이니까.
“그러시오. 대신 팔 하나만 잘라야 하오.”
“포로를 끔찍이도 위하시는군요. 진주언가가 소문난 명문정파인 게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모용화정은 언자성의 비열한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말에 가시를 심었다.
그런 모용화정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자성은 주은리가 중상을 입어서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모용화정은 기가 차서 단숨에 연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주은리가 모든 걸 포기하고 두 눈을 감는 순간, 창문 밖에서 거대한 검이 모용화정을 향해 날아왔다.
촤아악. 퍽.
검은 모용화정의 팔을 베어 버린 뒤 벽에 박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하던 모용화정은 연검을 쥔 자신의 팔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본 뒤에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이어서 창문을 통해 서백이 날아왔다.
음심이 가득하던 언자성은 그래도 고수답게 정신을 차렸다. 대검을 날려서 모용화정의 팔을 벤 수법은 절대 쉽게 볼 것이 아니었다.
‘고수다.’
언자성은 쇄도하는 서백을 향해 주은리를 방패 삼아 밀쳤다.
주은리가 꼼짝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자 서백이 달려들어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자기보다 키가 큰 주은리를 안자 서백의 시야가 가려졌다. 바로 언자성이 노리던 것. 언자성은 주은리의 등을 향해 권격을 출수했다.
“두 연놈을 동시에 꿰뚫어 주마!”
쉬이이이이익.
일 초식에 열여덟 번 권격을 날리는 것으로 강호에 이름을 떨친 언자성의 언가권(彦家拳).
서백은 품에 안긴 주은리를 뒤로 돌리며 앞으로 나선 다음 언자성의 권격을 향해 팔을 뻗었다.
“내 권(拳, 주먹)을 권으로 막겠다고? 어림없는 수작!”
순간 서백이 주먹을 펴고 손날을 세웠다. 그러자 서백의 손바닥이 언자성의 주먹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서 서백의 손바닥이 언자성의 팔꿈치에 밀착했다.
팔이 더 짧은 서백이 먼저 언자성의 신체와 접촉한 까닭은, 서백은 몸을 회전해서 팔을 뻗은 반면 언자성은 정자세로 주먹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서백의 팔이 언자성의 팔뚝을 뱀처럼 휘감았다. 그리고 손바닥이 팔꿈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팔꿈치를 역으로 꺾어 버리는 금나수(擒拿手)의 수법.
그러나 언자성은 코웃음을 쳤다.
“감히 이 몸한테 금나수를 쓰겠다고? 잘 걸렸다!”
언자성은 언가권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실은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은 바로 금나수였다.
손과 발을 얽히게 만들어서 상대를 제압하고 근골을 꺾거나 부러뜨리는 무공, 금나수.
금나수가 도검에 베이는 것만큼 치명적일 리는 없다. 하지만 근골이 부러지면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흐를 뿐더러 운 나쁘게 뼈가 잘못 붙으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
때문에 무림에서는 ‘금나수에 당할 바에 칼에 베이는 편이 낫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언자성은 잔인한 성품답게 권격으로 상대를 즉사시키는 것보다 금나수를 써서 불구로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눈앞의 상대는 약관이 안 된 소년.
그러나 언자성은 상관하지 않고 팔을 분질러 버릴 기세로 금나수를 펼쳤다.
휘리릭.
언자성은 손목을 반대로 뒤집으며 보법을 밟아서 서백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서백의 손목을 잡고 역으로 꺾기 시작했다.
이제 반대로 꺾인 팔은 가장 먼저 팔꿈치가 부러지고 그다음으로 어깨가 박살날 터.
언자성이 호기롭게 외쳤다.
“똑똑히 봐라. 이게 진짜 금나수다!”
“…….”
만약 서로 무공을 겨루는 비무였다면 서백은 언자성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언자성의 금나수 수법은 확실히 생각 이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목숨을 건 싸움.
서백은 더 이상 잔재주를 펼칠 생각은 접고 진짜 무공을 출수했다.
석가심결 시전.
십성으로.
스스스스.
순간 언자성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분명 서백의 팔꿈치를 역으로 꺾고 있는데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강철봉을 쥐고 억지로 힘을 주는 듯한 기분.
“……?”
금나수 수법으로 팔을 꺾을 수 없다면 이유는 하나다. 상대의 내가무공이 엄청난 수위라는 것.
최소 일갑자의 수련을 쌓아야 가능한 수준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은 아직 약관도 안 되어 보이는데 일갑자의 공력을 쌓았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독기가 치솟은 언자성은 다리를 뻗어 서백의 발목을 휘감았다.
이제 힘을 주면 팔과 다리에 동시에 꺾일 터.
그래도 버틴다면 척추까지 박살 나리라.
“이래도 버티는지 보자…….”
호기롭게 외치던 언자성은 문득 싸늘한 추위를 느끼고 말을 삼켰다.
서백의 팔을 통해서 얼음장 같은 한기가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이건 설마… 서장의 빙공?”
“악독한 수법만 골라서 쓰시는 것 같으니 저 또한 특별 대접을 해 드려야죠.”
서백의 목소리도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언자성은 화들짝 놀라서 서백을 얽어맨 팔과 다리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자석처럼 서백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디찬 얼음에 피부가 닿았을 때 급하게 떼려고 하면 살점이 붙어서 딸려 간다. 지금 언자성이 딱 그랬다.
어느새 팔을 타고 흐른 한기가 언자성의 몸뿐 아니라 입까지 얼려 버렸다.
“이거… 금지되… 수버비다… 네노옴…….”
“아니, 당신 같은 자의 최후에 딱 어울리는 수법입니다.”
언자성의 몸이 완전히 굳어서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서백이 팔과 다리를 언자성이 얽히게 만든 것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우지지지직… 빠가각!
언자성의 팔꿈치가 부러지고 어깨가 박살났다. 이어서 무릎이 역으로 꺾이며 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복합 골절의 중상을 입은 언자성은 빙공에 당해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통나무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한 주은리는 멍하니 서백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서백의 눈빛이 여느 때와 달리 얼음장처럼 냉정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
그런데 다음 순간 서백이 가슴으로 고개를 내리더니 예의 순수한 소년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의 가슴에서 초랑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던 것이다.
“초랑…….”
“악인을 용서하지 않는 걸 보니 주인을 닮았군요.”
서백이 빙그레 웃으며 쓰다듬어 주자 초랑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주은리의 소매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주은리는 그제야 자신이 소년의 품에 계속해서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뗀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죠?”
“창고에서 가장 가까운 처소부터 하나씩 찾았습니다. 운 좋게 늦지 않았군요.”
“구해 준 건 감사해요.”
“별말씀을.”
주은리는 무사들에게 들키지 않게 창문을 닫으며 밖을 살폈다.
“불길을 잡으면 대대적으로 잠입자 수색이 시작될 거예요. 여기는 위험하니 자리를 옮기죠.”
그런데 서백이 아무 대꾸도 없이 벽으로 가더니 깊숙이 박힌 검을 뽑는 것이었다.
쑥. 팍.
그런 다음 서백이 몸을 돌려서 검을 겨누었다.
바로 주은리의 목을 향해.
척.
“먼저 해결할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죠?”
“일행을 따돌린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면 목을 베겠습니다.”
“……!”
주은리는 한 점의 동요도 없이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서 서백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곧이어 주은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저는 사문의 복수를 위해 당신들을 이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