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오가연맹(1)
주은리는 계속해서 무림인들의 대화를 전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듯이 무림인들의 말투와 호흡까지 흉내 내고 있었다.
술법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다는 뜻.
여러 무림인들의 대화를 주은리의 목소리로, 그것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전해 듣자 마치 호사가가 삼국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서백은 정신을 집중하고 그녀가 전하는 대화를 들었다.
“정말 쥐새끼 한 마리 없는데.”
“한 놈은 점소이, 한 놈은 숙수. 그렇다면 주인이 있을 텐데 안 보인단 말이지?”
“쥐구멍에 숨었다는 뜻이군요.”
“독수리가 하늘에 떴으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지 별수 있겠냐, 크크크!”
“놈들은 아직 멀리 못 갔을 것이오.”
다섯 명의 무림인들이 차례로 말했는데, 그중에서 마지막 목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술과 음식이 아직 식지 않았군. 방금까지 여기 있었다는 소리다.”
그자가 서백 일행이 술을 마시던 탁자를 봤는지 말했다.
“다들 객잔 주위를 샅샅이 뒤져라!”
“존명!”
다섯 명의 수좌들을 제외해도 무림인 잔당은 백 명이 넘으리라.
서백은 백여 명의 부하들이 재빠르게 객잔 주위를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서백 일행은 땅이 깎인 곳에 등을 대고 숨을 죽인 채 무림인들의 수색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일행이 숨은 곳은 객잔에서 상당 거리 떨어져 있었다. 백여 명의 인원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위가 허허벌판인 곳을 샅샅이 수색하기에는 역부족.
게다가 송현이 찾은 장소가 객잔 쪽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위치이니, 사냥개를 풀지 않는 이상 일행이 발견될 염려는 없었다.
오히려 겁을 먹고 지금 장소에서 뛰쳐나가 벌판을 달린다면 쉽게 발각되리라.
해가 졌다고 해도 어둠을 뚫고 사물을 분간해 낼 만큼의 능력을 지닌 고수들이 다섯이나 있으니까.
그때 주은리가 다시 입을 열어서 말했다.
“체구가 곰처럼 큰 남자는 등에 두 개의 창을 메고 있군요.”
이번에는 무림인들의 대화를 전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시선으로 본 것을 말했다.
그런데 송현이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는 것이었다.
“산동악가의 악관비군. 팔 척 가까운 키에 쌍창(雙槍)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지.”
그 말에 서백의 얼굴 또한 진지해졌다.
병장기와 체구를 전해들은 것만으로 멀리 떨어진 객잔에 있는 무림인의 신분을 알아낸 송현.
무엇보다 송현의 말투에서 어림짐작이나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서백은 송현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송현은 계속해서 주은리가 전하는 인물들의 인상착의와 병장기를 듣고 신분을 알아맞혔다.
“여인이 임신한 것처럼 배가 불룩하게 살찐 남자는 허리춤에 커다란 언월도를 차고 있습니다.”
“하북팽가의 팽자걸이군. 몸은 비대하나 그의 오호단문도는 번개처럼 빠른 쾌도로 유명하지.”
“허리까지 내려오게 긴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황포 속으로 뼈가 드러날 만큼 비쩍 말랐는데 병장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주언가의 언자성. 그가 처음 무림에 출행했을 때 일 초에 열여덟 번 주먹질을 하는 언가권으로 단숨에 이름을 떨쳤지.”
송현은 단숨에 무림인 세 명의 신분을 알아냈다.
주은리가 말하는 족족 잠시의 쉼도 없이 말을 하는 걸 듣고 있으니, 마치 무림인의 정보가 적힌 서책을 보고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왕이삼이 술이 깼는지 서백에게 물었다.
“끄응, 저 둘이 대체 뭐하는 거냐? 하북팽가는 뭐고 진주언가는 또 뭐냐?”
“조용히 들으십시오.”
“…….”
서백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주은리와 송현의 대화에 집중했다.
평소라면 삐질 왕이삼도 서백의 얼굴이 워낙 진지하자 군소리 없이 입을 다물었다.
“여인이 한 명 있는데 눈을 제외하고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푸른 복면으로 감쌌군요.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습니다.”
“모용세가의 모용화정. 허리춤의 검은 남을 속이기 위한 것이고 진짜 그녀의 검병은 허리띠처럼 차고 있는 연검이니 조심해야 할 터.”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귀청을 찌를 만큼 날카로운 남자는 뭇 여인들을 수없이 울릴 만큼 얼굴이 곱상한데 오른쪽 눈가에 길게 흉측한 검상이 나 있는 것이 흠이군요.”
“남궁세가의 남궁진. 절세미녀이자 사촌동생인 남궁유와 함께 한때 남궁봉화(南宮鳳花)로 불릴 만큼 미남자였으나, 남궁유는 죽었고 남궁진은 무당파의 대취객에게 얼굴에 일검을 맞는 바람에 남궁봉화는 옛말이 되고 말았지.”
송현은 무림인 다섯 명의 신상정보를 모두 얘기했다.
다섯 명의 무림인은 모두 유명세가의 인물들로, 그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자는 중원의 무림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송현은 인상착의와 특징, 그리고 병장기만 전해 듣고서 다섯 명을 빠짐없이 맞춘 것이다.
단순히 무림 정보가 해박한 것을 넘어서 추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절대 불가능한 능력.
송현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익히 짐작하고 있던 서백도 새삼 그를 달리 볼 수밖에 없었다.
‘송 선배가 청위표국 출신이라고 했었지?’
서백은 선착장 거리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중원 각지를 오가며 사람과 물품을 전달하는 표국.
과거 소림사가 도움을 청했다는 표국 출신이었으니 무림에 대한 정보가 해박한 것은 당연하리라.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송현의 능력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대단한 수확이다.’
비록 당장은 도망쳐서 몸을 숨기고 있지만 서백은 상황을 뒤집어엎을 계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주은리의 기상천외한 술법과 송현의 해박한 정보력이 합쳐진 결과!
만약 둘이 전쟁터의 책사라면 어떤 싸움에서도 적을 상대로 우위에 설 터.
그만큼 두 남녀의 능력은 궁합이 절묘하게 맞았다.
서백은 송현이 알아낸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산동악가 악관비, 하북팽가 팽자걸, 진주언가 언자성, 모용세가 모용화정, 남궁세가 남궁진.’
순간 무언가를 알아차린 서백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건 꼭 오대세가 같은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중원 무림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명문정파다.
그중 오대세가는 사천당문, 제갈세가, 남궁세가, 하북팽가, 산동악가를 일컫는다.
그런데 송현이 말한 정보에서는 사천당문과 제갈세가가 빠지고 대신 진주언가와 모용세가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천당문은 오대세가 중 어떤 가문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위세가 높지만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 지역에 위치해 다른 세가와 손잡는 일이 드물었다.
타인을 하수 보듯이 하는 사천당문 특유의 분위기도 다른 문파들이 거리를 두는 데 한몫을 했다.
또한 제갈세가는 일공자 제갈성이 무림맹의 중요 인물 중 하나이니, 용정객잔에 온 세가들과 손을 잡을 리 없으리라.
용정객잔에 들이닥친 자들은 무림맹을 배신할 술책을 꾸미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참에 사천당문과 제갈세가를 빼고 진주언가와 모용세가가 있으니, 서백은 마치 오대세가가 모인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남궁세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군.’
서백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은리가 전하는 대화를 듣자 전후사정을 알 수 있었다.
“공자님, 객잔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멀리 못 갔을 텐데 어딘가 깊은 굴속에라도 틀어박혀나 보군.”
남궁세가 남궁진과 부하의 대화였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소림사로 가려면 어차피 요새를 지나가야 될 테니까.”
‘요새?’
그 말을 듣고 서백은 송현을 돌아봤다.
“이 근방에 요새가 있습니까?”
“내가 알기론 없다. 단지 여기서 소림사로 가려면 협곡 하나를 지나가야 되지. 폭이 좁고 통과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리는 회랑 같은 곳인데, 수 년 사이에 요새가 지어졌다면 그곳이 안성맞춤이겠군.”
송현답지 않게 불분명한 대답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몇 년 전에 운남으로 낙향한 뒤 이제 막 중원에 복귀한 참이 아닌가?
망자 창궐의 여파로 그 사이에 요새가 지어졌다면 송현이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러자 주은리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지 대답했다.
“용정객잔에서 말을 타고 사흘, 걸어서 일주일 거리에 요새가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좁은 협곡을 막듯이 지어진 요새지요.”
“그렇군요.”
서백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재차 주은리의 술법에 감탄했다.
주은리는 술법을 써서 다른 곳에 시야를 두고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서백과 송현의 대화 또한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술법에 동화되어서 무아지경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의식을 감지하고 있다는 뜻.
‘그렇다면 주 소저는 술법을 운용하면서도 무공을 출수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서백은 그게 궁금했지만 당장은 다른 일이 급하니 나중에 알아보는 것으로 보류했다.
주은리가 계속 술법을 운용하며 무림인들의 대화를 전달했다.
“쥐새끼들이 소림사로 가려면 요새를 통과해야 되니 우리는 발 뻗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오, 모용소저. 크하하하!”
“요새도 요새지만 인질도 두 놈 붙잡았지. 놈들이 무림인이라면 동료를 구하러 올 것이다.”
“하! 그건 고리타분한 생각이오. 강호의 정리가 땅에 떨어진 지 언제인데 누가 남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단 말인가?”
“무림인이 모두 네놈처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뭐라고!”
무림인 둘이 말다툼을 시작했다.
자존심 강한 유명세가의 인물들이 각자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잠시 손을 잡았으니, 시도 때도 없이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그만들 두시오. 우리 오가연맹이 깃발을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싸움질이오?”
위엄서린 말투로 보아 남궁진 같았다.
“싸우기는요. 잠시 두 분의 생각이 엇갈렸을 뿐이니 남궁공자께서 참으시지요, 호호호.”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뭇 사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은 모용화정이리라.
어쨌든 남궁진의 말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오가연맹(五家聯盟).
다섯 개의 세가가 연맹을 이루었다는 명칭.
서백의 짐작이 들어맞았다.
남궁세가는 사천당문과 제갈세가를 따돌리고 모용세가와 진주언가를 포함시켜서 자기들끼리 새 오대세가 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무림맹에 대항해서 부정한 이득을 취하는 것.’
증거는?
‘소림사행 인물을 붙잡아서 무림맹 일을 방해하기 위해 흑도에게까지 정보를 흘리고 포상금을 건 것이 그 증거다.’
흑도 무리가 대거 타는 바람에 서백 일행이 중간에서 방주에서 내려야 됐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저들 탓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술책을 꾸민 장본인, 남궁세가 남궁진!
도중에 방주에서 내렸기 때문에 소림사행은 더욱 지체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끝내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 있었다.
망자 창궐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을 응징하는 것.
주은리가 남궁진이 명령하는 것을 전달했다.
“일단 모두 요새로 돌아간다. 쥐새끼들은 소림사로 가야 할 테니 제 발로 요새로 올 것이다.”
“존명!”
오가연맹 무리가 객잔에서 떠나는 발소리가 서백의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주은리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백은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은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객잔을 태워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