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용정객잔(2)
예의 바른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식겁한 말.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공손한 목소리와 달리 본심을 드러냈다.
“왕일, 왕이. 절대 손님들을 놓치지 마세요.”
척. 여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점소이와 숙수가 서백 일행을 앞뒤로 포위했다.
일행이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당장에 달려들어서 채찍과 식칼을 휘두를 태세.
서백이 삼 층 위, 모습이 보이지 않는 여인을 향해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객잔 주인이십니까?”
“그런데요?”
“당신이 내려와도 삼 대 삼. 현재 일 층은 삼 대 이. 쪽수는 우리가 더 많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군요. 꼬마라서 철이 없으시니 강호 무서운 걸 가르쳐 드려야겠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럽게 들렸다.
하지만 여인이 호의를 품은 게 아니라는 것은 누가 들어도 뻔했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인 서백과 말을 섞자 마치 철없는 아이를 어르듯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바뀐 것일 뿐.
“휘두르지도 못할 대검을 메고 다니는 꼬마랑 허리도 못 펴고 다니는 중늙은이는 없는 셈 쳐야지요. 그럼 이 대 일인 셈이고 제가 내려가면 삼 대 일이잖아요?”
“과연 그럴까요?”
서백은 여유를 잃지 않고 여인을 상대했다.
반면 왕이삼은 조바심이 나는 동시에 기가 막혔다.
여인은 서백을 꼬마랍시며 우습게 보고 있었다. 서백이 대검을 사정없이 휘두르는 걸 보면 절대 못할 소리.
하지만 서백이 무시당하는 것과는 별개로 왕이삼은 여인이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자 분통이 터졌다.
‘아니, 내가 어딜 봐서 중늙은이야?’
마흔을 훌쩍 넘었지만 왕이삼은 자신의 나이를 아직 한창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무공이 약해 보인다고 업신여기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마음만은 이팔청춘인 자신을 중늙은이라고 칭하니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이삼이 화를 내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점소이와 숙수의 이름, 왕일(王一)과 왕이(王二).
그 둘은 왕이삼(王二三)의 이름과 흡사했다. 왕이삼의 이름에 삼(三)이 있으니, 모르는 자가 들으면 마치 셋 중에서 왕이삼을 막내로 착각할 법한 이름들이 아닌가?
‘저놈들 부모는 대체 누군데 저리 허접한 이름을 지어 준 거야?’
왕이삼은 화난 나머지 그 생각이 자기 부모까지 욕하는 거라는 사실은 미처 생각 못 했다.
“거기 키만 멀대 같이 크신 분. 편복선생을 아는 것 같은데 어떤 사이신지요? 숨기시는 게 있으면 산 채로 살을 다져서 젓갈로 만들 수도 있답니다.”
여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내용은 여느 흑도인도 혀를 찰 만큼 무시무시했다.
“생사를 두고 서로 힘을 합쳐 싸웠던 자요.”
“편복선생이 말입니까? 그 천하의 사기꾼이자 후레자식이 잘도 그러셨겠습니다.”
편복선생에 대한 원한이 깊은지 이번 송현의 말에 여인의 반응이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송현의 말에 여인은 물론 객잔의 모든 인물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흑랑성에서 살아남으려면 사기 따위는 칠 엄두도 못 내게 되지.”
“……!”
그 말에 서백과 왕이삼은 긴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봤다.
흑랑성(黑狼城).
중원에서 서북쪽 멀리 떨어진 감숙성에 있다는 비밀에 휩싸인 문파.
과거 중원무림이 서장 구륜사의 침범을 막아 냈을 때 흑랑성이 큰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무림인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그러나 흑랑성은 무림맹에게 멸문당했다.
망자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곳이 바로 흑랑성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무림맹의 의뢰를 받고 잠행대를 꾸려서 흑랑성에 들어갔다가 탈출했소. 잠행대 인물 중에 편복선생이 있었고 그의 능력이 큰 도움이 되었지.”
“…….”
“이후 간간이 소식은 들었지만 편복선생이 현재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는 본인도 모르오.”
송현의 얘기는 간단했지만 편복선생과 얽힌 과거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왕이삼은 다른 이유로 경악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송현을 흑도의 마두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차.
그런데 무림맹의 의뢰로 흑랑성에 잠행했다고?
그렇다면 자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다른 의미로 더욱 엄청난 인물이 아닌가!
‘대체 저놈은 정체가 뭘까?’
왕이삼은 서백과 송현 둘 다 알면 알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송현이 물었다.
“본인 얘기는 끝났으니 묻겠소. 당신은 편복선생과 어떤 사이요?”
“몰라서 물으십니까? 편복선생과 얽히면 돈 문제라는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 사기꾼 후레자식이 제 돈을 떼먹었습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오.”
여인의 말투가 점점 날카로워졌지만 송현은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이 도박벽이 좀 심하지.”
“좀이라고 하셨습니까? 편복선생은 자기 마누라까지 팔아서 도박할 놈입니다!”
“그건 아니오. 선생은 세상 어떤 사내보다 공처가가 어울리거든.”
그 말에 긴장하고 있던 왕이삼은 푸흡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으세요? 제가 사기당한 것이 웃기십니까?”
“그게 아니라… 미안하오.”
여인은 공손한 말투로 다그쳤는데 그게 오히려 소름 끼쳤다. 왕이삼은 기가 죽어서 얼른 사과를 했다.
“편복선생이 사기 친 게 현금만 따진다고 해도 무려 은원보 네 개입니다.”
“…….”
서백과 왕이삼이 사천당문의 의뢰를 할 때 수레 하나 당 걸려 있던 돈이 은원보 두 개다. 그러니 은원보 네 개라면 상당히 큰 금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취급하는 이유가 있었군. 은원보 네 개라면 인정이지. 근데 차라리 욕을 하는 게 낫지, 저 공손한 말투는 귀신이 속삭이는 것 같아서 소름 끼치는구만.’
왕이삼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서였다.
“귀중한 정보를 하나 줄 테니 대신 세 가지를 양보하시오.”
“호호호호! 저를 웃기시는군요. 이런 허허벌판에서 중요한 정보가 무엇 있다는 말씀입니까?”
“일단 들어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것이오.”
“…….”
송현의 말투가 진지하자 여인도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좋습니다. 들어 보고 나서 결정하지요.”
그 말에 왕이삼은 얼른 끼어들어서 막으려고 했다.
‘잠깐! 그냥 말하면 안 돼!’
정보는 한 번 들으면 끝이다. 머릿속에 들어간 정보를 일부러 지울 수 없는 법.
만약 정보를 들은 뒤에 자신한테는 쓸데없는 거라고 발뺌을 한다면 되돌릴 방법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무림인, 특히 흑도인 중에서 어디 약속을 지키는 자가 있던가? 명문정파인마저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게 약속이다.
그러니 정보를 교환할 때는 쌍방 간에 동시에 하는 것이 중요한데…….
왕이삼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송현은 그냥 말해 버리는 것이었다.
“부적이 찢어졌소.”
‘으악, 미리 말하지 말라니까!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런데 상황이 왕이삼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왕일, 왕이! 붓과 먹!”
여인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점소이와 숙수가 어디론가 몸을 날렸다.
그때 삼 층에서 인영 하나가 스윽 나타났다.
인영은 목소리에서 짐작되던 것처럼 젊은 여인이었다.
길고 검은 머리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옅은 황색(黃色)이 감도는 도포는 무림인들이 묵는 객잔 주인답지 않게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여인은 예상보다도 훨씬 젊었다. 방년(芳年)을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얼굴. 서백 옆에 서 있으면 누나뻘로 보이리라.
또한 옅게 분칠한 단아한 얼굴도 무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공손하게 막말을 하는 말투만 아니었다면 고관대작의 외동딸로 볼 법한 자태.
여인의 얼굴을 보자 왕이삼은 더욱 기가 막혔다.
‘새파란 계집애가 나를 중늙은이라 불렀다고?’
왕이삼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서려고 할 때, 여인이 삼 층 난간을 넘어서 아래로 뛰어 내렸다.
삼 층은 꽤 높았지만 여인은 깃털처럼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탁.
발이 닿는 소리가 너무 작아서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경공의 고수라는 뜻!
왕이삼은 그걸 깨닫고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뭐 중늙은이면 어때? 나만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사람이 남을 자기 마음대로 부르지 말란 법도 없고 말야.’
강자를 알아보는 것만큼은 귀신처럼 빠른 왕이삼.
바로 그가 오랜 세월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능력이었다.
여인은 일 층 한복판에 있는 탁자에 앉았는데 그 동작마저 기품이 있었다. 그러더니 품에서 둘둘 만 종잇장을 꺼내서 활짝 폈다.
곧이어 점소이와 숙수가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점소이 왕일이 여인에게 건넨 것은 작은 빗자루로 착각할 만큼 엄청나게 커다란 붓이었다.
숙수 왕이가 탁자에 놓은 것은 큼지막한 국그릇이었는데 그 안에 붉은 먹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어서 여인은 탁자를 덮을 정도로 넓은 종잇장에다 붓으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왕이삼이 서백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저거 부적 그리는 거 맞지?”
“네. 닭 피로 부적을 쓰고 있군요.”
“닭 피?”
“닭은 영물이라서 귀신이나 사마(死魔)를 쫓는 부적을 쓸 때 닭 피를 종종 사용하죠.”
휙휙휙. 여인이 붓을 휘두를 때마다 넓은 종잇장에 붉은 선과 호가 그어졌다.
단아하고 가녀린 외모와는 달리 여인의 필체는 호방했고 획은 패도적이었다. 그 붓놀림이 거침없이 종잇장 위를 활보했다.
새하얀 백지 위에 글자도 그림도 아닌 괴이한 도형이 조금씩 완성되어 갔다.
이번에는 서백이 송현에게 물었다.
“저게 어떤 부적인지 아십니까?”
“망자의 접근을 막는 부적일 거다.”
“역시 그랬군요.”
그 말에 서백은 짐작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왕이삼은 입을 딱 벌리고 놀랐다.
“망자를 막는 부적? 세상에 그런 게 있다고?”
왕이삼은 놀라서 목소리를 죽이지 않고 크게 말했다. 그러나 점소이와 숙수가 힐끔 돌아보는 것과 달리, 여인은 눈동자조차 돌리지 않고 부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주위에 부적을 설치해 두고 있었군요. 벌판을 오가는 망자 떼가 객잔으로 접근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입니까?”
“물론이다.”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랑비서라는 비급이 있는데 망자를 쫓거나 유인할 수 있는 부적 제작법이 담겨 있지. 저 여인이 만든 부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랬군요.”
“편복선생이 바로 흑랑비서의 비밀을 밝혀 낸 자다. 여인 말처럼 돈을 밝히는 사기꾼이지만 능력 하나는 최고지.”
“제갈세가 이공자도 흑랑비서의 기문둔갑을 쓰지 않았습니까?”
“맞다. 무림맹과 제갈세가 일공자인 제갈성은 오랜 시간 흑랑비서를 연구한 것 같지만 편복선생이 밝혀낸 것보다 더 알아 낸 정보는 없는 것 같더군.”
“편복선생이란 자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기문둔갑 술법만큼은 최고였지. 술법만큼은 말야.”
왕이삼은 송현의 말에 가시가 있다고 느꼈다.
‘술법만큼은 최고지만 다른 것은 형편없다는 거 아냐?’
송현의 얘기를 듣고 나자 그가 왜 객잔에 들어왔을 때 편복선생을 알고 있으니 값을 깎아 달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목책에 부착된 것이 망자를 쫓아내는 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객잔이 편복선생과 연관이 있을 거라 짐작했던 것이다.
물론 송현의 짐작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왕이삼은 송현도 편복선생도 어떤 인물인지 정체를 알기 힘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일을 어떻게 알고 있소?”
왕이삼은 무심코 물었는데 송현의 눈빛이 갑자기 서늘하게 바뀌었다.
왕이삼이 자기가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몰라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 송현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소리로 대답했다.
“본인이 흑랑성에서 흑랑비서를 찾아 무림맹에 넘겼소.”
“……!”
왕이삼은 다시 한번 입을 벌리며 경악했고, 어느 정도 앞뒤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서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일행은 망자가 창궐한 지역에 있는 용정객잔이 어떻게 벌판에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흑랑비서의 부적을 이용한 망자 격리!
흑랑비서를 처음 사용한 자가 편복선생이고, 여인은 편복선생에게 받을 돈이 있다고 난리를 치고 있으니, 흑랑비서의 부적이 어떻게 여인 손에 들어갔는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여인이 부적 작성을 끝냈다.
송현이 때를 맞춰서 말했다.
“동남쪽으로 차 한 잔 마실 시간 거리에 있는 목책 중 왼쪽에 있는 목책이오.”
“들었지요? 서두르세요.”
여인이 종잇장을 건네자 점소이 왕일과 숙수 왕이가 고개를 조아린 뒤 객잔 밖으로 몸을 날렸다.
왕일과 왕이의 경신법 또한 여인처럼 빨라서 둘의 신형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걸 본 왕이삼은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고수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객잔의 점소이와 숙수.
그리고 막 방년이 지난 나이의 여주인.
무림인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자들이 엄청난 고수인 것을 깨닫자 왕이삼은 새삼 강호가 넓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