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용정객잔(1)
서백은 왕이삼 방위의 집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왕이삼과 송현이 함께 있었고, 바닥에는 도화광의 잘린 목과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왕이삼이 서백을 반기며 물었다.
“후배, 괜찮냐?”
“저야 괜찮죠. 선배님이야말로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라니? 내가 뭘…….”
“명령자랑 독대하고 싶어서 함정을 팠거든요.”
“무슨 함정?”
“도화광은 명령자가 아닌 것 같아서 선배님을 급습하도록 방위 배치를 했습니다. 그 결과는 보시는 대로고요.”
서백이 바닥에 있는 도화광의 시체를 가리켰다.
잠시 멍하니 있던 왕이삼은 곧 입을 딱 벌렸다.
“그러니까 도화광이 날 공격하도록 후배가 일부러 계획했다는 거냐?”
“맞습니다.”
“너 이 자식……!”
왕이삼은 버럭 소리를 쳤지만 빙그레 미소를 짓는 서백을 보자 이상하게도 화를 낼 수 없었다.
지금처럼 서백이 웃는 얼굴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왕이삼은 잔뜩 삐져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쳇, 나한테 한 번 빚진 줄 알아라!”
“네.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왕이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성격이 급한 그는 화를 내는 것만큼 풀어지는 것도 빨랐다.
“그런데 명령자가 누구였냐?”
“소삼락이었습니다.”
“그 수염 덮수룩한 놈이 망자였다고?”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서 수염은 가짜입니다.”
서백은 소삼락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했다.
또한 네 명의 흑도인이 실은 모두 살수였으며, 서백에게 걸린 포상금을 노리고 일행을 따라왔다는 등의 얘기까지 모두 설명했다.
얘기를 모두 들은 왕이삼은 입을 딱 벌리며 경악했다.
“서생이 인피면구를 쓰고 변장해 있었다니……. 그런데 후배는 흑도 놈들 네 명 중에서 그놈이 명령자인 건 어떻게 알았냐?”
“몰랐습니다.”
“뭐야?”
“어차피 네 명 다 목을 벨 생각이었거든요. 망자든 산 사람이든 저를 노리던 살수들이 아닙니까.”
“……!”
왕이삼은 다른 의미로 경악하며 침을 삼켰다.
서백은 어떤 때는 약관이 안 된 순수한 소년처럼 보이지만, 어떤 때는 도검삼림을 헤쳐 나온 냉혹한 무림인의 면모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일행은 소삼락이 어떻게 수로채를 망자판으로 만들었을지 예상하며 얘기를 나눴다.
얘기 중에 왕이삼은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럼 소삼락은 수로채를 망자판으로 만들었으면서 왜 우리를 따라서 방주에서 탈출한 거냐?”
“그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소.”
이번에는 송현이 대답했다.
“수로채가 서백을 잡으면 그대로 남궁세가로 끌고가면 되고, 일행이 방주를 탈출하면 함께 있으니 기회를 틈타서 서백을 잡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뭘 해도 좋은 상황이었다는 말이오?”
“바로 그렇소.”
“끄응.”
왕이삼은 온갖 병법과 계책이 난무하는 삼국연의를 좋아했는데, 정작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자 머리가 복잡했다.
서백과 송현. 삼국연의의 모사꾼 같은 이인!
“명령자는 망자의 모체(母體)와 정신이 연결되어 있는 망자요. 흑랑성 사건 이후 모체는 사라졌는데 어떻게 명령자가 중원을 떠도는지 모르겠군.”
송현의 말에 서백은 생각에 잠겼다.
석가장에서 망자에 대해 수없이 공부했지만 여전히 미지에 싸인 곳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망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종류와 특성이 조금씩 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림사행을 서둘러야겠군. …매번 하는 생각인가?’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만큼 미련한 것은 없다.
손해 본 만큼 얻은 게 있으니 다시 전진하면 그뿐.
“그럼 소림사행을 재개합시다.”
“낙양까지 못 가고 방주에서 내렸는데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왕이삼이 묻자 서백이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용정객잔입니다.”
* * *
서백 일행은 집에서 나와 거리를 이동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여기저기 망자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간혹 일행 근처에 망자들이 접근했지만, 일행은 호흡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자 일행은 숙주의 선착장 거리를 빠져나왔다.
송현이 일행을 보며 말했다.
“용정객잔은 숙주에서 그리 멀지 않소. 표사 시절에 한 번 들른 적이 있어서 길을 알고 있지.”
“잘됐군요.”
서백이 반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반면 왕이삼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흑점도 제 집처럼 드나드는데 어련하시겠어.’
어쨌든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왕이삼도 그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살수들이 후배를 잡아가려고 한 객잔에 간다는 게 좀 꺼림칙한데 말야.”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사는 법입니다. 그리고 소림사까지 걸어가실 생각입니까?”
“그건 무리지.”
“객잔에서 말도 구하고 저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붙잡아서 배후를 캐내야죠.”
“쩝.”
왕이삼은 서백의 말에 설득되었지만 정말 괜찮은지 걱정이 돼서 고개를 저었다.
반면 서백과 송현은 무심한 얼굴로 길을 갔다.
해가 뜨자 일행의 앞에는 삭막한 벌판이 펼쳐졌다.
왕이삼은 또 허허벌판을 굶주리며 걸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다.
다행이 선착장 거리에서 용정객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일행이 하룻밤 노숙을 하고 다음날 저녁때가 되자 용정객잔에 도착했던 것이다.
“저기가 용정객잔이오.”
송현이 지평선 끝자락에 걸려 있는 낡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용정객잔 주위는 말 그대로 황무지였다.
사람이 사는 거리가 아닌 외딴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객잔.
왕이삼은 왠지 불안했다.
‘또 흑점인 거 아냐?’
안 그래도 송현은 흑점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거침없이 안내하자 왕이삼은 불길한 마음부터 들었던 것이다.
“곧 해가 질 테니 서두르죠. 객잔에 가면 따뜻한 양춘면 한 그릇씩 먹읍시다.”
서백은 여느 때처럼 씩씩하게 앞장을 섰다.
왕이삼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후배도 있고 저 얼음 같은 검객 놈도 있으니 설령 흑점이라고 해도 별문제는 없겠지.’
여전히 송현이 꺼림칙했지만 그의 무공 수위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소림사가 있는 곳은 중원에서 망자가 창궐한 본원이다. 육로로는 아직 멀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
그런데 주위에 망자가 없는 것이 이상했다.
일행은 길을 오는 중 몇 번 망자와 마주쳤고 그때마다 호흡을 참아서 산 자의 기척을 숨겼다.
왕이삼이 의아해하는 것은 객잔의 존재였다.
언제 망자 떼가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객잔이 문을 열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객잔이 빈 건물이 아닌 건 확실했다. 물을 끓이고 음식을 하는지 객잔에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객잔 주인은 목숨이 몇 개라도 되나?’
왕이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인지 송현이 발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서백이 묻자 송현은 고갯짓으로 벌판에 서 있는 목책을 가리켰다.
“망자를 막는 목책이군.”
일행은 목책을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갔다.
그런데 목책을 본 왕이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망자 막는 목책이야?’
말이 목책이지 다 쓰러져가는 통나무 몇 개를 땅에 박아놓고 밧줄을 둘러놓았을 뿐이었다.
몇 개나 되는지 몰라도 허허벌판에 세운 목책이 망자 막는 데 도움 될 리 없었다.
왕씨세가는 꽤 튼튼한 요새를 세워놨지만 망자 떼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밤에 도망치지 않았던가!
‘저 목책은 망자는커녕 참새 막는 허수아비도 못 되겠다.’
그런데 송현은 무슨 생각인지 다 쓰러져가는 목책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왕이삼으로서는 영문을 모르는 것을 넘어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때 송현이 목책에 붙어 있는 무언가를 떼 냈다.
붉은 얼룩이 진 헝겊 같은 것.
왕이삼은 그게 뭐냐고 물으려 했지만 송현이 헝겊을 품에 넣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백도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라갔고, 왕이삼은 물어볼 기회를 놓쳐 버렸다.
하지만 굳이 따라가서 묻고 싶진 않았다.
서백과 송현이 하는 일이 세간의 상식으로 설명 가능한 게 있었던가.
‘차라리 모르는 게 마음 편하지.’
일행이 객잔에 도착한 것은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서였다.
가까이 와서 보자 객잔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건물은 삼 층이었으며 옆에는 마구간이 따로 있을 정도. 허허벌판에 이런 객잔이 있다면 주위를 지나가는 여행자들의 좋은 휴식처였으리라.
또한 제법 이름이 있는 객잔이었는지 대문 위에 ‘용정객잔(龍庭客棧)’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편액은 잔뜩 낡아서 글씨가 절반쯤 지워져 있었다. 지붕과 벽도 비바람에 풍화돼서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과거에는 분명 수많은 무림인이 드나들었을 객잔.
하지만 망자 창궐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객잔은 점차 쇠퇴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지금 중원 땅이 그러듯이.
왕이삼은 망자가 창궐했는데 황무지 외딴 곳에 있는 객잔이 어떻게 망하지 않고 버티는지 궁금했다.
일행은 문을 열고 객잔에 들어갔다.
그런데 꽤 큰 객잔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목소리가 없었다.
삼 층까지 복도가 보이도록 중앙이 터 있는 객잔에는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일 층에 나란히 놓여 있는 탁자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곧이어 점소이 하나가 나오더니 일행에게 탁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일행은 탁자에 앉았지만 왕이삼은 점소이가 아무 말 없이 손짓만 하는 게 불만이었다.
“뭐가 이리 불친절해? 이렇게 큰 객잔이 손님이 없는 건 다 이유가 있었군.”
그러자 서백과 송현이 한 마디씩 했다.
“손님이 없는 건 망자 창궐 때문일 겁니다.”
“과거 남궁세가와 소림사를 오가는 무림인들은 모두 이 객잔에 들렀소. 당시 무림대회라도 열리면 객잔은 발 디딜 틈이 없었지.”
점소이가 오자 왕이삼이 주문을 했다.
“양춘면 세 그릇과 백주.”
그런데 점소이는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고 손가락으로 값을 불렀다.
점소이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 다음 양손의 손가락을 모두 폈다. 둘에 열을 곱하면 스물. 즉 은자 스무 개를 내라는 뜻.
“은자 스무 개? 뭐가 그렇게 비싸?”
왕이삼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은자 쉰 개에 은원보가 하나 꼴.
즉 은자 스무 개면 거의 은원보 절반가량의 값어치라는 뜻이다. 고작 국수 세 그릇과 술 한 병이 은원보 절반이라는 것은 평생 중원을 돌아다닌 왕이삼도 처음 겪어 보는 바가지였다.
그러자 점소이가 손을 가로로 휘휘 저었다.
가격이 비싸면 굳이 잡지 않을 테니 객잔을 나가라는 소리.
결국 왕이삼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손님보고 지금 나가라는 거냐? 뭐 이런 객잔이 다 있어!”
그는 황무지 외딴 곳에 있는 객잔이 어떻게 망하지 않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바가지를 넘은 엄청난 폭리!
“황무지 허허벌판에서 갈 곳이 여기밖에 없다고 바가지를 씌우는 거냐?”
그러자 점소이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왕이삼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왕이삼이 재차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 송현이 손을 들어서 막으며 말했다.
“본인은 편복선생과 아는 사이요. 좀 싸게 해 주면 안 되겠소?”
그 말에 왕이삼은 어리둥절해서 서백을 돌아보며 귓속말을 했다.
“편복선생? 누구냐?”
“저도 처음 듣습니다.”
그때였다.
“편복선생을 아신다고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객잔 삼 층이었다.
예의 바른 목소리는 살짝 콧소리가 섞인 고음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여인이라는 뜻.
그런데 삼 층에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빠르게 접었다가 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차라락.
순간 점소이가 세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허리춤 뒤에서 채찍을 꺼냈다.
말채찍의 끝에 유성추(流星錘)처럼 금속추를 달아서 파괴력을 높인 병장기였다.
또한 일행의 등 뒤에서 갑자기 썩썩썩 하는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나타났는지 숙수가 양손에 큼지막한 식칼과 숫돌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괴이한 소리는 식칼을 숫돌에 가는 소리였다.
이어서 삼 층에서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편복선생을 아는 손님이 어느 분이신지요?”
“본인이오.”
“편복선생과 어떤 사이십니까?”
여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공손해서 거친 무림인이 듣기에는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인이 그 예의 바른 목소리를 가지고 오싹 소름이 돋을 만큼 잔혹한 내용을 얘기했다.
아니, 통보했다.
“부디 심사숙고하고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말씀하시는 게 앞뒤가 맞지 않으면 점소이와 숙수가 여러분들의 뼈를 발라서 살점을 들짐승에게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