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망자 색출 작전(2)
망자 떼를 조종하는 주인 격인 명령자.
그 명령자가 어디 있는지 소재를 알고 있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살수들은 잠시 멍하니 송현을 쳐다봤다.
도화광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럼 명령자란 놈을 찾아서 없애면 되지 않냐?”
“말처럼 쉬웠으면 벌써 했을 것이오.”
그 말에 살수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송현의 검법이 명문정파의 절정고수 수준이라는 것은 방주에서 익히 목격했던 참.
그런 그가 고작 망자 하나를 상대로 주저할 리 없었다. 명령자를 못 죽이고 있는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그때 서백이 질문을 했고, 둘이 문답을 하자 송현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어디 있는지는 알지만 누구인지는 모른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바로 그렇다.”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이삼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번쩍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맞다! 명령자라는 게 그놈이었구나!”
모두의 시선이 왕이삼에게 집중됐다.
명령자의 정체를 추리해 낸 왕이삼은 호기롭게 가슴을 탕탕 치면서 외쳤다.
“명령자는 바로 채주가 아니냐? 아까 인간 다리! 망자들을 조종해서 그런 것까지 만들었으니 채주가 명령자인 게 틀림없다!”
“…….”
그 말에 서백과 송현은 물론 살수들조차 고개를 저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나 어이없는 추리.
“채주는 명령자가 아닙니다.”
“뭐라고? 왜?”
“명령자는 지금 망자를 조종해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앞을 막고 있습니다.”
“나도 안다. 그래서?”
“수로채가 운하를 건너왔는지 모르지만 아직 우리를 따라잡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앞길을 막겠습니까?”
“끄응.”
서백이 명령자가 채주가 아닌 이유를 설명하자 왕이삼은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왕이삼의 추리가 엉터리로 판명나자 도화광이 송현에게 재차 의문을 제시했다.
“잠깐, 앞뒤가 안 맞는데?”
“무엇이 말이오?”
“명령자가 앞길을 막고 있으면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셈이지.”
“누가 아니라고 했소?”
“채주는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아는 망자는 아무도 없지. 그럼 대체 누가 망자를 조종하고 있단 말이냐?”
“답은 하나요.”
송현이 일행을 좌우로 한 번 훑어 본 다음 말했다.
“명령자는 바로 여기 있소. 우리 중 누군가가 명령자요.”
“……!”
송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왕이삼은 물론 사람을 죽여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살수들마저 신음을 흘리며 침묵했다.
송현은 망자와 혈귀의 차이점을 간단히 설명했다.
“망자는 산 사람과 구분되지 않으니 우리 중에 숨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소.”
“설마 그럴 리가…….”
“그러니 우리가 가는 곳마다 혈귀들을 조종해서 길을 막고 한쪽으로 몰고 있는 것이오.”
“그게 말이 되냐? 우리 중에 망자가 있다니.”
“그럼 다른 추리라도 있소?”
“…….”
살수들은 말을 못 꺼내고 침묵했다.
따지고 보면 송현의 말이 믿기 힘들다는 것뿐,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중원 천지에는 더욱 믿기 힘든 일도 있으니까.
흑도에 몸담으며 수많은 괴이한 일을 경험한 살수들은 금세 상황에 적응했다.
-이 중에 한 놈이 망자라는 말이지?
-거 참 재미있군. 겉으로 봐서는 전혀 모르겠는데 말야.
-나는 아니고, 이놈인가? 아니면 저놈?
살수들은 끊임없이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누가 망자일지 유심히 살폈다.
왕이삼이 물었다.
“왜 망자들을 한꺼번에 덤비도록 하지 않는 거지? 고작 길을 막는 것보다 그게 더 쉽잖아?”
“명령자가 어떤 방법으로 망자를 조종하는지, 또 그의 심중이 어떤지 본인이 알 수는 없소. 단지.”
“단지?”
“망자를 조종할 수 있는 범위가 그리 넓지는 않을 거요. 만약 범위가 무제한이라면 중원 전체의 망자들이 놈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소?”
“으음…….”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송현의 설명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 추측이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실제 명령자가 있다면 필시 송현의 말처럼 행동하고 있으리라.
“명령자를 없애지 않는 한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오.”
“아니, 왜? 그냥 나가면…….”
“설령 도시를 탈출했다고 해도 문제요. 여기서는 건물에 숨을 수 있지만 도시를 나가면 그것도 못 하니까.”
“끄응.”
“숨을 멈추는 것도 한계가 있소. 벌판에서 수천수만의 망자 떼에 포위되면 언제까지 숨을 참고 버틸 것이오?”
“젠장, 그렇군…….”
왕이삼은 그 말이 가슴에 더욱 와닿았다.
안 그래도 대규모 망자 떼를 피하는 바람에 소림사를 향해 일직선으로 가지 못하고 중원을 힘들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럼 이 중에서 과연 망자가 누굴까?”
도화광이 킬킬거리며 말하자 일행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봤다.
“나는 아니니까 네놈들 셋 중에 있겠군. 아니지. 꼬마랑 둘도 망자가 아니라는 법은 없지.”
도화광이 검지로 서백 일행을 하나씩 가리켰다.
“뭐라고? 어디서 흑도 놈이 명문 정파인보고 망자라고 뒤집어씌우는 거냐!”
왕이삼이 발끈하고 나섰는데 뜻밖에도 서백이 그를 막으며 대답했다.
“왕 선배님, 참으십시오.”
“후배…….”
“일리 있는 말입니다. 우리 셋 중에서 망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
서백의 말은 단지 논리로 왕이삼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었다.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는 눈빛.
왕이삼은 서백이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망자가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색출해서 목을 베면 그만이니까요.”
망자 색출에 대한 의지가 담긴 말.
반면 살수들은 숨어 있는 망자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명령자? 색출해서 없애 준다면 우리야 고맙지.
망자가 득시글거리는 방주에서 탈출했겠다, 명령자만 없으면 도시를 빠져나가서 용정객잔으로 가면 된다. 그들로서는 명령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어차피 똑똑한 꼬마와 예리한 검객이 찾아서 없애줄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뒷짐 지고서 꿩 먹고 알 먹기.
이제 문제될 것은 자신 말고 남은 살수들.
포상금을 두고 죽고 죽여야 될 경쟁자니까 말이다.
살수들은 슬며시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들의 눈알은 쉴 새 없이 좌우로 돌아갔고,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꼬마는 용력이 대단하지만 일대일로 싸우면 충분히 제압 가능하다. 무공 수위는 제법이다만 경험 부족이 네 발목을 잡을 거다, 후후후.
-문제는 저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 같은 검객이지.
-검객이 옆에 붙어 다니는 이상 꼬마를 붙잡는 건 쉽지 않겠군.
-그런데 대체 명령자가 누구지?
살수들이 잔뜩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서백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각자 통성명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통성명?”
“네. 누군가 신분을 속이려 드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바로 명령자일 겁니다.”
“흐음…….”
살수들은 서백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제 속마음은 전혀 딴판이었다.
-통성명? 이름이랑 별호 따위가 망자랑 무슨 상관이라고?
-가짜로 댄다고 해도 알아낼 방법이 없잖아?
-영리한 꼬마가 이번만큼은 멍청하군.
-일단 하자는 대로 하자. 검객과 꼬마 놈이 따로 떨어졌을 때가 기회다.
“다들 찬성하는 걸로 알고 저부터 하겠습니다.”
서백이 일행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리며 말했다.
“저는 사천 석가장 출신의 서백으로, 스승님의 명에 따라 소림사로 가는 중입니다.”
“호오, 소림사. 좋지.”
도화광이 마치 처음 듣는 얘기라는 양 말했다.
서백은 살수들의 민감한 표정 변화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그러나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꺼낸 도화광은 물론 다른 살수들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차라리 상대가 명문정파인이라면 망자 색출이 조금은 더 쉬웠으리라.
정체를 숨기고 청부살인을 끝낸 뒤 흔적 없이 도망치는 것이 살수. 연기를 하거나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것은 사시사철 항상 하는 일이 아닌가.
서백 역시 무심한 눈빛으로 살수들을 대하며 생각했다.
‘말로 함정을 파서 속이는 건 쉽지 않겠군.’
“다음. 송 선배님, 부탁 드립니다.”
“청위표국 출신의 송현이오. 운남을 떠나 소림사로 가고 있소.”
“또 소림사냐? 소림사, 인기도 좋아, 크크크.”
도화광이 그답게 한 마디 했다.
그런데 살수 하나는 송현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청위표국? 오래 전에 멸문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나이가 오십 가까이 된 살수는 오래 된 무림 일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청위표국은 개봉에서 한때 크게 위세를 떨친 곳이었다.
특히 비전무공인 벽운검법은 개봉에서 흑도의 씨를 말렸다는 말이 나올 만큼 패도적인 검법으로 악명이 높았다.
청위표국은 흑랑성에서 망자가 창궐한 이후 정체불명의 사건을 겪고 멸문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단 한 명 남은 표국의 국주는 금분세수를 하고 운남으로 낙향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운남에서 왔다고? 그럼 청위표국의 마지막 국주?
만약 소문 속의 청위표국 국주가 맞다면 절대 상대해서는 안 되리라.
살수는 처음에 서백이 통성명을 제안할 때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될 줄이야…….
무림에서는 정보가 곧 돈이자 생명!
-꼬마야, 네 덕분에 귀중한 정보를 얻는구나, 후후후.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노련한 살수답게 얼굴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반면 얼굴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자가 있었다.
바로 왕이삼이었다.
왕이삼은 서백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 회전이 느린 그도 통성명이 망자 색출과 무슨 상관인지 의심 갔던 것이다.
신분을 속이려 드는 자가 망자?
서백이 아니었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왕이삼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아니, 중원에서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아니면 다 똑같은 놈들인데 이름을 속였는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하냐?’
게다가 상대는 흑도 무리가 아닌가?
‘흑도 놈들은 부모가 지어 준 이름 쓰는 놈이 열에 셋도 안 된다고!’
왕이삼은 답답한 나머지 서백 좀 말리라는 심정으로 송현을 돌아봤다.
그런데 송현 역시 가관이었다.
그는 왕가 요새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팔짱을 낀 채 서백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또 시작이군. 저놈의 팔짱.’
마치 무조건 믿을 테니 좋을 대로 하라는 태세.
서백과 송현을 번갈아 보던 왕이삼은 말리는 것을 포기하며 생각했다.
‘둘이서 천하제일 기괴이인(奇怪二人) 해라!’
자기도 모르게 서백과 송현의 별호를 지어 주는 왕이삼이었다.
“다음, 왕 선배님?”
“아주 천하제일 기괴이인이 따로 없다니까… 아, 그게 아니라… 나 불렀냐?”
“선배님 차례입니다.”
“흐음, 흠! 나는 도검수 왕이삼이오. 중원 천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소. …끝이오.”
머쓱해진 왕이삼은 헛기침을 하며 통성명을 했다.
별 다를 것 없는 소개였지만 살수들은 누구 하나 더 묻지 않았다.
애초에 왕이삼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경험은 있어 보이는 도검수군.
-박도 하나는 조금 휘두르려나?
-꼬마나 검객을 상대할 때 저놈이 옆에 있다면 짜증 나겠지만 따로 상대한다면 무서울 게 없는 놈이다.
왕이삼이 들었다면 펄쩍 뛰면서 화를 낼 생각이었지만, 사실 살수들의 평가는 정확했다.
간략하나마 서백 일행 세 명의 통성명이 끝났다.
다음은 살수들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