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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75화 (75/123)

75화 방주 탈출(4)

“으아악! 이게 뭐야?”

허세를 부리던 왕이삼은 쏟아지는 액체를 꼼짝없이 뒤집어쓸 판이었다.

그때 서백이 왕이삼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왕이삼은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덕분에 핏물을 뒤집어쓰는 봉변은 면할 수 있었다.

엄청난 양의 핏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쏴아아아. 철퍽철퍽.

찐득한 핏물이 바닥에 부딪칠 때마다 마치 따귀를 치는 것처럼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핏물에 닿지 마시오.”

송현이 검을 벽에 박은 뒤 검잡이를 잡고 몸을 지탱하며 바닥에서 발을 뗐다. 그러자 핏물은 그의 발 아래를 흘러서 지나갔다.

서백도 검을 벽에 박고 검면에 올라탔다. 물론 왕이삼의 덜미를 잡고 끌어올려서 핏물이 닿지 않도록 했다.

살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검이나 병장기를 벽에 꽂고 허공에 매달렸다. 갑자기 날아드는 암기도 피하는데 미리 경고 받은 상황에 대처 못할 리 없었다.

철퍽철퍽. 콸콸콸콸.

핏물은 한동안 끝을 모르고 쏟아졌다.

“갑자기 웬 물난리… 아니, 피 난리야?”

왕이삼이 발아래를 흐르는 핏물을 보며 말했다.

서백이 그 의문에 대답했다.

“위쪽 방은 망자들의 식당일 겁니다.”

“식당? 온통 핏물로 가득 차 있었을 텐데 저기서 무슨 밥을 먹는단 말이냐?”

“수로채는 저 방에서 잘린 목을 떼어 낸 뒤 핏물에 담근 겁니다.”

“핏물에 담갔다고?”

“네. 망자들이 식사하는 법이죠.”

그제야 왕이삼은 무슨 얘기인지 깨닫고 입을 딱 벌리며 경악했다.

왕이삼 말고 살수들도 충격을 받았는지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잘린 목을 핏물에 담가서 힘을 보충한다는 얘기는 이미 서백한테 들었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쏟아진 핏물의 양을 감안하면 방은 피로 가득 차 있었으리라. 말 그대로 핏물 욕조. 그 붉은 핏물에 망자들의 잘린 목이 둥둥 떠 있는 장면을 상상하자 모골이 송연했다.

“방주를 조사하던 중 위쪽 방은 출입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용도를 알 수 없기에 의심하고 있었소.”

“…….”

“핏물을 쏟아 버렸으니 당장은 망자들이 힘을 보충할 수 없을 거요.”

휙. 말을 마친 송현은 벽에서 검을 빼는 것과 동시에 계단 위로 몸을 날렸다. 계단은 핏물에 잠기지 않아서 안전했다.

서백이 왕이삼의 덜미를 잡은 채 송현처럼 행동해서 계단에 착지했다. 살수들도 병장기를 빼내며 벽을 차서 반탄력을 이용해 계단으로 날아왔다.

밥 먹듯이 사람을 죽이면서 피를 뒤집어쓰는 게 직업인 살수들.

그러나 지금만큼은 핏물에 발을 적시고 싶지 않았다. 망자들의 잘린 목이 둥둥 떠다녔으리라고 상상하자 핏물에 빠지는 것은 물론 발가락 하나 담그기도 꺼림칙했던 것이다.

“식당을 없앴으니 탈출을 재개하겠소.”

그런데 도화광이 송현에게 의문을 제시했다.

“일부러 망자 놈들 식당을 찾아서 없앤 이유가 뭐지?”

“탈출로에 마침 식당이 있어서 제거했을 뿐이오.”

“어차피 망자 놈들은 식사를 끝냈으니 한시라도 빨리 방주에서 나가는 쪽이 더 낫지 않냐?”

“그럼 식당을 놔두고 가자는 말이오?”

“후환은 제거하는 게 좋겠지만 지금은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지. 망자 놈들이 핏물을 몽땅 버린 걸 깨닫고 지옥 끝까지 쫓아오면 어쩌려고?”

도화광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살수들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왕이삼마저 도화광의 논리가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어차피 방주에서 탈출하는 판에 일부러 망자들의 심기를 건드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다들 송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화광의 반론을 인정했다.

“맞는 말이오.”

“참 나, 지금 밥상을 뒤집은 놈이 할 소리냐?”

“망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일부러 그랬소.”

“뭐라고?”

“망자 중에는 명령자(命令者)라는 게 있소. 명령자는 다른 망자들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지.”

“…….”

“명령자를 없애지 않는 이상 방주에서 내린다고 해도 망자들은 우리를 추격해 올 것이오.”

“……!”

송현의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도화광이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살수들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식당을 파괴했으니 지옥 끝까지 쫓아온다.

말이 씨가 된다고, 도화광이 무심코 한 말을 송현이 현실이라고 지적한 셈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명령자는 다른 망자들 속에서 정체를 숨기고 있을 거요. 하지만 식당을 부순 걸 깨달으면 화를 내겠지.”

“…….”

“평정심을 잃든 복수심에 불타든 무언가 낌새를 보이겠지. 그걸 발견하면 제거할 생각이오.”

그 말을 듣고 살수들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사람 목숨을 빼앗는 직업인 살수는 후환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체를 들키거나 살인 장면을 목격당하는 경우 목격자를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살인멸구. 살수들의 좌우명과 같은 말.

그러니 명령자를 죽여서 후환을 깨끗이 없애려는 송현의 심계가 희한하게도 살수들의 심사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때 왕이삼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혹시 명령자라는 게 채주 아닐까?”

“맞소. 채도들에게 습격을 지시했으니 필시 채주가 명령자일 것이오.”

“옳거니! 채주만 없애면 망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거요?”

“그럴 것이오.”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처럼 건수를 올린 왕이삼이 서백을 보며 씨익 웃었다.

“위.”

다시 송현의 지시가 떨어지자 서백은 선봉에 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먼저와는 달리 이번에는 검날이 정면 위를 향하도록 비스듬히 세웠다. 계단에서 채도가 아래로 내려오면 바로 발목을 베어 버릴 태세.

그런데 온몸의 신경은 망자의 급습을 대비하면서도 서백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금 왕이삼이 한 말에 대해서였다.

채주가 명령자일 거라는 왕이삼의 추리?

그 추리는 엉망진창이었다.

‘추리 과정도 결론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게 왕 선배답군.’

물론 채주가 명령자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수로채의 채주가 망자들의 우두머리일 거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오히려 명령자는 채도들 중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송 선배가 그걸 모를 리 없지.’

하지만 송현은 왕이삼의 말을 듣고 반론 한 마디 없이 맞장구를 쳤다.

그것은 바로 송현의 또 다른 심계일 터.

만약 심계가 들어맞는다면 명령자를 잡기 위한 덫이 될 것이다. 명령자가 안심하고 있는 사이 발목을 낚아챌 강력한 덫이.

계단을 두 번 올라가자 드디어 갑판이 나왔다.

서백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갑판으로 나갔다. 다행이 갑판을 지키고 있는 채도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 없습니다.”

방주 아래가 지옥인 반면 갑판은 무심하리만큼 평화로웠다. 너무 적막한 게 오히려 꺼림칙할 정도로.

그래도 피 냄새가 뒤섞인 밀폐 공간에 있다가 사방이 트인 곳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머리가 맑아졌다.

곧이어 일행이 모두 갑판으로 올라왔다.

“이제 살았군!”

왕이삼이 환호성을 울렸다.

그러나 송현이 안심하는 왕이삼을 제지했다.

“아직 방주 위요. 방주에서 내릴 때까지 방심은 금물이오.”

“쳇, 알고 있소.”

투덜거리던 왕이삼은 무슨 소리를 듣고 침을 삼켰다. 어느새 계단 아래서 망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키에에엑…….

“벌써 쫓아 온 건가?”

“그런 것 같소.”

소리를 듣고 도화광도 한 마디 했다.

“빌어먹을 흑도 놈들. 뒈지면서 시간 하나 못 벌어 주냐.”

그 말은 단순한 불평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나름 검 좀 쓴다는 살수들 수십 명이 삽시간에 몰살당했다는 것이 아닌가?

피를 흡수한 망자들의 위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

방주에서 운하 가장자리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모든 내력을 운용해서 도약한다면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

“건너뛸까요?”

서백이 송현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명령자를 제거하지 못했으니 무리다.”

그 한 마디로 서백은 송현의 뜻을 알아차렸다.

운하 바깥은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문제는 어둠이 생명이 있는 것처럼 꿈틀대고 있다는 것. 즉 어둠 속에서 망자 떼가 득실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방주에는 명령자가 타고 있다.

명령자는 서백 일행이 운하를 건너뛰는 순간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일행이 땅에 착지할 때 망자 떼에게 달려들라고 조종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서백은 수십수백의 망자 떼는 두렵지 않았다. 석가심결을 시전하면 망자 떼를 베어 넘기고 포위망을 돌파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중원은 망자가 창궐한 지 오래.

만약 운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망자 떼의 숫자가 수천수만이라면? 아무리 베어 버려도 망자 떼는 끝도 없이 몰려들 것이다.

석가심결의 제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즉 운하 바깥에 망자 떼가 얼마나 숨어 있는지, 또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정보를 모르는 이상 무작정 운하를 건너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터.

‘어떻게 한다?’

서백이 다음 탈출 작전을 생각하고 있을 때, 방주가 나아가는 멀리 앞에 선착장이 나타났다.

양주에서 시작된 운하가 낙양까지 이르는 도중에 중간 지점이 있다. 바로 안휘성의 동쪽에 자리한 숙주. 눈앞에 선착장이 나온 것으로 볼 때 숙주에 도착한 것이리라.

하남성의 바로 옆, 중원의 중심에 위치한 안휘성.

그 안휘성과 운하를 잇는 만큼 숙주의 선착장은 작은 도시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규모가 거대했다.

순간 서백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거대 선착장이라면 반드시 있는 곳은?

서백과 송현의 시선이 교차했다.

송현도 서백과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가 선착장을 지날 때 내려야 합니다.”

“물론.”

이어서 둘이 동시에 말했다.

“돛대.”

옆에서 도화광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돛을 거둬서 방주의 속도를 늦추자는 말이군!”

그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방주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나 거대한 규모 때문에 타고 있는 사람한테 그렇게 느껴질 뿐 실제는 꽤 빠른 속도로 물살을 타고 있었다.

중원은 서북에서 동남으로 갈수록 지대가 얕기 때문에 운하에서 남하할 때는 물길의 흐름에 따라 가만히 있으면 된다.

반면 북상할 때는 거꾸로 상류로 올라가는 셈이 되니 노가 필요하다.

하지만 방주는 노를 젓는 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

때문에 방주가 북상할 때는 돛을 펼쳐서 바람을 받는다. 해안에서 대륙으로 불어오는 동남풍을 받으면 방주는 물살을 헤치고 상류로 올라가는 것이다.

삼국연의 최고의 군사(軍師)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수군을 화공으로 물리치는 데 이용했다는 그 동남풍!

지금 방주는 돛을 모두 펼쳐서 바람을 최대한 받고 있었다.

자칫하면 선착장을 그대로 지나칠 태세.

때문에 도화광은 서백과 송현의 대화를 방주 속도를 늦추자는 말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백의 대답은 도화광이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아니, 방주 속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뭐라고? 이대로라면 선착장을 그냥 지나쳐 버릴 텐데? 선착장을 지나가면 방주에서 내릴 기회는 영영 사라질지 모른다!”

도화공이 영문을 모르겠는지 소리쳤다.

“상관없습니다.”

서백이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돛을 거두는 게 아니라 돛대를 자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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