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방주 탈출(3)
뒤에서 따라오던 도화광과 살수들이 그걸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사람 죽이는 데 도가 튼 살수들도 서백의 수법은 놀라웠던 것이다.
“오호라, 장수보다 말을 쏘라는 말이냐?”
말끝마다 조롱을 일삼는 도화광마저 감탄을 하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치명상을 입으면 동작을 멈춘다.
하지만 망자는 목을 베거나 몸통을 꿰뚫어도 계속해서 덤벼든다.
그런 망자를 상대로 서백은 발목을 잘라 버려서 스스로 균형을 잃고 쓰러지게 만든 것이다.
즉 장수보다 그가 타고 있는 말을 쏘아서 넘어뜨린 수법.
채도가 양팔을 휘저으며 서백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서백은 신경 쓰지 않고 전진했고, 몸을 일으키던 채도는 한쪽 발목이 없어서 버둥거리다가 재차 나뒹굴었다.
그때 송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채도의 입에 수직으로 검을 박았다.
쿡. 꾸웩.
검이 입을 관통해서 혈선충의 심맥을 꿰뚫었다.
채도는 전신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곧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그야말로 신속하고 간결한 확인사살.
송현의 빠른 손속을 보고 살수들은 다시 한번 두 눈을 크게 떴다.
-둘이 손발이 척척 맞는군.
당장은 수로채한테서 도망치지만 살수들은 내심 기회를 봐서 서백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방주에서 망자가 나왔지만 상황은 오히려 괜찮았다. 다른 경쟁자들이 채도들한테 덜미를 잡힌 꼴이니까.
그런데 서백이란 꼬마의 용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함께 다니는 송현이란 자도 상당한 고수였다.
일대일로 상대하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갈 정도로.
도화광을 비롯한 살수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저 두 놈 꽤 하는데.
-작전 개시는 잠시 보류다.
-일단 방주부터 탈출하고 나서 기회를 봐야겠군.
살수들은 서백의 마지막 동료에게 눈길을 돌렸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인 왕이삼.
둔중한 박도를 든 채 엉거주춤하게 걷는 모습이 좋게 쳐 줘도 일류가 될까 말까 한 수준으로 보였다.
-저놈은 그냥 평범한 도검수 같은데?
그러나 살수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평범을 가장하고 무공을 숨기고 다니는 고수가 강호에 얼마나 많단 말인가?
그들은 왕이삼도 눈여겨봐야 될 인물로 생각했다.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두 동료가 고수인 바람에 생전 처음으로 고수 평가를 받는 왕이삼이었다.
서백은 계속해서 거침없이 복도를 전진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뒤에서 송현이 방향을 지시했다.
“좌.”
“우.”
“직진.”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한 신호.
어둠 속에서 채도가 튀어나오자 먼저처럼 발목을 베어서 쓰러뜨렸다.
‘두 놈.’
이어서 채도는 뒤에 맡기고 서백은 선봉에서 전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면 후미에서 따라오던 송현이 검으로 채도의 목을 꿰뚫었다.
쿡. 키에엑…….
단 한 번의 검격. 일검일살(一劍一殺).
간혹 쓰러진 채도가 서백을 향해 입을 활짝 벌리고 혈선충을 내뿜었다.
쐐애애액.
서백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검을 비스듬히 틀어서 혈선충을 막았다. 혈선충 다발은 어른 손바닥을 두 개 합쳐 놓은 검면에 부딪쳐서 막혔다.
왜 자기 체구보다 큰 대검을 쓰는지 똑똑히 알 수 있는 장면.
사정거리를 넓혀 주는 긴 검날, 동시에 방패처럼 쓸 수 있는 검면 때문에 망자는 서백에게 접근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무한정으로 내력이 솟아나는 석가심결.
지금 탈출조를 이끄는 것은 선봉의 서백과 후미의 송현 둘뿐.
그러나 그 이인(二人)은 어둠 속에서 급습하는 망자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쾌속으로 탈출로를 뚫는 것이었다.
서백 일행이 활로를 뚫자 처음 따라오던 살수 몇 명 말고 다른 살수들도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넘는 살수들 중 채도들에게 당하지 않고 몸을 빼낸 자들은 고작 십여 명뿐.
그나마 채도들한테 당한 살수들이 바닥에 뒹구느라 병목현상을 일으켜서 복도가 일시적으로 막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복도가 아니라 사방이 트인 곳이었다면 채도들한테 포위당해서 이미 전멸하고도 남았을 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살수들은 서백 일행의 뒤를 따라서 정신없이 달렸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서백 앞에 계단이 나오자 송현이 생각지도 못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아래.”
서백이 검을 비껴 세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무작정 서백을 따라가던 왕이삼은 멈칫거리며 발을 멈췄다.
-아래? 방주 밑으로 내려가라고?
아니나 다를까 뒤따라오던 살수들도 의문을 품었는지 물었다.
“아래로? 지금 계단 밑으로 내려가자는 거냐?”
“그렇소.”
송현의 대답은 여느 때처럼 무심했다.
“방주를 나가려면 갑판 쪽 위로 올라가야지 아래로 가면 어떡하냐?”
“누가 당신들더러 따라오라고 명령이라도 했소?”
“…….”
“우리는 아래로 갈 테니 좋을 대로 하시오.”
살수들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왕이삼도 송현의 탈출로 확보를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송현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할 수 없이 서백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는 십여 명의 살수들이 때 아닌 갑론을박 논쟁을 벌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다.”
“무공은 제법이다만 명령까지 들을 필요는 없잖아?”
“나는 갑판으로 올라가겠다. 일단 목숨부터 살고 봐야지, 망자가 된 다음에 포상금을 받아서 뭐에 쓰냐?”
“옳은 말이군.”
그 말에 살수들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살수들 대부분이 서백과는 반대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반면 서백 일행을 따라 계단을 내려오는 살수들도 몇몇 있었다. 올라간 자들의 사분지일밖에 안 되는 숫자이긴 했지만.
서백 일행을 따라온 살수들은 도화광을 포함해서 모두 네 명이었다.
그들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왕이삼이 물었다.
“네놈들은 도망 안 가냐?”
“지금 도망가는 중인데?”
도화광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더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저 병신 놈들보다 꼬마 놈 따라가는 게 더 안전할 거 같아서 말야.”
“눈깔 하난 제대로 박혔군.”
“무림 밥을 먹고 살려면 눈썰미가 있어야지.”
도화광은 잔인한 흑도지만 그 말에는 왕이삼도 동감이었다.
서백과 송현. 세상에 둘도 없는 괴이한 이인.
그러나 왕가 요새에서부터 제갈세가에 이르기까지 둘이 보인 활약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맡기기에 아깝지 않았다.
서백은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방주 구조는 송 선배가 오는 동안 조사했을 터.’
작전은 송현에게 맡기고 자신은 탈출로를 뚫는 데 전념한다는 게 서백의 생각이었다.
계속해서 송현은 후미에서 방향을 지시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일행은 방주의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살수들한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혹시 저놈도 망자 아냐?”
“망자?”
“우리를 일부러 끌어들인 다음 함정으로 몰아넣으려는 속셈 아니냐고?”
“설마 이 와중에 그런 술책을 쓰겠냐.”
말은 그렇게 해도 살수들의 마음속에는 송현에 대한 의심이 싹텄다.
급기야 일행이 당도한 곳은 방주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선창이었다.
“제길, 여긴 선창이잖아? 앞뒤가 막힌 꼴이니 이제 어떡할래?”
뜻밖에도 왕이삼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목숨을 맡겼으면 끝까지 믿어 보라고.”
“…….”
왕이삼이 호언장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서백 일행은 서생을 찾기 위해 선창에 온 다음 천정을 뚫고 서생의 방으로 잠입했다.
왕이삼은 송현이 그때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탈출로를 잡은 거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두고 봐라. 우리 일행이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
아니나 다를까 송현은 먼저 잠입했던 장소로 가더니 천정에 뚫은 판을 검으로 빼냈다.
“들어갑니다.”
서백이 구멍 위로 몸을 날렸다.
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석가심결을 시전한 서백의 두 눈은 구석구석을 재빨리 확인했다.
“이상 없습니다.”
서백이 신호하자 왕이삼을 시작으로 한 명씩 몸을 날려서 구멍 위로 올라갔다.
선창 입구 쪽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도들이 어느새 뒤쫓아 온 것이다.
키에에엑…….
송현이 잘라낸 바닥을 다시 끼우자 짐승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살수들은 그제야 송현의 심계를 깨닫고 내심 감탄했다.
-검법만 아니라 머리 쓰는 것도 번개처럼 빠른 놈이군.
채도들은 선창을 샅샅이 뒤질 테지만 도주하는 일행을 발견하지 못하리라.
처음 선창에 내려올 때는 스스로 함정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들이 막다른 곳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셈이니까.
천정에 구멍을 뚫고 위로 올라왔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병법에 능통한 책사도 쉽게 파훼하지 못할 심계인데 하물며 상대가 망자들이니!
살수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서백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망자 떼를 따돌리려면 더 좋은 길도 있었다. 일부러 이쪽으로 온 것은 필시 어떤 이유가 있을 터.’
서백의 짐작은 정확했다.
일행이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송현은 서백에게 계단이 아닌 다른 방향을 지시했다.
물론 서백은 지시대로 선봉을 섰다.
게다가 선창에 내려갈 때만 해도 불만을 토로하던 살수들도 아무 말 없이 일행을 따라왔다. 잘은 몰라도 송현이 또 어떤 심계가 있으려니 하고 맡겨 두게 된 것이다.
상황이 끝나면 마수를 드러내겠지만, 잠시나마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살수들까지 동행으로 만들어 버린 서백과 송현.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이인!
어딘가에서 비명소리와 짐승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계단을 올라간 살수들이 채도들한테 당하는 소리이리라.
일행은 서백의 선봉과 송현의 지시에 따라 거침없이 복도를 이동했다.
그런데 서백이 계단에 당도했을 때, 송현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시를 내렸다.
“정지.”
-정지라고?
살수들은 물론 왕이삼마저 송현의 뜻을 몰라 서로를 돌아봤다.
성미 급한 도화광이 물었다.
“여기서 계단 두 번만 더 올라가면 방주의 선미로 나간다. 그런데 갑자기 정지라니 뭐하자는 거냐?”
“확인할 게 있소.”
살수들이 영문을 몰라할 때 송현이 검을 뽑았다.
스릉. 시커멓게 변색된 검날이 나왔다.
네 명의 살수들이 싸늘한 눈빛을 하고 각자 손을 병장기로 가져갔다. 송현의 공격에 대비해서 선수를 치려는 태세.
그러나 송현은 예의 무심하게 말했다.
“지금은 싸울 생각이 없으니 검을 치우시오.”
“…….”
그 말이 옳았다.
지금은 정파든 사파든 힘을 합쳐서 일단 방주를 탈출하고 볼 때. 괜히 서로 싸우다가 쪽수가 줄어들면 망자 좋은 일만 시키는 꼴 아닌가?
-그럼 검은 왜 뽑은 거지?
살수들이 궁금해하고 있을 때, 송현이 검기를 운용한 다음 검을 들어 천정에 박았다. 이어서 검을 움직이며 천정에 네모를 그리기 시작했다.
왕이삼은 서생 방에 잠입할 때와 같은 수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살수들에게 설명했다.
“천정에 구멍을 내고 위로 올라가려는 거다.”
“호오…….”
살수들이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사실 살수들은 왕이삼이 설명하기 전에 송현이 검기를 띄운 것을 보고 이미 만만치 않은 놈이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삼은 살수들의 반응을 보고 자만심이 생겼다.
‘흑도 놈들아, 검기 처음 보냐?’
“물러서시오.”
그 말에 서백과 살수들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서백은 당연히 송현의 지시에 따른 것이지만 살수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문이나 상자를 열 때 암기와 기관장치가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반면 왕이삼은 한두 발짝 물러나는 둥 마는 둥 했다. 살수들이 서백과 송현에게 연이어 감탄하는 것을 보자 괜한 허세가 생겼던 것이다.
“잘 봐라. 저렇게 구멍을 뚫은 다음 잠입을…….”
그때 송현이 검을 뽑자 갈라진 천정이 쑥 빠졌다.
순간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액체가 폭포수처럼 왕이삼의 위로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온통 시뻘건 액체는 물이 아니라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