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방주 탈출(2)
왕이삼은 입을 딱 벌리며 경악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코웃음을 치며 서백의 말을 웃어넘겼으리라.
하지만 왕이삼은 그러지 못했다.
지금까지 서백이 망자에 대해서 헛소리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왕이삼이 놀라든 말든 서백과 송현은 무심하게 대화를 계속했다.
“이제 서생은 문제도 아니군요.”
“수로채는 전부 감염되었을 테고 흑도 무리도 어떤 자가 감염되었을지 모른다.”
“식사가 끝나면 한바탕 살겁이 벌어지겠군요.”
“물론.”
“흑도 무리는 저를 노리고 방주에 탄 자들입니다.”
“아닌 자가 하나둘쯤 있을지도 모르지.”
“없을걸요. 그래도 일단 얘기는 해 두겠습니다.”
서백이 몸을 돌려서 살수들을 향해 말했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십시오.”
“뭐냐?”
안 그래도 서백 일행이 대화를 나누는 잠깐 사이에 몸이 근질거렸는지 살수 하나가 거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수로채는 망자로 가득합니다. 채주와 채도들 전부.”
“뭐라고?”
서백의 말에 여유만만하던 살수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서백은 자신이 추리한 것과 송현이 알아 낸 정보를 더해서 나온 결론을 설명했다.
“수로채의 인원 전부는 망자입니다. 방주가 떠나기 전에 이미 망자였는지, 아니면 방주에서 망자에게 감염됐는지는 모릅니다만 현 상황에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잘린 목을 떼어 낸 뒤 핏물을 흡수했을 겁니다. 오늘 밤 채도들이 보이지 않는 건 그 때문입니다.”
“망자들은 피를 흡수하면 전신이 붉게 변하며 용력이 높아집니다.”
“생전에 무림인이었던 망자는 내공이 일시적으로 높아질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서백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복도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에 빠졌다.
그러나 서백의 말을 믿지 못하는지 코웃음을 치는 살수가 나왔다.
“하! 망자가 피를 흡수해서 내공을 높인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나도 망자가 되겠다. 공짜로 흡성신공을 익히는 셈이 아니냐?”
그 말에 다른 살수들도 맞장구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라, 망자가 되면 흡성신공이 따라온다고? 졸지에 강호 최고수가 되겠는걸!”
“와하하하!”
살수들이 비웃었지만 서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던 일.
망자의 무서움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하물며 세상 두려울 게 없이 살아온 흑도 무리가 오죽하겠는가.
서백과 송현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을 듣지 않는군요. 기대도 안했습니다.
-내버려 두고 탈출로를 찾자.
둘은 귓속말도 전음도 하지 않고 눈빛만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때 살수 하나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복도 모퉁이에서 수로채의 채도들이 환도를 들고 몰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멈칫했던 살수는 곧바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손님 오셨으니까 숙수는 칼 갈아라!”
방해꾼이 나타났으니 해치우자는 흑화.
“이런, 귀찮게 됐는걸.”
“그러게 말야. 이제 방주는 누가 몰지?”
“알게 뭐냐. 어차피 숙주에서 다 내릴 거면서, 크흐흐!”
따로 약속한 적은 없지만 살수들의 생각은 동일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수로채든 뭐든 몽땅 죽이고 꼬마를 잡자!
흑도나 사파의 무공은 명문정파와 크게 다르다.
명문정파에도 사람의 급소를 노리는 비정한 초식은 존재한다. 하지만 신체 건강과 정신 수양을 강조하고 무의미한 살상은 피하는 무공이 많다.
그러나 흑도와 사파의 무공은 살초(殺招) 일변도다.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한 수법만 존재하는 것이 살수의 무공!
살수들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기이하게 생긴 애병을 꺼내들었다.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한 기형도들.
반면 채도들의 병장기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환도 일색.
그걸 본 살수들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이번 요리는 너무 싱겁겠는데?”
“알게 뭐냐. 배고프면 식은 요리도 맛있게 먹어야지!”
“크하하하, 맞는 말이다!”
살수들이 애병을 들고 채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채도 하나가 환도를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다음 수직으로 내려쳤다.
기세는 대단하지만 일직선으로 베는 단순한 초식.
선두에 선 살수가 기형도를 들어서 환도를 막았다.
“크크크! 그걸 초식이라고…….”
채도의 환도와 살수의 기형도가 맞부딪치는 찰나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까앙!
순간 살수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
살수는 손아귀 호구가 저릿저릿해서 그만 기형도를 놓칠 뻔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팔 근육이 쥐가 날 것처럼 비명을 질렀고 두 다리는 후들거리며 휘청댔다.
실로 엄청난 용력.
문득 살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채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망자는 피를 흡수하면 전신이 붉게 변하며 용력이 높아집니다.
방금 전에 서백이 했던 말.
“피를 흡수해서 내공을 높인다고? 말도 안 되는…….”
살수는 눈앞의 현실을 애써 부정했다.
그리고 사태를 빨리 파악 못 하는 우유부단함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채도가 재차 환도를 내려찍자 살수는 기형도를 들어서 막았다. 그러나 환도는 기형도를 종잇장처럼 갈라 버린 뒤 살수의 어깻죽지에 박혔다.
깡. 콰직.
엄청난 내력이 실린 환도는 살수의 어깨를 파고들어서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른 뒤 옆구리로 빠져나왔다.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살수의 몸통이 두 쪽이 나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일검을 본 살수들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
기형도와 사람 몸통을 일검으로 두 동강 낸다고?
그야말로 엄청난 용력!
채도의 검격이 신호인 것처럼, 나머지 채도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살수들을 향해 미친 듯이 환도를 휘둘렀다.
케에에에엑.
살수들은 정신을 차리고 채도들의 검격을 방어했지만 역공은커녕 수비하는 것도 쩔쩔맸다.
깡깡깡깡깡.
채도들의 수법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환도를 높이 들어서 수직으로 내려치는 수법.
생전 처음 검을 잡은 신출내기가 스승한테 처음으로 배우는 초식.
그런데 그 초식, 아니, 초식이라고 할 수 없는 단순무식한 베기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환도와 기형도가 부딪칠 때마다 애병을 놓칠 정도로 환도에 실린 내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려치기의 속도마저 점점 빨라졌으니…….
그러나 살수들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내력과 속도는 엄청났지만 수직 베기 일변도인 채도들의 공세를 뚫고 역공을 가하는 살수들이 나왔다.
살수 하나가 톱날 모양의 기형도를 휘두르자 채도의 뱃가죽이 갈라져서 내장이 쏟아졌다.
촤악. 후두두둑.
이런 수법은 흑도 무리가 즐겨 쓰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손속이 잔인한 것을 보여 줌으로써 상대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수법.
그런데 살수가 놓친 게 있었다.
망자는 이미 죽은 시체라는 것!
채도는 뱃속에서 바닥까지 늘어진 내장을 질질 끌면서 전진했다.
“뭐 이런 괴물이……!”
살수는 정신을 차리고 기형도를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채도가 검을 맞든 말든 그대로 달려들어서 살수의 배에 환도를 쑤셔 넣었던 것이다.
푸욱. 끄어억…….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계속해서 전진하는 채도들.
결국 살수들은 엄청난 내력이 실린 환도를 당해 내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아아아악…….
그나마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살수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소리쳤다.
“이놈들은 검이 안 통한다! 도망쳐!”
하지만 좁은 복도가 꽉 들어차도록 빽빽이 몰려 있는 바람에 피할 곳이 없었다.
서백을 노리고 한꺼번에 몰려나온 것이 그들의 불운.
“저리 비켜! 비키라고!”
“젠장, 비킬 데가 어디 있다고 지랄이야?”
“싸울 거면 네놈이 싸워라! 빨리 비키라고… 아아악…….”
흑도 무공의 장점이 사라지자 싸움은 일방적인 학살로 바뀌었다. 서백 쪽에서 보면 후미에 있는 살수들부터 무차별로 환도에 당해서 쓰러졌다.
설상가상으로 도망치기에 급급한 살수들이 서로 밀치다가 우르르 넘어졌다. 채도들이 그 위를 덮치고 환도를 내리찍었다.
비명과 난도질이 뒤섞인 아수라장.
서백이 송현에게 말했다.
“피를 흡수한 망자들이 효력이 떨어질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일단 후퇴하자.”
서백은 지옥도를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도움이라면 이미 충분히 조언해 줬으니까. 저들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일 뿐.
왕이삼도 굳이 참견하지 않고 서백을 따랐다.
무림밥을 오래 먹은 왕이삼은 싸울 때와 도망칠 때를 잘 알았다. 지금은 후자였다. 그걸 잘 구분하는 것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
방금까지 서백을 잡으려던 살수가 서백 일행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도움을 청했다.
“같이 가!”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발을 거는 바람에 살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우당탕탕.
“이런! 훌륭한 나려타곤이잖아?”
살수가 쓰러지는 바람에 공간이 생기자 누군가가 얼른 인파 속에서 나왔다.
얼굴에 진한 연분홍색 화장을 한 남자.
바로 도화광이었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서 옆에 있던 살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커억! 네놈 대체 왜 같은 편을…….”
“이 새끼 웃기네. 너랑 나랑 언제 봤다고 같은 편이냐?”
도화광은 호흡이 막혀서 주춤거리는 살수를 발로 찼다.
그러자 살수는 채도들을 향해 벌렁 넘어졌고, 도화광은 그 틈을 타서 인파를 뚫고 서백 일행이 도주하고 있는 안전지대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채도들 한가운데로 넘어진 살수는 도마에 오른 생선처럼 난도질당했다.
퍼퍼퍽. 아아악!
도화광뿐 아니라 눈치 빠른 살수 몇 명이 인파를 빠져나와 서백 일행을 뒤따라왔다.
상대는 망자. 정체도 능력도 불분명한 괴물들.
괜히 상대하기보다는 다른 살수들과 싸우다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며 기회를 본다.
아니, 살수들이 망자들에게 도륙당하면 그건 그거대로 좋다. 용정객잔으로 서백을 잡아갈 경쟁자가 줄어드는 셈이 아닌가!
살수들이 뒤에 붙자 송현이 후미로 빠지면서 서백에게 말했다.
“망자가 있으니 당장은 괜찮겠지만 저들이 어떤 술책을 꾸밀지 모른다. 내가 후미를 맡을 테니 선봉에 서라.”
“네.”
서백이 세 걸음 빠르게 전진했다.
석가심결 시전.
팟.
불빛 한 점 없는 복도가 서백의 시야에 대낮처럼 환하게 들어왔다.
“저기 후배, 나는 뭘 할까?”
“제 뒤에 바싹 붙으십시오.”
“그거야 쉽지.”
자기보다 키도 덩치도 작은 서백에게 선봉을 양보했지만 왕이삼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자존심? 일단 목숨을 건진 다음에 챙길 문제.
서백은 검끝으로 바닥을 끌며 빠르게 전진했고 일행은 뒤를 따라갔다. 그 뒤에서는 도화광을 비롯한 살수 몇이 서백 일행을 좇아서 달려왔다.
복도 모퉁이를 도는 순간 채도 하나가 튀어나왔다.
키에에엑!
채도가 환도를 높이 치켜들었지만 서백은 검을 들어서 방어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닥에 끌리도록 낮추고 있던 검의 방향을 돌려서 채도의 발목을 베어 버렸다.
썩둑.
물론 비명소리도, 고통으로 인한 동작 멈춤도 없었다. 망자니까.
그러나 그게 서백의 노림수였다.
채도는 발목이 잘린 채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발바닥이 아니라 잘린 발목의 단면으로 바닥을 디뎠다. 졸지에 절름발이가 된 채도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당탕탕.
‘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