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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72화 (72/123)

72화 방주 탈출(1)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박도를 들었다.

‘빌어먹을! 후배 놈은 필요할 때면 꼭 없단 말야.’

그때 살수들의 뒤에서 다시 한번 스윽 하고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왕이삼은 먼저와 달리 그림자를 보고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대체 어떻게…….”

살수들은 왕이삼이 일부러 딴청을 피워서 뒤를 돌아보도록 연기를 하는 줄 알고 코웃음을 쳤다.

“흥! 어디서 세 살배기 어린애도 당하지 않을 수작을 부리는 거냐?”

그러나 왕이삼은 임기응변의 계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가 놀란 것은 정말이었다.

방금 살수들의 난도질로 쓰러진 채도가 어느새 다시 일어선 것이 아닌가?

그제야 왕이삼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망자다!”

왕이삼이 검지를 들어서 뒤를 가리키자 살수들은 비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크크크! 그래, 한 번은 속아 주지. 아무것도 없으면 네놈은…….”

순간 킬킬거리며 뒤를 돌아보던 살수들의 표정이 왕이삼처럼 얼어붙었다.

크르르르.

채도가 입술을 말아올려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짐승처럼 목울대를 그르렁거렸다.

“방금 죽은 놈이 어떻게……?”

살수들이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있는 찰나 채도가 입을 쫙 벌리며 앞에 있는 살수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콰직.

“아아악!”

채도가, 아니, 망자가 턱을 홱 젖혀서 살수의 목덜미 살점을 크게 물어뜯자 동맥이 끊어져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악.

복도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망자는 멈추지 않고 옆에 있는 살수한테 달려들었다. 살수가 반사적으로 검을 찔러서 망자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써억. 살수가 내지른 검날이 망자의 가슴 한복판을 관통해서 뒤로 빠져나왔다.

산 사람이라면 심장을 관통당해서 선 채로 즉사해야 될 검격.

그러나 망자는 죽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죽은 시체니까…….

망자는 가슴이 검에 꿰인 채로 달려들어서 살수의 손목을 덥썩 물었다. 그리고 먼저처럼 살점을 크게 한 입 물어뜯었다.

“크윽!”

목과 손목 모두 사람 신체에서 중요 혈관이 지나는 곳이다. 목만큼은 아니지만 물어뜯긴 살수의 손목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살수가 세 명 중 마지막 살수를 향해 고개를 돌린 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크어어엉.

살수 두 명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세 번째 살수는 오히려 여유만만했다.

망자한테 당한 둘은 어차피 자신과 친우도 동료도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였다.

오히려 둘이 망자한테 당하는 바람에 망자 상대법을 알게 되어 감사할 따름.

“물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거지?”

망자가 달려드는 순간 살수는 손바닥을 수직으로 세워서 망자의 턱을 쳤다.

으드득. 망자의 턱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직접 타격보다는 뇌진탕 충격을 줄 때 사용하는 금나수 수법의 일종.

물론 망자가 뇌진탕을 당할 리 없다. 하지만 후속타를 넣기에는 충분한 시간.

촤아악. 살수가 다른 손에 든 검으로 망자의 목을 베어 버렸다.

“물어뜯기는 게 무서우면 목을 베면 그만이지.”

살수가 여유롭게 말했다.

그러나 사람 목을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살수의 무공도 망자의 특성을 모르는 한 만용에 지나지 않았다.

잘린 목이 허공에 떠오른 채 입을 떡 벌리더니 살수의 얼굴을 향해 혈선충 다발을 뿜어냈던 것이다.

쐐애애액.

멋지게 망자의 목을 베고 검을 검집에 넣던 살수는 기상천외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다.

혈선충 다발이 물고기를 낚아채는 문어발처럼 뻗어와서 살수의 얼굴을 칭칭 얽어맸다.

휘리리릭.

“크윽! 뭐 이런 괴물이…….”

살수가 다시 검을 뽑았지만 때는 늦었다.

잘린 목이 살수의 얼굴을 쭉 잡아당긴 뒤 목덜미를 깨물었다.

콰드득.

살수가 검으로 난도질을 했지만 잘린 목은 한번 닫히면 절대 열리지 않는 사냥덫처럼 턱을 벌리지 않았다.

“이거 놔라, 괴물아…….”

잘린 목은 삽시간에 피범벅이 되면서도 살수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결국 어느 순간 살수가 전신을 경련하더니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망자의 이빨에 혈관이 끊어진 것이었다.

꽤 실력 있는 살수 셋이 망자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하고 죽었다.

그제야 잘린 목이 턱을 벌려서 박힌 이빨을 뽑았다. 그리고 눈알을 뒹굴 굴려서 왕이삼을 쳐다봤다.

왕이삼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박도를 치켜들었다.

눈앞에서 죽은 살수 셋은 자신보다 결코 무공이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살수들보다 더 나은 점이 있었다.

망자를 이미 상대해 봐서 대비책을 안다는 것.

일단 망자는 목이 잘린 상태이니 몸통에 다시 붙이기 전에는 행동에 제약이 있다. 그렇다면 잘린 목이 뿜어내는 혈선충 공격만 막아 내면 될 터.

왕이삼은 박도를 수직으로 치켜들고 검날을 정면으로 향하게 했다.

망자가 혈선충을 뿜어내면 검날로 막으려는 태세.

그때였다. 복도 멀리에서 인영 하나가 순식간에 날아오더니 잘린 목 위에다 검을 꽂았다.

콰직. 꾸웨에엑……!

잘린 목은 비명을 토하며 요동을 쳤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검이 목구멍을 수직으로 관통해서 바닥에 박혔던 것이다.

왕이삼은 멍하니 잘린 목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화살처럼 날아와서 망자에게 검을 박은 자는 다름 아닌 송현이었다.

“서백은?”

“아직 안 왔소.”

송현이 오자 내심 안심하던 왕이삼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송현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리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송현이 잘린 목에서 검을 뽑았다. 스윽. 목을 관통해서 방주 바닥에 박혔던 검이 두부에서 뽑는 것처럼 쉽게 빠졌다.

송현이 혈선충의 심맥을 꿰뚫었기 때문에 잘린 목은 더 이상 꿈틀대지 않았다.

바닥에는 망자에게 물어뜯긴 살수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송현이 그중 하나의 목에 검을 꽂았다.

푹. 끄어억…….

살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가 절명했다. 송현은 다음 살수의 목에도 검을 꽂았다.

송현이 삽시간에 살수 둘의 목숨을 앗아가자 마지막 남은 살수가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다른 살수 둘은 목의 동맥이 끊어졌지만 그는 손목을 물렸기 때문에 아직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네놈 대체 뭐냐? 사람을 마구 죽이다니…….”

“사람을 마구 죽이는 건 당신들이지. 여기는 왜 온 거요?”

“그건…….”

살수는 대답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도 살수 일을 하러 온 판에 남이 살겁을 벌인다고 해서 따질 수는 없지 않은가?

“둘은 어차피 망자에게 물렸으니 혈선충에 감염되어 망자가 될 것이오. 살릴 방법은 없소.”

“그, 그런 거였냐?”

“그렇소.”

송현의 대답에 안심한 것도 잠시.

“당신도 망자에게 물렸소.”

“나, 나는 괜찮다! 그냥 손목을 물렸을 뿐…….”

“목이든 손목이든 마찬가지요.”

송현이 검을 뻗어서 살수의 목을 찔렀다.

둘은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송현의 팔이 고무줄처럼 늘어난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새 살수의 목을 찌르고 검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왕이삼은 그걸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갈세가에서도 느꼈지만 송현의 검법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귀기(鬼氣)가 서려 있었다.

“이 셋은 혈선충의 심맥이 자리할 곳을 베었으니 망자로 변하지 않을 거요.”

“잘했소…….”

지금 왕이삼이 할 말이라고는 맞장구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때 송현이 왔던 방향과 반대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왕이삼은 재차 긴장했지만 그림자의 걸음걸이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배! 왜 이제야 오는 거냐?”

“늦어서 죄송합니다. 잠시 일이 있어서요.”

그림자는 서백이었다.

서생이 어디 있는지 탐색하러 헤어졌던 서백, 송현, 왕이삼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서백은 피칠갑이 된 복도와 바닥에 쓰러진 살수들을 보더니 전후사정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망자입니까?”

“그렇다.”

서백도 그렇지만 송현의 대답도 태연했다. 왕이삼은 둘의 무심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서생, 아니면 숨어 있는 다른 망자가 무림인들을 망자로 감염시키고 있군요.”

그런데 서백의 말에 송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안 좋다.”

“어떻게 말입니까?”

서백이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복도에 늘어선 방에서 무림인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나왔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복도 양쪽에서도 다른 층의 무림인들이 서백의 방을 향해 몰려왔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을 통 못 자겠네!”

말은 그렇지만 무림인들 누구 하나 잠을 자고 있던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유심히 상황을 살피는 눈빛.

방주에 타고 있는 모든 무림인들, 아니, 살수들이 서백의 방으로 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 중 누구도 피칠갑이 된 복도를 보고 놀라거나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서백이 그 사실을 놓칠 리 없었다.

‘이런. 몽땅 나를 노리고 방주에 탄 자들이었나?’

서백의 짐작은 정확했다.

흑점 객잔에서 직접 정보를 들은 자들, 또는 거기서 퍼진 정보를 전해들은 자들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흑점 객잔에서 서로 싸우지 말자고 약속했던 살수들.

도화광 같은 자들이 암암리에 경쟁자들을 제거했지만 그동안 대규모 살겁은 벌어지지 않았다. 흑도 무리치고 지금까지 싸움이 벌어지지 않은 것도 신기한 일.

이제 방주가 숙주에 도착할 때가 되니 살수들이 마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미묘했다.

그들의 목적인 서백이 눈앞에 있었지만 누구 하나 검을 뽑지 않은 채 주저하고 있었다.

살수들의 생각은 동일했다.

-지금 꼬마를 먼저 잡는 놈이 손해다.

서백을 먼저 잡는 자는 인질을 빼앗으려는 다른 살수들의 공동 표적이 될 게 뻔하다. 그럴 경우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 될 터.

즉 서백을 가장 뒤늦게 잡아서 용정객잔으로 끌고가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

때문에 살수들은 서로 눈치를 볼 뿐 누가 먼저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서백은 그것 역시 눈치 챘다.

‘재미있군. 다들 경쟁자인 셈이라 누가 하나 검을 뽑지 못하는 건가?’

서백이 송현에게 아까 듣지 못한 질문을 했다.

“상황이 어떻게 안 좋습니까?”

“경비 서는 채도가 아무도 없다. 채주실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 다들 한곳에 모여 있는 거다.”

“그건 심각하군요.”

송현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서백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서백의 표정은 예의 태연하기 그지없어서 왕이삼은 둘이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깐. 채도들이 경비 안 서는 게 문제라고? 어디 가서 단체로 농땡이를 치고 있나 보지.”

그러자 송현도 팔짱을 끼더니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군. 수로채는 지금 한데 모여 있을 거요.”

“식사를 하는 중이군요.”

그 말에 왕이삼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식사? 뱃일 하느라 허기진데 야식 좀 먹는 게 무슨 대수냐?”

“그런 식사가 아닙니다. 망자의 식사입니다.”

“뭐라고?”

“술시 이후에 나오지 말라는 경고, 밤에 찾아볼 수 없는 채도들, 모두 식사 시간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식사 시간?”

“네.”

무심하던 서백의 눈빛과 목소리가 어느새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망자들은 식사 시간에 방해 받는 걸 꺼려합니다. 핏물에 담글 수 있도록 목을 떼어 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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