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운하풍운(5)
살수들은 또한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소림사행 인물이 약관도 안 된 소년이라고 얕본 것이 가장 큰 실수라는 것이었다.
명문정파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약관이 안 된 나이에 일류 수준을 뛰어넘는 신진고수가 종종 등장한다.
살수들은 서백 역시 그런 고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그렇다면… 손속에 정을 두지 말아야 한다!
약관도 안 된 신진고수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제가 틀렸습니다. 네 분이 아니라 세 분이 맞군요. 방금 한 명 가셨으니까 말입니다.”
“꼬마야, 제법 하는구나.”
“험한 무림에서 살아남으려면 밥값은 해야죠.”
“다시는 밥을 못 먹고 평생 죽만 먹도록 만들어 주마!”
잠시 서백의 계략에 넘어가서 서로 눈치를 봤던 살수들.
서백이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걸 깨닫자 셋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합을 맞추기로 했다.
처처척.
가운데 선 살수를 중심으로 다른 살수 둘이 좌우 양옆으로 이동했다.
셋이 서백의 삼면을 포위한 다음 동시에 공격하려는 수법.
그러나 서백은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문파도 아니고 친우도 아닐 테니 어설픈 합격진이겠군요. 차라리 그냥 싸우시는 게 낫겠습니다.”
“죽여라… 아니, 죽이진 말고 붙잡아라!”
살수 셋이 세 방향에서 서백에게 달려들었다.
셋의 병장기는 각각 이랬다.
끝에 낫을 매달아서 휘두르는 사슬낫.
양손에 길고 구부러진 꼬챙이를 부착한 갈퀴발톱.
검날이 짐승의 이빨처럼 삐죽삐죽 요철이 나 있는 톱날검.
모두 적의 의복이나 병장기를 얽어매서 봉쇄하는 데 최적화된 병장기들.
그러나 살수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석가장의 비전 무공인 석가심결과 석가검법은 바로 망자 떼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 만들어진 무공이라는 점이었다.
수백 수천의 망자 떼도 뚫어 버리고 중원 땅에 도달한 서백.
그런데 고작 살수 셋이 포위망이랍시고 어설프게 합격진을 펼쳤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
팟. 휘이이잉.
한 줄기의 질풍이 불어서 살수들의 머리칼을 흩날리는 찰나, 직경이 일 장을 넘는 반원의 검광이 선창에 번쩍였다.
이어서 살수 셋의 잘린 목이 허공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투두둑. 데구르르.
“대단치 않은 분들이었군.”
서백은 무심하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사슬낫, 갈귀발톱, 톱날검.
언뜻 봐서는 위험천만한 흑도 무리의 병장기.
특이한 병장기는 물론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겉으로 봐서 흉측한 병장기는 실제 위력과는 정반대의 쓰임새가 있다.
바로 적에게 겁을 주는 효과.
괴이한 병장기를 본 무림인은 저기에 당하면 몸이 갈가리 찢어질 것을 두려워해서 손발이 굳어 버린다.
흑도 무리가 노리는 점이 그것이다.
동시에 괴이한 병장기는 큰 약점이 있었다.
고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
“맞지도 않은 병장기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즉 살수들의 병장기는 자기보다 약한 하수들을 상대할 때나 위력이 있는 것이다.
진정한 고수는 병장기의 생김새로 상대를 위협하지 않는다. 정말 독특한 병장기라면 오히려 철저히 숨겨놓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꺼내드는 법.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 살수들은 피라미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진흙탕에서 미꾸라지만 살라는 법은 없으니까.
문제는 소림사행 인물에 대한 정보가 어디까지 퍼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남궁세가도 제갈혁처럼 서백이 소림사에 전할 정보를 갈취할 생각이리라.
숙주는 남궁세가로 향하는 길목 도시.
지금까지 정체를 숨긴 채 도사리고 있던 흑도 무리가 하나씩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이제 서생이 문제가 아니었다.
방주에 탄 무림인들 중 믿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니까.
선창은 그나마 공간이 있었지만 방주의 다른 곳은 비좁다. 좁은 복도에서 적과 마주칠 경우 대검이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서백은 등에 멘 걸이에 검을 건 뒤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하나씩 오든 한꺼번에 오든 좋을 대로 하시지.”
소림사로 가는 길을 막는 자는 모두 벨 테니까.
서백은 어디서 적이 나타나든 대처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춘 채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선창을 떠났다.
* * *
복도의 어둠 속을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바로 송현이었다.
송현의 목표는 서생이 채주실을 노리는지 확인하는 것.
채주실은 방주의 선미에 있었다. 이제 계단 하나만 더 올라가면 채주실이 나오리라.
그런데 막 계단을 오르던 송현은 발을 멈췄다.
‘이상하군.’
채주실은 방주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다. 하지만 채주실 코앞까지 왔는데도 경비를 서는 채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채주는 술시 이후에 방에서 나오는 자는 방주에서 추방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현재 그 경고가 무색할 정도였다.
아니, 마치 일부러 경비를 소홀히 하는 듯한 느낌.
그게 아니라면…….
‘경비가 아예 없는 건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채도들의 숫자가 적어서 경비가 소홀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채도들이 모두 다른 곳에 있다면?
송현은 소리 없이 계단을 올라가서 머리를 위로 내밀었다. 그러나 경비를 서는 채도들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리만큼 적막에 휩싸인 채주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 방엔 아무도 없다.’
방주에서 가장 큰 채주실.
하지만 송현이 추리한 바로는 채주실은 그것을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좁을 거라 여겨졌다.
‘그것을 하려면… 물을 저장할 수 있는 큰 수조가 필요하겠군.’
만약 추리한 것이 사실이라면 서생이 망자인지 아닌지는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그걸 뛰어넘는 엄청난 일이 터질 테니까.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몸을 돌리자 세 명의 무림인이었다.
“네놈은 그 꼬마랑 같이 다니던 놈 아니냐?”
“…….”
그 꼬마. 서백을 말하는 것일 터.
세 무림인의 표정과 눈빛이 비열하고 흉흉했다.
‘서백을 노리고 방주에 탄 흑도 무리인가?’
그런데 세 명의 차림새가 이상했다.
소매가 삐죽하거나 가슴팍이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온 모습. 암기나 기형도(奇形刀)를 옷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살수들이군.’
“네놈한테는 볼일 없으니 썩 꺼져라.”
아니나 다를까 살수들은 서백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본인한테는 볼일이 없다라. 그럼 서백한테 볼일이 있다는 말이오?”
“꼬마 이름이 서백이었냐? 하여튼 귀찮으니까 꺼지라고.”
“싫다면?”
“뭐?”
“서백은 본인의 동행이오. 동행한테 파리 떼가 꼬이면 쫓아주는 것이 도리일 터.”
송현의 대답이 뜻밖이자 살수들이 서로를 한 차례 돌아보더니 품에서 기병을 꺼내들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면 할 수 없지!”
탓. 살수들이 송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간이 없다. 빨리 처리해야겠군.’
스윽. 송현이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 * *
왕이삼은 측간을 조사했지만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쳇, 아무도 없구만.’
왕이삼은 이왕 측간에 온 김에 시원하게 소변을 본 다음 휘파람을 불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아차차, 채도들!’
채주가 밤에 나오지 말라고 경고했으니 채도들에게 들키면 큰일이었다.
문제는 방주를 한참 돌아다녔는데도 경비를 서는 채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채도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숨든지 피해 가든지 할 것이다. 그런데 당최 보이지가 않으니 자연히 사람의 마음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이거 어디서 숨어서 기회를 보고 있는 거 아냐?’
성격이 화통한 왕이삼은 차라리 채도들에게 걸리면 걸렸지 숨죽인 채 숨어 다니는 것이 더 초조했다.
잔뜩 긴장한 채 복도를 이동한 왕이삼은 한참 뒤에야 방에 도착했다.
‘휴우, 간신히 안 들키고 왔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크!’
화들짝 놀란 왕이삼은 재빨리 방에 뛰어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곧이어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저벅. 그런데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추는 것이 아닌가?
‘들킨 건가?’
그런데 밖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가 이상했다.
“꼬마 방이 여기가 맞단 말이지?”
“맞다니까. 낮에 확인했다고.”
‘꼬마라면 후배밖에 없을 텐데.’
방주에 탄 무림인 중 꼬마라고 불릴 사람은 약관이 안 된 나이인 서백이 유일할 터.
누군지 몰라도 복도에 있는 무림인들은 서백을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이 계속해서 수상했다.
“어이, 숙수. 양각양 잡을 준비는 됐나?”
“진정하라고. 요리는 나중에 하고 오늘은 고기 운반만 하기로 했잖아.”
“참, 그랬었지.”
무림밥을 오래 먹은 왕이삼은 무림인들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저건 흑점에서 암호처럼 쓰는 흑화(黑話)인데.’
양각양(兩脚羊)은 발이 두 개인 양이란 뜻이다.
양각양은 두 발 달린 양, 즉 사람이었다. 두 발 달린 양고기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인육을 뜻하는 흑화였다.
게다가 숙수는 도검수를 뜻하는 말.
숙수가 인육을 요리하려고 한다. 그 말은 살수가 사람을 죽이러 왔다는 뜻!
아니나 다를까 복도에서 살수들이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릉.
‘흑도 놈들이 후배를 노리고 있구나! 제갈세가 놈처럼 후배를 잡아서 정보를 캐내려는 속셈이야!’
평소 그답지 않게 왕이삼의 추리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미 제갈세가에서 똑같은 일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살수들이 서백을 노리는 이유가 남궁세가의 계책 때문이라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 역시 왕이삼다웠다.
머리는 보통 이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뜨거운 사내 왕이삼.
서백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문을 열며 소리쳤다.
“멈춰라, 이 흑도 놈들아!”
짐작대로였다. 서백의 방 앞에 있는 세 명의 무림인은 차림새는 평범하지만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살기를 숨기지 않는 살수들!
“네놈은 뭐냐?”
“나는 후배를 지키는 선배다! 후배한테 손가락 하나도 못 댈 줄 알아라!”
그 말에 살수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말했다.
“여기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
“……!”
그 말을 듣고 왕이삼은 뒤늦게 깨달았다.
서백과 송현은 조사할 장소는 각각 선창과 채주실.
그 둘은 조사할 범위가 넓고 경비도 있을지 몰랐다. 반면 자신이 조사한 측간은… 측간이 경비가 삼엄하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지 않은가?
즉 측간을 조사한 자신이 가장 먼저 돌아왔고 서백은 방에 없는 것이었다.
살수들도 그걸 깨달았는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꼬마 놈은 어디 있냐? 솔직하게 불면 목숨은 살려 주마, 흐흐흐!”
“…….”
왕이삼이 호기롭게 뛰쳐나간 것은 불같은 성정도 한몫했지만 서백과 송현이 동료였기 때문이었다.
명문정파의 고수 뺨치는 무공을 지닌 둘.
그러나 아무리 고수가 둘이라도 자리에 없으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일.
‘아무나 좋으니까 빨리 좀 와라.’
그때 살수들 뒤쪽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왕이삼은 반가운 마음에 말했다.
“이제 왔군! 왜 이렇게 늦었냐?”
살수들도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복도에 있는 자는 서백도 송현도 아니었다. 바로 방주의 채도였다.
순간 살수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밤에 나오지 말라고 한 채주의 경고를 어겼는데 채도한테 발각되었다고?
그럼 당장 해야 할 일은 뻔했다. 살인멸구. 목격자를 없애고 증거를 인멸하는 것.
살수들이 동시에 달려들어서 채도의 가슴과 배에 검을 꽂았다.
푹 푸욱 푹.
끄으윽. 채도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네놈은 죽이지 않고 살려 둘 테니까 걱정 마라. 꼬마 놈이 어디 있는지 불 때까지 말이다.”
살수 셋이 검을 들고 왕이삼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