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질풍무사-70화 (70/123)

70화 운하풍운(4)

“어떤 집단을 망자로 만들려면 두 명을 노리는 게 좋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졸개나 명령을 내리는 두목. 전자는 은밀히 일을 도모할 수 있고 후자는 부하들을 하나씩 불러서 망자로 만들기 쉽기 때문이오.”

확실히 일리 있는 말.

왕이삼은 입을 다물고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흩어져서 각자 서생을 찾은 뒤 방에 모이는 것으로 하겠소. 당신은 측간, 서백은 선창, 본인은 채주실을 맡는 걸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알았소…….”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냄새 나는 측간을 맡게 되자 불만이 생겼다.

“장소를 바꾸면 안 되오? 왜 내가 측간이오?”

“측간이 가장 덜 위험한 곳이오.”

“왜?”

“서생이 망자라면 측간에 갈 이유가 없소. 행여 측간에서 마주친다면 그는 망자가 아니니 볼일을 보러 온 척하면 별일 없을 것이오.”

“아…….”

이번에도 송현의 말이 옳았다.

“선창도 마찬가지군요.”

“그렇지. 망자를 산 자의 피를 마시는데 서생이 음식을 훔쳐 먹고 있다면 망자가 아니라는 증거니까.”

그 말을 듣자 왕이삼은 혹시라도 송현이 장소를 바꿀까 봐 가슴을 치면서 호언장담했다.

“알았소! 측간은 내가 맡지!”

“그럼 저는 먼저 밑으로 내려가겠습니다.”

“방에서 봅시다.”

서백이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내려간 다음 잘라낸 바닥 조각을 위로 밀어 올렸다.

송현은 검으로 바닥을 꿰어서 틈새에 맞추었다. 네모나게 자른 바닥은 빠지지 않고 얼추 고정이 됐다.

“들키지 않을까?”

“서생이 방에 돌아오면 날이 밝자마자 들킬 거요.”

구멍은 방구석에 있어서 일부러 그 위를 지나가지 않는 이상 들킬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바닥에 이상한 틈새가 생긴 것을 못 보고 지나치지는 않으리라.

서생이 평범한 글쟁이가 아닌 이상 반드시.

“바닥을 뚫고 도둑이 들었다니 어이가 없겠군.”

“서생의 뒤를 좇는 것도 중요하지만 채도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하시오.”

“알았소.”

송현과 왕이삼은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둘은 두 방향으로 나눠져서 각자 목표 장소로 이동했다.

* * *

선창에 내려온 서백은 천정을 끼워 넣은 뒤 몸을 돌렸다.

선창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서 서생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음식을 훔쳐 먹고 있을까?

서생 같은 무공 고수가 그렇게 추한 꼴을 보일 리는 없다. 하지만 중원 천지에 기인이사가 어디 하나둘인가?

‘한번 조사해 볼 필요는 있다.’

서생을 찾는다면 그는 망자가 아니라는 뜻.

망자 용의자가 하나 줄어드는 셈이니 시간 낭비는 아니리라.

문제는 아무 흔적 없는 방이었다.

-망자는 흔적을 남긴다.

서백은 스승이 한 말을 떠올렸다.

-망자는 정기적으로 산 자의 피를 흡입해야 한다. 그냥 입으로 마시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목을 떼어 내서 혈선충이 직접 피를 흡수하도록 만든다.

-물론 예외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망자는 그런 습성이 있다는 걸 명심해라.

스승의 말대로라면 방에는 핏물을 받는 그릇 등 피를 흡수했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즉 서생은 망자가 아니라는 얘기.

그렇다고 해도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서생의 방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무림인이라면 반드시 소지해야 할 짐이나 병장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서생이 방주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

방주는 한창 운하를 올라가는 중이다. 낙양에 도착하려면 지금까지 온 것보다 두 배는 더 가야 하리라.

그런데 벌써 방주에서 내린다고?

문득 서백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안으로 숙주를 지나간다고 들었는데?’

숙주는 안휘성의 동쪽에 있는 도시다. 그리고 안휘성은 남궁세가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만약 서생이 방주가 숙주를 지나칠 때 내릴 생각이라면…….

‘남궁세가와 연결되어 있군.’

남궁세가는 중원 오대세가 중 하나로, 제갈세가와 함께 무공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은 계략을 잘 꾸민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제갈세가의 이공자 제갈혁도 소림사행 정보를 얻기 위해 서백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는가?

서백은 제갈세가에 당도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서생은 나를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서백은 생각을 정리해 봤다. 남궁세가에서 소림사행 인물을 잡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서생은 그 일을 맡아서 숙주를 지날 때 방주에서 내릴 것이다.

바로 서백을 인질로 붙잡은 채.

그런데 방에 없다?

이미 어딘가에 은신해서 서백을 훔쳐보고 미행하고 있다는 소리!

그때였다. 선창에서 부스럭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런, 한 발 늦었나.’

서백 일행은 서생을 찾으려 했지만 반대로 그에게 뒤를 잡힌 꼴이 된 것이었다. 그것도 서백, 왕이삼, 송현 셋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최악의 상태로.

‘실수했군.’

그러나 서백은 반대로 피식 미소를 지었다.

명령 수행을 실패할 때마다 스승이 했던 말.

-예상치 못한 실수는 항상 나오는 법.

-실수에 마음이 쫓겨서 허둥대기보다 실수를 크게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실수 따위 만회하고 전진하면 그만이다.’

마침 벽에 불이 꺼져 있는 횃불이 걸려 있었다.

서백은 횃불을 잡은 뒤 화섭자를 꺼내 불을 당겼다.

화르륵. 어두운 선창에서 불빛이 피어올랐다.

서백은 발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서백의 앞에 나타난 자들은 서생이 아니라 세 명의 무림인이었다.

평소 무심하던 서백이 이번은 눈썹을 찡그렸다.

‘또 예상이 빗나갔군.’

소림사행 인물을 노리는 자는 서생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눈앞의 무림인들은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방주를 타고 오는 동안 몇 번 마주친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남궁세가에서 포상금이라도 걸었나?’

소림사행 인물을 노리는 있는 자가 서생 말고 더 있다는 뜻.

‘또 실수했군.’

서백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거듭된 실수를 만회하는 법은 하나였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

세 명의 무림인은 흑점 객잔에서 정보를 얻은 뒤 서백을 노리고 방주에 탄 살수들이었다.

살수들은 숨기지 않고 살기를 드러냈다.

“꼬마야, 네가 소림사로 가는 놈이렷다?”

그 한 마디에 서백은 자신의 추리가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무림맹의 누군가가 소림사행에 대한 정보를 곳곳에 뿌린 게 틀림없다. 이들은 포상금을 노린 흑도의 살수들일 터.’

“우리는 널 데리고 방주에서 내릴 생각이다. 순순히 따라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묵묵부답이던 서백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로 가려는 것입니까?”

“…….”

그 말에 살수들이 멈칫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반성하고 있던 중입니다.”

“뭐 어떻게 알았든 말든 상관은 없지. 우리가 돈이 좀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그 귀여운 얼굴 상하지 말고 곱게 따라오렴, 크크크.”

살수들은 이미 서백을 잡았다고 여기는지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그전에 존성대명을 여쭙고 싶군요. 별호는 무엇이죠? 혹시 장강삼살이 아닙니까?”

“장강삼살?”

“우린 그저 너를 잡아가려고 손을 잡은 사이다!”

“장강삼살? 그런 웃긴 별호는 생전 처음 듣는구나, 하하하하!”

“그럼 저를 생포해서 끌고 가실 테니 목을 베지는 못하겠군요?”

“죽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당연하지!”

살수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서백을 조롱했다.

그러나 모두 서백이 의도한 것이었다.

‘짐작대로군.’

살수들은 방심한 나머지 서백이 원한 정보를 술술 말해 버린 것이었다.

‘나를 잡기 위해 서로 손을 잡은 사이다. 애초에 같은 편이 아니라는 소리.’

“그럼 제 몸은 하나인데 누가 남궁세가에 넘기실 겁니까?”

“……!”

“장강삼살이 아니니 세 분은 친분이 없으신 것 같은데 남궁세가의 포상금은 어떻게 나누실 겁니까? 엄청난 거금이니 똑같이 나눠도 짭짤하겠죠?”

“…….”

킬킬대던 살수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서백의 짐작대로 살수들은 흑점 객잔에서 마주치기 전에 서로 모르던 사이였다.

소림사행 인물에 큰 포상금이 걸려 있다는 정보를 얻자 그들은 즉석에서 손을 잡았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포상금을 얻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포상금을 어떻게 나누는가였다.

살수들도 이미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따로 상의한 적은 없었다. 포상금이 수중에 들어온 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서백을 붙잡을 수 있게 되자 미뤄 두었던 돈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남궁세가가 건 포상금은 평생 다 쓰지 못할 만한 거금이라 몇 명이 나누어도 충분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러한가?

콩 한 쪽도 나눠먹는 게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라면, 남의 콩 반 쪽도 빼앗는 게 흑도 무리들의 본심!

돈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며 살아온 흑도 무리다. 그러니 돈 한 푼이라도 남과 나누는 게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살수들은 서백이 아니라 옆에 있는 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은 동일했다.

-그래, 뭐 하러 돈을 나눠야 되지? 지금까지 내가 몽땅 싹쓸이하고 살았는데.

-꼬마를 잡을 때 혹시 이놈이 내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거 아냐?

-이놈들만 없으면 포상금은 전부 내 차지다!

서백은 살수들의 표정을 보며 차갑게 냉소했다.

‘계략이 성공했군.’

살수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키는 것은 간단했다.

눈앞의 살수들은 사람 죽이는 것은 잘하는지 모르지만 머리는 나쁜 것 같았다.

명문정파와 반대의 길을 걷는 흑도(黑道).

흑도에도 급이 있다. 온갖 계략을 꾸미고 뒷골목의 인물들을 동원해서 명문정파 뺨치는 행동력을 보이는 흑도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하오문이 그 대표적인 방파.

반면 작은 이익을 탐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는 짐승 같은 자들도 존재한다.

눈앞의 살수들은 후자이리라.

서백은 속으로 비웃음을 머금었지만 겉으로는 순진해 보이는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네 분 사이가 그리 돈독하시니 안심이 됩니다. 포상금은 정확히 네 등분을 하면 되겠군요.”

“…….”

살수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똑똑히 보였다.

애초에 의리라곤 없는 흑도 무리들이 서로 손을 잡은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

그런데 살수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잠깐. 네 분이라고?”

“네. 틀렸습니까.”

“우리는 세 명인데 무슨…….”

“이런. 네 분이시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

휙. 부우웅.

서백이 몸을 회전하며 검으로 등 뒤의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 은신해 있던 네 번째 살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아악…….”

대검을 휘둘렀는데도 서백은 순식간에 원래 자세로 돌아와서 앞을 보고 있었다.

“한 분이 더 있지 않습니까?”

“……!”

그랬다. 손을 잡은 살수들은 모두 넷이었다.

그들은 셋이 서백의 앞을 막아서 정신을 팔리게 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한 명은 어둠 속에 숨은 채 기회를 엿보는 작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서백이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다.

살수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딱 벌렸다.

-저 꼬마가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게다가 자기 몸만큼 커다란 대검을 볏짚처럼 휘두른 용력.

네 번째 살수를 일검에 처치한 검법은 사람 죽이는 일로 먹고사는 살수들이 보기에도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살수 셋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들은 이제야 깨달았다.

남궁세가가 큰 포상금을 건 인물. 게다가 중요한 정보를 지닌 채 소림사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자가 평범한 인물일 리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