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운하풍운(2)
채도들은 매일 밤 횃불을 들고 복도를 오가며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하지만 경비가 허술할 거라는 도화광의 생각이 들어맞았다.
방주는 면적도 넓지만 갑판에서 바닥까지 여러 층이 있었다. 때문에 백여 명의 채도들로서는 모든 구역을 엄밀히 지킬 수 없었다.
복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도화광은 소리 없이 복도로 나왔다.
방주에 타기 며칠 전. 그는 우연히 무림인 하나와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했다.
도화광이 간단히 제압하자 무림인은 정보를 알려 주는 대신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다.
무림인은 서백에 대한 정보가 퍼질 때 흑점 객잔에 있었던 살수 중 하나였던 것이다.
살수는 모든 정보를 실토했다. 소림사로 가는 인물에게 큰 포상금이 걸려 있다는 것을.
대신 포상금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소림사행 인물을 절대 죽이지 말고 생포할 것.
숙주(宿州)를 지날 때 방주에서 내려서 용정객잔으로 끌고 올 것.
살수들은 흑점에서 약속까지 했다.
방주가 숙주를 지나기 전에는 괜히 서로 싸우다가 죽고 죽이지 말자고.
용정객잔에서 꼬마를 넘기는 것은 살수들 중에서 몇몇만 아는 정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모든 살수들이 숙주를 행동 시작 장소로 꼽은 것이다.
안휘성의 동쪽에 위치한 도시 숙주.
거기서 내리지 않으면 방주는 망자 창궐 지역으로 들어가고 영영 내릴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우연도 아니었다.
정보를 들은 도화광은 살수의 양쪽 손과 양쪽 발을 모두 베어 버린 뒤 놓아 줬다.
목숨은 살려 주었으니 약속은 지킨 셈 아닌가?
지금 도화광은 살수들이 했다는 약속을 떠올리며 비웃었다.
‘숙주까지 싸우지 말자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군!’
그가 비웃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방주가 숙주까지 가려면 며칠 더 있어야 되는데 이미 시체가 두 구나 나오지 않았는가?
‘흑도 놈들이 잘도 약속을 지키겠다, 하하하!’
게다가 약속이 없더라도 결국 서로 싸우게 될 운명이었다.
꼬마는 하나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수십 명이 나눈단 말인가? 결국 서로 싸워서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포상금을 차지하게 될 터!
살수들이 말도 안 되는 약속을 지킨답시며 일을 벌이지 않고 있을 때, 도화광은 자신만의 계획을 시작했다.
그의 계획은 간단했다.
정보를 알고 있는 놈은 몽땅 죽인다!
누가 정보를 알고 있는지 애매하면 방주에 탄 놈들을 몽땅 죽여도 상관없었다.
그러면 소림사행 꼬마는 자연히 자기 차지가 될 테니까.
방에 틀어박히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방주.
아무도 모르게 하나씩 죽여 없애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
소리 없이 복도를 이동한 도화광은 어느 방 앞에서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딱따다 딱딱 딱딱.
그날 흑점 객잔에 있던 살수들이 서로 의논할 일이 있을 때 비밀리에 문을 두드리자고 약속한 신호.
잠시 후 방안에서 나지막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나요.”
도화광은 대충 목소리를 바꿔서 대답했다.
‘흑도 놈들. 분명 끼리끼리 손잡은 놈들이 있겠지.’
짐작이 맞았다. 방안에 있는 살수는 동료가 온 줄 알고 별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뭐야? 술시가 지났는데 들키면 어쩌려고…….”
무심코 말하던 살수는 복도에 있는 자가 동료가 아닌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너, 너는 도화광…….”
“호오, 날 아는군? 하긴 내가 좀 유명하지.”
“나한테 무슨 볼일이냐?”
“몰라서 묻냐? 살수가 찾아왔으면…….”
도화광이 소매에서 튀어나온 비수로 살수의 가슴팍을 찔렀다. 비수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살속을 파고드는 소리도 크게 나지 않았다. 서걱.
“이러려고 온 거지.”
“끄어억…….”
도화광은 살수가 넘어지지 않게 멱살을 붙잡고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살수가 쓰러지자 그대로 침상에 눕힌 다음 천천히 비수를 뽑았다.
비수는 종잇장처럼 얇고 날카로웠기 때문에 상처가 벌어지지 않아 피가 쏟아질 염려는 없었다.
솜씨 좋은 장인을 협박해서 제작한 도화광의 애병.
또한 심장을 절묘하게 피했기 때문에 당장 살수가 죽을 일은 없었다. 살수가 가능한 한 천천히 숨이 끊어지도록 만드는 게 도화광의 의도였다.
도화광이 품에서 연분홍색 환단을 꺼냈다.
“자자, 입 좀 벌려봐. 착하지?”
도화광은 비수로 살수가 꽉 다물고 있는 이빨을 벌린 다음 환단을 목구멍에 넣었다.
환단 역시 비수처럼 그가 고안해서 제작한 것으로, 환단을 삼킨 자는 오랜 시간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천천히 숨이 멎는다.
이제 살수는 삼 일 후에 숨이 끊어질 테고, 그 안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 않을 테니 아무도 그가 죽은 사실을 모를 것이다.
“명색이 사람 죽여서 밥 먹고 사는 살수라는 놈들이 시체 썩는 냄새나 풍기게 하고. 니들이 그러고도 살수냐?”
도화광은 방마다 하나씩 있는 옷장을 열고 살수의 몸을 집어넣었다.
고개를 숙이게 하고 손발을 구부리자 간신히 살수의 몸이 옷장에 들어갔다.
살수의 숨이 끊어지고 사후경직이 오면 옷장에 딱 맞도록 틀어박히게 될 것이다. 누군가 옷장을 열어 보지 않는 이상 시체는 발견되지 않을 터.
그야말로 완전범죄!
도화광은 양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뭐 이렇게 싱거워?”
그는 방을 뒤지며 살수가 남긴 은자와 쓸 만한 물건을 챙겼다. 그리고 복도에서 인기척이 사라지길 기다리며 다음 사냥을 준비했다.
* * *
밤이 되자 서백 일행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왕이삼은 만에 하나 들킬까 봐 간이 콩알만 해진 것 같았다.
왕이삼의 걱정은 기우였다.
채도들이 삼엄하게 복도를 감시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간혹 한두 명이 복도를 지나갈 뿐 경비가 소홀했던 것이다.
채도들의 눈을 피해서 숨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어두운 복도에서 불빛이 다가오면 모퉁이에 숨으면 됐다. 채도들은 횃불을 들고 다녔는데 오히려 그 불빛이 숨으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 신호가 되었던 것이다.
왕이삼은 어이가 없다 못해 한숨이 나왔다.
“경비를 서는 거야, 마는 거야?”
이처럼 경비가 엉망이니 방주에서 시체가 나온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시체가 고작 두 구밖에 안 나왔다는 게 오히려 희한할 정도.
“방주는 넓은데 채도들 숫자는 적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삼교대를 안 하고 매일 철야로 경비를 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서백의 말이 옳았다.
채도들한테 들킬 염려가 없다는 걸 깨닫자 왕이삼은 항상 그렇듯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쳇, 방에서 나오면 방주에서 추방하겠다는 말은 완전 공갈이었구만.”
그러다가 문득 궁금한 게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망자가 대체 누구냐? 짐작 가는 놈이 있다고 했잖아?”
그러자 서백과 송현이 동시에 대답했다.
“서생입니다.”
“서생이오.”
그 말에 왕이삼이 입을 딱 벌리며 되물었다.
“서생? 망자를 죽인 자가 망자라고?”
“채도들이 시체를 그냥 물속에 던졌으면 서생은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불을 붙여서 망자인 걸 밝히자 자기 손으로 목을 벤 겁니다.”
“왜?”
“시체였다가 되살아난 망자가 자신을 알아보면 곤란해서입니다. 잘못하다 자기마저 정체가 발각되면 방주에 탄 무림인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입을 막으려고 자기가 만든 망자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
“맞습니다.”
“그럼 서생을 어떻게 찾지?”
그 물음에는 송현이 대답했다.
“서생의 방을 알고 있소.”
“당신이 어떻게?”
“일주일 동안 방주에 탄 자들의 방을 알아 두었소.”
“……!”
“방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자가 몇 명 있어서 전부 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부분은 확인했소.”
왕이삼은 혀를 내두르는 걸 넘어서 기가 막혔다.
“후배도 방을 몽땅 외웠냐?”
“송 선배가 낮에 방주를 배회하시길래 방을 확인하시는 거라 짐작하고 맡겨 두었습니다. 대신 저는 다른 걸 조사했죠.”
왕이삼은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생각했다.
‘미쳤다! 이 둘은 완전 미쳤어!’
“이쪽이오.”
송현이 서생의 방을 향해 앞장을 섰다.
서백 일행은 채도들의 눈을 피해서 이동했다.
그런데 송현은 복도를 돌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속 계단을 내려간 송현이 발을 멈춘 곳은 방주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선창이었다.
왕이삼은 송현에게 물어보긴 꺼림칙해서 몰래 서백한테 귓속말을 했다.
“여긴 방주 선창이잖아?”
“맞습니다.”
“서생 놈이 창고에 있다는 말이냐?”
“창고 위에 있을 겁니다.”
“위?”
“네. 바닥을 뚫고 위에 있는 방으로 올라갈 생각이신가 봅니다.”
그제야 왕이삼은 송현이 무슨 꿍꿍이속으로 선창에 내려왔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위로 올라갈지 의문이었다.
장강과 운하를 오가는 방주는 사람과 짐을 많이 싣는다.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니 가능한 한 바닥을 두텁게 만들었으리라.
“바닥을 뚫는다고? 힘들 텐데.”
산서 벽력당의 폭약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비켜 있으시오.”
스릉. 송현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송현의 검은 잔뜩 낡은 것도 모자라 검날이 시커멓게 변색되어서 꼭 녹이 슨 것처럼 보였다.
왕이삼은 제갈세가에서 합격진을 펼칠 때 송현이 무사들의 수장을 일검에 베어 버린 것이 생각났다.
‘검법은 고수인 자가 무슨 검이 저렇게 형편없지?’
순간 송현의 검이 은은하게 푸른빛을 띠는 것이 아닌가?
‘저건 검기(劍氣)?’
내공진기를 검날로 흐르도록 운용하는 수법.
명문정파의 고수들도 쉽게 운용하지 못한다는 검기를 송현은 품에서 물건 꺼내듯 간단히 펼치고 있었다.
왕이삼은 다시 한번 송현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송현이 검을 들어 머리 위의 천정을 찔렀다.
슥. 검기를 띤 검은 두부 썰듯이 천정에 박혔다.
계속해서 송현은 천천히 검을 움직이며 천정에 네모난 칸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검을 슬쩍 비틀면서 뽑자 갈라진 천정 부분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오더니 어느 순간 쑤욱 빠졌다.
떨어진 천정 부분은 벽돌뭉치처럼 두텁고 무거웠지만 송현은 가볍게 받아 든 뒤 바닥에 내려놨다.
그러자 선창의 천정 위로 딱 사람 한 명이 통과할 너비의 구멍이 생겼다.
송현이 품에서 화섭자와 작은 천 조각을 꺼낸 다음 불을 당겨서 천 조각에 붙였다.
“불을 밝히는 거요? 위에 방에 있는 놈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자의 신경이 불에 쏠리는 사이 들어가서 제압하면 그만이오.”
휙. 송현이 천 조각을 구멍 위로 던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도 몸을 날렸다.
네모난 구멍은 어른 한 명이 간신히 드나들 수 있는 너비인데 송현의 몸은 빨려들어 가듯이 구멍을 통과해서 사라졌다.
뒤를 이어 서백이 몸을 날려서 위로 올라갔다.
왕이삼도 몸을 날렸지만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하고 턱을 잡았다. 그는 뱃살이 구멍에 끼는 바람에 용을 써서 간신히 몸을 빼내고 위로 올라갔다.
송현과 서백은 팔짱을 낀 채 왕이삼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촛불을 켜 놓아서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왕이삼이 방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아무도 없잖아?”
“우리처럼 사냥을 나간 모양이오.”
망자를 사냥하러 온 서백 일행.
그런데 망자 역시 망자로 만들 새 먹잇감을 사냥하러 방을 나갔다고?
왕이삼이 그걸 깨닫고 긴장하며 말했다.
“망자로 감염된 자가 속출한다면 방주가 큰 소동이 날 텐데.”
“서생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아직 망자라는 물증은 없습니다. 방에서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죠.”
서백의 말에 일행은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