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소림사로 가는 길(4)
채도들은 무림인들을 선실로 안내했다.
서백 일행도 채도 한 명을 따라서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방은 생각보다 꽤 넓고 좋았다.
커다란 침상이 두 개, 탁상과 의자가 두 개인 것으로 보아 원래 이 인용 방인 듯했다.
단지 방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게 단점이었다.
방주는 안전보다 크기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지만, 크기가 워낙 큰 만큼 물과 맞닿는 곳의 두께가 상당해서 창문을 낼 방법이 없었다.
창문이 없어서 환기가 잘 안 된다는 점을 빼고는 좋은 방이었다.
채도도 그 점을 자랑하며 말했다.
“망자판이라 손님이 없어서 최상급 방을 내어 주고 있소.”
서백 일행은 복도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방 세 개를 배정받았다. 일행은 일단 가운데 있는 왕이삼의 방에 모였다.
왕이삼이 침상에 벌렁 누우며 말했다.
“이거 은자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걸.”
“어련하시겠습니까.”
괭괭괭.
“갑판에 점심이 준비되었소. 시간에 늦으면 밥 없으니 그리 아시오.”
일행이 잠시 쉬고 있는데 징 소리가 들리며 채도가 소리쳤다.
“젠장, 한숨 자려고 했더니만.”
“그냥 주무시죠. 저는 공짜 점심 배불리 먹고 오겠습니다.”
“어딜 나만 빼놓고 가려고.”
서백 일행이 갑판에 올라가자 이미 많은 무림인들이 방에서 나와 있었다.
채도들이 큰 솥에 끓인 국과 밀가루를 빚어서 구운 떡을 무림인들에게 나눠줬다.
서백 일행은 국그릇과 밀가루떡을 받은 뒤 갑판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음식은 꽤 먹을 만했다.
국은 채소를 듬뿍 넣어서 국물이 진했고 듬성듬성 썰어 넣은 양고기 건더기가 제법 많이 들어 있었다.
밀가루떡도 괜찮았다. 파를 썰어 넣고 참기름을 발라 반죽해서 구운 방식은 평범했지만, 막 구워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은 뜨겁고 감칠맛이 있었다.
장강의 군소 수로채의 배와 비교하면 대운하를 왕복하는 방주는 확실히 고급이었다.
“이거 먹을 만한데? 앗 뜨거!”
“뱃사람들은 음식에 목숨 건다고 들었습니다.”
“잘 아는군. 배에서는 딱히 할 게 없으니 식탐을 부리게 마련이지.”
“선배님은 할 게 많으셔도 식탐을 부리지 않습니까?”
“뭐야?”
“제가 없는 말 했습니까. 아니, 식탐이 아니라 주탐이 맞겠군요.”
“이백도 술을 탐하는데 내가 주탐 좀 있는 게 어때서!”
둘은 오랜만에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일행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왕이삼은 먼저처럼 침상에 벌렁 누으며 말했다.
“태평천하가 따로 없군! 이게 무릉도원이지!”
그러자 송현이 무심하게 말했다.
“긴장을 너무 놓지 마시오.”
“에이, 당신도 좀 쉬라고. 물 위에 떠 있는 배에서 누가 무슨 일을 벌이겠어?”
왕이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장강은 사천의 험난한 계곡보다 물살은 약하지만 폭이 넓고 수심이 깊었다.
방주가 난파된다면 등평도수(登萍渡水) 정도의 내공과 경신법이 없는 이상 대다수의 무림인은 물에 빠져 죽을 것이 뻔했다.
설령 고수라서 목숨은 건진다고 해도 강가까지 헤엄치려면 상당한 심력과 체력을 소모해야 되리라.
그런 상태로 망자 떼라도 만나면 제삿날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즉 사방이 고립된 방주에서 싸울 일이 뭐가 있겠냐는 것이 왕이삼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뭐가? 그 화장한 놈 말이냐?”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수상합니다. 사람들이 제각각 뭔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자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제대로 봤군.”
“쳇, 나는 하나도 모르겠던데. 둘 다 무공이 강한 건 인정하는데 지나치게 예민하단 말이야.”
반면 왕이삼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서백의 우려가 사실이 되었다.
출항한 지 삼 일 후 방주에서 시체가 나온 것이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것은 한 채도였다.
채도들은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 식사를 배급할 때만 징을 쳤다. 그외 시간에는 무림인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즉 누가 밥을 먹으러 오는지 아니면 방에 틀어박혀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만약 대운하의 방주가 아니라 해안의 고깃배였다면 시체 발견은 더욱 늦어졌을 것이다.
생선 비린내가 시체 썩는 냄새를 가려 줬을 테니까.
채도는 복도를 지나가다가 고약한 냄새가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것을 깨닫고 채주에게 보고했다.
방은 안에서 잠겨 있었기 때문에 채주는 문을 부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피를 토한 채 침상에서 죽어 있는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자 무림인들은 모두 갑판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채주는 별다른 말 없이 채도들에게 시체를 물속에 던지라고 명했다.
무림인 중 하나가 궁금한지 물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걸로 끝이오?”
그러자 채주가 스윽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수로채는 방주를 운행할 뿐 사람 목숨까지 책임지지는 않소.”
방주에서 서로 죽고 죽이든 말든 수로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
“단 방주 운행을 방해한다면 수로채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오.”
채주는 그렇게 못 박았고 무림인들도 자기 일 아니라는 듯이 뿔뿔이 흩어졌다.
왕이삼이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쳇. 무릉도원인 줄 알았더니 도검삼림이나 다를 게 없군.”
그 말이 맞았다.
시체가 나온 뒤부터 배에 탄 사람들의 눈빛과 행동이 달라졌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방에 들어가면 문부터 걸어 잠그고 그것도 모자라 열리지 않도록 탁상과 의자를 대서 막았다.
또한 밤에 측간을 가거나 방에서 나올 일이 있으면 복도를 살핀 뒤 검을 뽑아들고 은밀히 나왔다.
목이 떨어진 다음 조심해 봤자 소용없으니까.
그렇게 일주일간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드디어 방주가 양주에 도착했다.
양주는 낙양까지 이어지는 대운하가 시작되는 장소다. 하지만 평소라면 사람들이 붐벼서 발 디딜 곳이 없을 선착장은 망자 창궐 때문에 한산했다.
당연히 방주에 새로 타는 손님은 없었다.
거대한 운하를 보자 서백은 다시 한번 감회가 새로웠다.
“어떠냐? 사천에는 이런 거 없지?”
“없습니다. 중원 땅은 듣던 것보다 대단하군요.”
왕이삼이 놀리듯이 말했지만 서백은 흔쾌히 인정했다.
방주는 장강을 떠나서 대운하로 연결되는 수로로 들어갔다.
대운하는 원래 관이 운영했지만 망자가 창궐하자 황제가 자신을 호위하도록 전역의 군대를 몽땅 불러들이는 바람에 관리와 군대가 공석이었다.
수로채는 그 틈을 타서 세금을 내지 않고 운하를 맘대로 쓰는 셈이었다. 약삭빠른 처사였지만 난세에 스스로 살 방법을 찾는 그들을 나쁘게만 볼 수는 없는 일.
어쨌든 덕분에 낙양까지 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드디어 대운하를 타는군. 이제 낙양까지는 별문제 없이 일사천리로 갈 거다.”
왕이삼이 신바람을 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방주가 대운하로 들어간 다음날 두 번째 시체가 나온 것이었다.
* * *
방주에 탄 사람들이 모두 갑판에 모였다.
“시체가 또 나왔소. 누군지 아시오?”
채주가 물었지만 무림인들은 서로 쳐다볼 뿐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무림인들은 제각각 행색과 차림새가 달라서 같은 문파인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대답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채주가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겠소. 수로채는 사람 목숨은 책임지지 않소. 방주에서 묵은 원한을 풀든 두 패로 갈라져서 서로 죽고 죽이든 마음대로 하시오. 수로채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이미 들었지만 다시 들어도 살벌한 말.
“단 방주 운행을 방해하는 자는 수로채의 적으로 여기고 하선시키겠소.”
그 말에 무림인 하나가 비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채도를 죽이면 어떡할 거요? 그래도 하선으로 끝낼 거요?”
사람을 죽이는데 고작 하선시키겠다는 것을 비웃는 말.
그러나 채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
그러자 무림인도 더는 비꼬지 못하고 침묵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무림인들은 채주가 왜 하선시키겠다고 말했는지 깨닫고 경악하게 된다. 당금 대운하를 지나는 방주에서 그것처럼 무서운 벌칙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처리해라.”
채주가 명하자 채도 둘이 앞으로 나왔다. 먼저처럼 시체를 물속으로 던져서 처리할 모양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채도들을 부르며 막았다.
“멈추십시오.”
채도들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서백이었다.
채주가 서백을 위아래로 한 차례 훑어 본 뒤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이 시체는 먼저 죽은 자와 다릅니다.”
“다르다고? 어떻게?”
“목에 검흔이 있습니다.”
서백이 검지를 들어서 시체의 목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시체를 보고 서백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체의 목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가느다랗고 붉은 선이 나 있는 것이었다.
도검으로 먹고 사는 무림인들이 그 선을 모를 리 없었다.
바로 검으로 벤 흔적!
문제는 검흔이 시체의 목을 빙 둘러서 나 있다는 것이었다.
검흔이 절반쯤 나 있으면 그러려니 하리라.
하지만 목을 빙 둘러서 났다는 것은 검으로 베어서 목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한 번 검으로 벤 목이 다시 붙어 있으니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서백이 무림인들의 눈빛을 읽고 설명했다.
“중원 벌판에 떠도는 것은 망자 중에서도 혈귀입니다. 혈귀는 혼백이 없어서 산 사람을 보면 달려들어 물어뜯지만 진짜 망자는 다릅니다.”
“진짜 망자라고?”
“네. 진짜 망자는 산 사람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 시체가 망자라는 거냐?”
“그걸 확인하려는 겁니다.”
“이미 죽은 시체인데 어떻게 망자가 됐다는 거지?”
채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진짜 망자가 되는지 아직 명확하게 해명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 하나 알려져 있습니다.”
“그게 뭐지?”
“목을 베고 뇌수와 척추가 연결되는 곳에 혈선충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
“이 시체는 망자로 만들려던 게 분명합니다.”
서백의 말에 무림인들은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그런 소문은 들어 본 적은 없다. 이 시체가 망자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그러자 송현이 끼어들며 말했다.
“본인이 보증하겠소.”
채주가 송현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같은 일행이잖소? 서로 짜고 일행끼리 두둔하는 건지 어떻게 아오?”
“믿든 말든 자유요. 소문은 사실이니까.”
그때 무림인 하나가 손을 들며 말했다.
“실은 나도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소.”
“으음…….”
무림인이 서백의 주장에 동의하자 채주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 시체는 망자로 바뀌지 못하고 죽었거나 아니면 바뀌는 중일 겁니다.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해 봐라.”
채주가 서백에게 망자 확인을 허락했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이었지만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자 결국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백은 품에서 기름통과 화섭자를 꺼낸 뒤 슬쩍 갑판을 살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다.’
갑판은 채도들이 아침에 청소를 해서 물기가 듬뿍 배어 있었다. 불이 크게 번지지는 않을 테니 염려는 놓아도 되리다.
서백이 시체에 기름을 뿌린 다음 화섭자를 당겨서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시체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무림인들은 초조한 눈빛으로 시체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