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소림사로 가는 길(3)
흑점의 정보는 정확했다.
서백 일행이 말을 타고 사흘을 이동했을 때 장강에 있는 선착장에 도착했던 것이다.
강에는 방주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저게 방주군요.”
“엄청나게 크구만.”
사천의 험악한 산지에서 살다가 처음 중원에 내려온 서백은 장강의 방주를 보자 새삼 감회가 깊었다.
장강삼협수로채의 채주선도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지만 장강을 왕복하는 방주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방주는 꼭대기를 보려면 고개를 수직으로 치켜들어야 할 만큼 컸다. 배가 아니라 거대한 건물이 물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네모난 상자란 말이 단순한 흑화가 아니군요.”
서백의 감상처럼 방주는 정말 네모난 상자 모양이었다.
장강삼협은 사천의 험난한 계곡에 흐르는 지류이기 때문에 물살이 험하고 곳곳에 급류가 있어서 난파의 위험이 도사렸다.
때문에 장강삼협수로채의 배는 안전을 위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반면 장강과 대운하를 오가는 방주는 많은 짐과 사람을 실을 수 있도록 크기 위주로 제작되었다.
지류가 합쳐져서 본격적으로 흐르는 장강은 폭이 넓고 수심이 깊었기 때문에 엄청난 크기의 방주가 오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백 일행은 말을 몰아서 강가로 내려갔다.
그런데 선착장에 도착하는 순간 왕이삼이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사천당문 때보다 더 살벌한데.”
그랬다. 선착장에는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있었는데 살을 에는 북풍이 부는 것처럼 분위기가 냉랭했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허리춤에 도검을 한 자루씩 찬 자들은 물론,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없는 독특한 병장기를 지닌 자들도 있었다.
복장 또한 청의, 흑의, 황의 등 제각각 달라서 명문정파 소속이 아니라 외로운 늑대처럼 무림을 떠도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무림인들의 눈빛!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벽력탄처럼 무림인들의 두 눈에서는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반면 무심한 얼굴을 한 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왕이삼은 그런 자일수록 더욱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의 일행인 서백과 송현이 그렇지 않은가?
무림인들 말고 항해를 준비 중인 채도들 역시 눈빛이 살벌하긴 마찬가지였다.
왕이삼이 그걸 느끼고 혀를 찼다.
“장강삼협수로채보다 더하군. 그때는 그나마 손님이라고 대접하는 눈치였는데 이놈들은 돈 뜯어먹을 호구 보듯이 하네.”
사천당문에서는 시험 경쟁 때문에 분위기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방주 타는 것은 뱃삯만 내면 된다.
그런데 선착장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살벌할 정도였으니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다.
“왜들 저렇게 눈이 벌게져라 힘 주고 있지?”
“방주를 타면 망자가 창궐한 중심지로 북상할 텐데 신경이 곤두서는 게 당연하죠.”
“쩝, 그랬었지.”
서백의 말에 왕이삼은 다시 우문현답이 된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다들 사지(死地)로 가는 사연이 있을 겁니다. 목숨을 걸어야 될 만큼 중요한 사연이.”
“…….”
서백의 말에 담긴 무거운 뜻을 깨닫자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방주를 운행하는 수로채의 채주가 소리쳤다.
“방주를 탈 사람은 모두 오시오.”
채주는 서백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 것도 모자라 한쪽 뺨에 길게 검상이 나 있어서 강인한 뱃사람에 딱 어울리는 사내였다.
“손님마다 방 하나씩을 주겠소. 혼자 써도 좋고 일행이 함께 써도 좋소. 대신 한 두(頭)당 은자 열 개요.”
뱃삯치고는 상당히 비싼 금액.
아니나 다를까 무림인 하나가 항의를 했다.
“뭐야? 뭐가 그렇게 비싸?”
“싫으면 타지 마시오.”
채주는 무림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러자 무림인도 입을 다물었다. 중원 무림에는 ‘항주에 가면 항주식대로 하라’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방주를 타려면 수로채의 법도에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무림인처럼 뱃삯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었다.
왕이삼이었다.
“우리는 세 명이니 은자를 서른 개 내야 되나?”
왕이삼은 슬쩍 송현의 눈치를 봤는데, 송현의 뱃삯까지 자기가 내면 손해 보는 셈이 아닌가 하는 꿍꿍이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제가 낼 테니 제 몫의 은자에서 제하십시오.”
“그래? 그럼 후배 말대로 하겠네.”
서백이 말하자 왕이삼은 서백이 마음을 바꿀까 봐 얼른 대답했다.
“그나저나 공동방을 안 쓰고 방을 하나씩 내 주겠다니 파격 대우인걸.”
“망자 창궐로 손님이 줄어서일 겁니다.”
“쳇, 위험한 곳으로 가는 대신 비싸게 받겠다는 소리군.”
무림인들은 한 명씩 채도에게 은자를 내고 방주에 올랐다. 서백 일행도 차례가 되자 방주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사형제처럼 보이는 무림인 두 명이 남은 것을 보고 채주가 말했다.
“방이 딱 두 개 남았으니 당신들을 끝으로 선실은 마감이오.”
“이거 운이 좋은걸.”
“그러게요, 사형.”
그때 언덕 너머에서 남자 하나가 선착장을 향해 걸어왔다.
“잠깐 기다려라!”
남자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었기 때문에 한참을 기다려야 도착할 것 같았는데 어느새 선착장에 와 방주 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무림인들과 채주들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경신법의 고수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이 기묘했다.
강가의 날씨는 습하고 무더워서 설령 기녀라고 해도 두터운 화장을 꺼릴 터였다.
그런데 남자는 얼굴에 분칠을 한 것도 모자라 눈가에 연분홍빛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무림에는 괴팍한 기인이사가 셀 수 없이 많다지만 이처럼 어이없는 자가 있다니…….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남은 방 두 개를 얻은 사형제가 비웃는 시선으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이걸 어쩌나? 방주에 자리가 다 떨어졌다는데.”
“헛걸음했소. 다음 방주를 타시지.”
“뭐라? 자리가 없다고?”
“그래. 귀가 먹었냐? 계집 놈아.”
“사형, 화장 좀 했다고 계집은 아니죠. 양물은 달린 것 같으니 그냥 계집 같은 놈으로 해둡시다.”
“사제 말이 맞군, 크흐흐!”
사형제 둘이 비웃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만들면 되겠군.”
“……?”
팟. 순간 강가에 한 줄기 빛이 번쩍였다.
곧이어 사형제 중 사형의 목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다가 기우뚱하며 떨어져서 물속에 빠졌다.
풍덩.
졸지에 사형을 잃은 사제가 황망한 눈길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허리춤에 검 한 자루 없었다. 그러니 사제는 남자가 어떤 수법으로 사형의 목을 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반면 서백과 송현 등 몇몇 고수는 남자의 수법을 알아차렸다.
-소매에 검날을 숨겨두고 있군.
소매 속 팔꿈치에 부착한 장치에서 검날이 튀어나오게 한 다음 상대를 급습하는 수법이었던 것이다.
“사형! 이런 개자식이… 죽어랏!”
사제가 허리춤으로 손을 내려서 검을 뽑았다.
그런데 사제가 검을 휘둘렀는데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네 검 아직 거기 있는데?”
남자가 검지로 사제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사제는 뜨끔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자신의 오른손이 검자루를 잡은 채로 손목이 잘려 있는 것이었다.
“내 손! 아아악…….”
사제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팔을 휘둘러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풍덩. 사제의 잘린 목이 마침 사형의 목이 빠졌던 곳과 같은 자리에 떨어졌다.
“거참, 우애 깊은 사형제일세.”
남자가 연분홍빛 눈가가 길게 늘어지도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자리 생겼지?”
안 그래도 분위기가 살벌하던 선착장은 남자의 등장에 더욱 흉흉해졌다.
남자가 채주 앞으로 가서 말했다.
“네가 수로채의 채주냐?”
“그렇소.”
“자리가 생겼으니 손님을 받으시지.”
그 말에 채주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지막 남은 방은 두 개였소. 사형제가 방을 같이 쓰면 당신한테 하나가 배정될 테니 굳이 살겁을 벌일 필요는 없었소.”
남자의 성급함을 꼬집는 채주의 말.
그러나 남자는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수로채는 방주 운행을 방해하지 않으면 누가 누굴 죽이든 말든 신경 안 쓰는 걸로 알았는데?”
채주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소.”
“그럼 신경 쓸 것 없구만.”
남자는 품에서 은자를 꺼내 채주에게 던지더니 성큼성큼 방주로 올라갔다.
그가 가까이 오자 채도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남자의 미소에 진한 살기가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살기는 설령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도 느낄 만큼 강렬했다.
“하하, 걱정 말라고. 너희들을 몽땅 죽이면 방주는 누가 몰겠어? 나도 바보는 아니거든, 하하하하!”
남자는 태연하게 무림인들 사이에 끼었다.
그러자 채도들은 물론 무림인들도 남자를 본체만체하며 외면을 했다.
방금 사형제의 죽음은 무림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무림인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목숨뿐!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송현이 한 마디 중얼거렸다.
“강호에 돌아왔군.”
“그렇군요.”
송현의 말이 서백의 가슴에 작은 파장을 남겼다.
옆에서 누가 죽든 말든 자기 앞길만 신경 쓰는 비정한 곳이 바로 강호인 것이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채도들은 운항을 준비했다.
그런데 갑판 위에 있는 인물들 중 십여 명이 서로 은밀하게 눈빛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바로 흑점 객잔에서 서백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던 살수들이었다.
정체를 숨긴 채 방주에 오른 그들은 남한테 들키지 않도록 대화를 나눴다.
“저 화장한 놈 뭐야? 아는 놈 없냐?”
“모르겠는데. 그때 객잔에 없었던 건 확실하다.”
“잠깐. 소문은 들어 본 적 있다. 여자처럼 얼굴에 분칠하고 다닌다는 살수 놈.”
“누군데?”
“도화광이란 놈이 맞을 거다.”
도화광. 복숭아꽃(桃花)에 미친(狂) 놈이라는 뜻.
여인처럼 연분홍색 화장을 하고 다니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해괴한 별호.
“대체 화장은 왜 하고 다니는 거야?”
“나야 모르지.”
“저놈이 왜 방주를 타는 거지? 이 난리통에 북으로 갈 일은 없을 텐데.”
“우리랑 같은 이유 아닐까? 소림사에 가는 꼬마 놈 소문을 들었겠지.”
“낌새가 안 좋아. 저놈은 약속을 어기고 먼저 꼬마의 목을 벨 놈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저놈은 약속한 적도 없군.”
“기회를 봐서 함께 없애는 게 어때?”
“그게 좋겠군.”
정체를 숨긴 살수들은 때를 봐서 도화광이란 자를 죽이자고 입을 모은 뒤 대화를 끝냈다.
“닻을 올려라.”
채주가 채도들에게 방주 운항을 명령했다.
그때 언덕 너머에서 인영 하나가 손을 흔들면서 선착장으로 달려왔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방주를 타러 왔습니다!”
생각 못한 불청객이 재차 등장하자 갑판 위의 흉흉한 분위기는 잠시 사그라들었다.
평소라면 채주는 그대로 닻을 올리게 명령한 뒤 선착장을 떠났을 것이다. 제 시간에 떠나고 늦은 자를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 수로채의 법칙이니까.
하지만 화장을 한 남자가 무림인 사형제 둘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방이 하나 비어 있었다.
망자 창궐 탓에 안 그래도 방주 운영이 빠듯한데 방을 놀려 둘 수는 없는 일.
할 수 없이 채주는 팔짱을 낀 채 인영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서야 인영은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것도 모자라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하는 것이었다.
“돈을 얼마든지 내겠으니 방주를 탈 수 있습니까? 헉헉…….”
“은자 스무 개에 방 하나요.”
“여기 있습니다.”
인영이 갑판 위에 오르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무림인들, 채도들 할 것 없이 곧바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인영은 새하얀 도포에 검은 관을 쓴 모습이 제법 청수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무공과는 거리를 둔 채 방에 틀어박혀서 평생 글만 읽은 백면서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살수들은 도화광에 이어서 또 다른 경쟁자가 온 줄 알고 긴장했는데 백면서생을 보고 괜한 걱정을 했나 싶어서 코웃음을 쳤다.
-그 짧은 거리를 달리면서 숨을 헐떡대니 무공은 한 번도 수련한 적 없는 놈이군.
-그러게 말야, 크크크.
그런데 모두가 백면서생을 비웃을 때 도화광은 무엇이 불만인지 눈썹을 찡그리며 채주에게 말했다.
“무공도 모르는 서생 놈을 배에 태울 거냐?”
“방주는 손님을 가려서 받지 않소.”
“돈만 받으면 그만이다?”
“그렇소. 마침 방이 하나 남았으니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소.”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방이 꽉 차게 사형제 중에 한 놈은 살려 둘걸 그랬군.”
도화광은 투덜거리며 뒤쪽으로 가 버렸다.
곧이어 방주가 선착장에서 점점 멀어지더니 강의 중심에서 물살을 탔다.
대운하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