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무명소졸의 역습(5)
방금 전까지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서백.
그런데 심호흡을 한 번 하는가 싶더니 전신에서 엄청난 내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제갈혁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 같은 꼬마가 어떻게… 절정고수한테 일갑자의 내공이라도 전수받은 것이냐?”
“아쉽게도 그런 기연은 없었습니다.”
서백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제갈혁은 수긍이 가지 않는 듯 재차 질문을 거듭했다.
“그럼 벌모세수라도 한 것이냐?”
벌모세수(伐毛洗髓)란 명문정파에서 후진을 육성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체질 개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벌모세수는 문파마다 고유의 방식이 존재하며 그 과정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단 성공하면 내력에 큰 성취를 얻어서 절정고수로 가는 기반을 닦게 된다.
서백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벌모세수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 받아야죠.”
“그게 무슨 소리냐?”
“당신은 몸과 정신이 썩어빠졌으니 완전히 뜯어고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네놈…….”
“이 내공심법은 석가장의 가전무공인 석가심결입니다.”
“그딴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무림세가에, 그런 가전무공이 있다고? 감히 누굴 속이려 드는 거냐!”
제갈혁은 큰 소리로 일갈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맞아. 네놈처럼 내력을 높이는 수법이 서장에 있다고 들었는데…….”
“또 서장 타령입니까? 그 얘기 듣는 것도 신물이 나는군요.”
“내공심법은 제법이다만 무공 초식은 천외천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지.”
처척.
제갈혁이 품에서 두 개의 판관필을 꺼냈다.
서백이 그걸 보고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망자의 판관필 초식이 당신의 수법이었군요.”
“이제 알았느냐?”
“네. 제갈세가의 판관필 수법은 변화무쌍하기로 천하 으뜸이라 들었는데 망자의 수법이 흐리멍텅하고 조잡하길래 헛소문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네놈!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제갈혁이 분노를 터뜨리며 초식을 출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갈혁은 홀로 판관필 수법을 연구해서 자신만의 독문무공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지현황진처럼 당시(唐詩)의 획을 판관필 초식에 담았다. 붓으로 시를 쓰듯이 판관필을 운용해서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고 급소를 점혈한다는 원리였다.
검법은 형이자 일공자인 제갈성을 넘지 못하지만 판관필만큼은 자신이 최고라고 평소 자부하던 터.
그런 판에 서백이 판관필 수법을 깎아내리자 이성을 잃은 것이었다.
“죽어랏!”
두 개의 판관필이 기이한 선을 그리며 서백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쉬쉬쉬쉭.
두 개의 판관필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매 순간 뱀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경로를 바꾸었다.
무공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그 현란함에 어지러움을 느꼈을 터.
제갈혁은 승리를 직감했다.
제아무리 내공심법이 대단하면 무엇 하는가?
검을 베거나 권장을 뻗기도 전에 판관필 초식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혈당하고 말 텐데!
“크하하하하!”
그때 세찬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제갈혁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
제갈혁이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는 찰나 거친 질풍이 그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휘이이잉.
이어서 제갈혁에게 두 줄의 검광이 박혔다.
파팟.
十
석가검법 제삼로(第三路) 我本楚狂人(아본초광인).
털퍽.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
제갈혁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두 눈알을 이리저리 뒤룩거리던 중 얼굴 바로 옆에 바닥이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목이 검에 베여서 떨어졌다는 것을!
제갈혁은 서백이 어떻게 자신의 목을 베었는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믿을 수 없는 게 있었다.
싯구절의 획을 본 따서 만든 판관필 초식을 눈앞의 꼬마가 가볍게 피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천지현황진이야 세 살배기 아이도 아는 천자문이니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복잡한 당시의 획을 저런 꼬마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네놈… 내 초식을 어떻게 파훼…….”
“초식?”
서백이 잠깐 말을 끊더니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하, 이백의 시 말입니까?”
“……!”
“당신 같은 무지렁이가 이백의 시로 장난질을 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군요.”
제갈혁은 입을 딱 벌리며 경악했다.
두 개의 판관필이 그리는 현란한 초식을 찰나의 순간에 이백의 시로 읽어 버리고 대응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제갈혁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입에서 피거품이 새어나와 성대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뻐끔뻐끔뻐끔…….
다음 순간 제갈혁의 얼굴에 세로로 붉은 금이 그어지더니 양옆으로 갈라지며 쪼개졌다.
쩌억.
열 십(十) 자로 목을 베는 석가검법 제삼로.
목을 벤 다음 혈선충의 심맥이 자리하는 교차점을 노리고 다시 수직으로 베는 초식. 즉 제삼로는 혈선충의 심맥을 확인즉살하기 위한 검로였다.
망자를 이용해서, 또한 패륜을 저지르면서까지 제갈세가의 패권을 움켜쥐려던 제갈혁.
제갈세가 이공자의 야심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서백은 앞으로 걸어와서 검으로 제갈혁의 잘린 목을 뒹굴 굴렸다.
뜻밖에도 제갈혁의 목 속에는 혈선충의 심맥이 없었다. 짐작했던 것과 달리 제갈혁은 망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망자인 줄 알았는데.”
망자가 된 제갈명재는 부적 문신으로 엄청난 위력을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제갈혁도 스스로 망자가 되어서 그 힘을 얻었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힘을 얻을 방법이 있다면 설령 중원이 멸망한다고 해도 방법을 실행하는 게 무림인이다.
스승이 했던 말은 이번만큼은 빗나갔다.
가주는 망자로 만들었으면서 자신이 망자가 되는 것은 피했던 제갈혁. 스스로 망자가 되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기 때문일까?
그랬다면 속 좁고 소심한 제갈혁다운 결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석가검법을 쓸 필요도 없는 옹졸한 위인이었군.”
서백은 무심하게 한 마디를 내뱉은 뒤 몸을 돌려서 자리를 떠났다.
* * *
본관 건물 앞에는 왕이삼과 무림인들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쉬고 있었다.
무거운 박도를 쉬지 않고 휘두르며 합격진을 펼친 바람에 진이 다 빠진 것이다.
곧이어 청의인이 제갈세가 무사들 몇 명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무사들 대부분은 이미 도망쳤으며 미처 떠나지 못한 자들 몇 명이 포로로 붙잡힌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동귀어진할 각오로 덤볐다면 최소 한두 명은 도망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청의인의 싸늘한 눈빛에 질린 무사들은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느니 차라리 항복을 선택했다.
그런데 무사들은 커다란 동이가 실린 지게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왕이삼이 청의인에게 물었다.
“그게 뭐요?”
“제갈세가의 창고에 있던 기름동이요.”
“기름동이? 그런 걸 뭐에 쓰려고. 불 피워서 고기라도 구울 거요?”
그 말에 청의인이 그답지 않게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비슷하긴 하군.”
그때 본관 건물에서 인영 하나가 걸어 나왔다.
바로 서백이었다.
왕이삼은 제일 먼저 달려가 서백을 반겼다.
“후배, 안 죽었구나!”
“죽다니요. 선배님이 가신 다음에 뒤따라야지 후배가 먼저 가는 건 예의가 아니죠.”
“이 녀석! 나 보고 먼저 죽으라는 소리냐?”
악전고투를 겪은 뒤라서 그런지 둘의 대화는 어느 때보다 정겨웠다.
서백이 무사들을 보며 물었다.
“포로입니까?”
“그래. 나머지는 몽땅 도망쳤다.”
“어쩐지 무사들 숫자가 적어서 싸움이 손쉽더라니 선배님 덕분이었군요.”
“와하하하! 오늘 조자룡 헌창 쓰듯이 박도 좀 휘둘렀지!”
왕이삼은 서백에게 지하로 떨어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서백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긴 얘기가 끝나자 왕이삼과 무림인들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특히 제갈혁이 가주마저 망자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제갈세가 내부에서도 비밀이었는지 포로가 된 무사들마저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중원 무림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중원의 각 문파와 세가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문파와 세가 내부에서도 암투는 끊이지 않았다.
아들이 아버지를, 이공자가 가주를 배신한 결과 제갈세가의 본관이 있는 융중은 이제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무사들 중 하나가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제갈세가는 이제…….”
“당신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오.”
그러자 청의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갈세가의 인물들은 중원 각지에 퍼져서 자리를 잡고 있소. 이곳은 말이 본관이지 중원 구석에 틀어박힌 융중일 뿐이오. 무림맹의 중요 인물인 일공자 제갈성이 가주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니 제갈세가를 걱정할 필요는 없소.”
그 말에 왕이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제갈세가 걱정할 때가 아니지.”
이어서 청의인이 무림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피난민들에게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시오. 제갈세가는 불탈 것이니 모두 떠나라고 말이오.”
“……!”
“북이나 남 말고 동쪽으로 이동하면 망자를 만날 가능성이 적을 것이오. 그럼 홍복을 빌겠소.”
청의인은 제갈세가를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준 무림인들에게 정중하게 포권지례로 답례했다. 무림인들도 포권지례로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피난민들 처소로 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청의인이 말한 것처럼 제갈세가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특히 지하의 망자굴을 싸그리 불태워야 했다.
“망자들이 스스로 기관진식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오진 않을 것 같소. 하지만 만에 하나 모르는 일이니 확실히 해 둬서 나쁠 건 없지.”
“동감입니다.”
서백 일행은 기름동이를 짊어진 무사들을 이끌고 본관으로 들어갔다.
지상에 올라온 지 오래됐으나 서백은 발밑의 어느 곳에 지하 망자굴이 존재하는지 지도를 보는 것처럼 머릿속에 외우고 있었다.
서백은 본관 바닥의 틈새를 살피면서 무사들에게 기름 부을 곳을 지시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으시오. 그리고 여기. 여기는 망자굴의 중심지이니 동이 하나를 통째로 부으시오.”
그런 서백을 왕이삼은 혀를 내두르며 쳐다봤고 청의인은 예의 팔짱을 낀 채 딴청을 피웠다.
곧이어 커다란 기름동이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동이 났다.
왕이삼이 진절머리를 내며 말했다.
“이공자라는 놈은 창고에 무슨 기름을 저리 많이 쌓아 뒀지?”
“만일의 경우 망자들이 탈출할 때를 대비해서 불을 지르고 피신하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망자들은 자기가 만든 거잖아?”
“그자는 속이 좁고 겁이 많으니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 않으면 편히 잠을 잘 수 없었을 겁니다.”
“쳇. 이 정도 양이면 잿더미 하나 안 남고 몽땅 타겠군.”
서백이 불붙인 천조각을 바닥 틈새로 던진 다음 일행은 본관 건물을 나왔다.
잠시 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본관 건물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콰아아앙.
밀폐된 지하에서 갑자기 불이 타오르자 공기의 흐름이 역류하는 바람에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화르르르.
불길은 순식간에 본관을 집어삼켰다.
왕이삼의 말대로 본관 건물과 지하의 망자굴은 새까맣게 타 버릴 것이 명확했다.
지옥불에 뒹구는 망자들의 울부짖음이 멀리서 환청처럼 들려왔다.
꾸웨에에엑…….
밤에 들으면 모골이 송연할 만큼 소름끼치는 소리.
그때 서백이 한 마디를 중얼거렸는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갈세가의 무사들에게 들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지하의 망자들한테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망자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는 중원 무림의 이름으로 응징할 것입니다.”
그러더니 서백은 냉랭하게 말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이만 갑시다.”
서백 일행은 몸을 돌려서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