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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57화 (57/123)

57화 기문둔갑 술법(3)

제갈혁의 천지현황진 망자 떼를 돌파한 서백은 공터에 난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는 처음에는 일직선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거미줄이 얽힌 것처럼 갈림길이 늘어났다.

흡사 미로를 방불케 하는 통로.

그러나 서백을 당황하지 않았다.

서백은 이동하면서도 동서남북 방위 중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머릿속에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목적지로 삼을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사자상으로 나가는 출입구.

왕이삼과 청의인은 목소리 관을 따라 출입구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지상으로 나가면 그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다른 목적지는 제갈혁의 방.

망자 소굴은 제갈세가의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비밀 장소라면 제갈혁의 방과 이어지는 출입구가 반드시 존재하리라.

‘둘 중 어느 쪽으로?’

서백은 고민하지 않고 즉시 목적지를 정했다.

‘제갈혁의 방으로 간다.’

사자상은 정남 쪽이었지만 서백은 제갈혁의 방이 짐작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칠흑 같이 어두운 통로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발소리뿐 아니라 짐승이 목울대를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그르르르…….

피에 굶주린 망자들이 울부짖는 소리.

이유는 모르지만 망자들이 서백을 찾아서 추격해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서백을 당황시키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지.’

천지현황진을 돌파했을 때 서백은 제갈혁의 다음 작전을 이미 머릿속에 예측하고 있었다.

제갈혁은 서백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확실한 위치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통로로 들어갔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을 터.

즉 제갈혁은 망자들을 총동원해서 서백을 추격하도록 술법을 부린 것이리라.

어쩌면 일부러 서백을 통로 속으로 몰아넣었는지도 몰랐다.

통로는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함정인 셈.

하지만 상관없었다.

호랑이굴 밖에서 연기를 피운 다음 호랑이가 나오면 싸우는 것은 서백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호랑이굴에 들어가 끝장을 내는 것이 서백의 작전!

‘마음껏 술법을 부리고 함정을 파라.’

서백은 근처에 망자만 없다면 제갈혁에게 비웃음을 날리고 싶었다.

‘얼마든지 파훼해 줄 테니까.’

망자들의 그르렁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망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공터에서는 비틀거리며 걷던 망자가 지금은 두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걷고 있었다.

서백이 석가심결을 시전해서 숨결을 멈추고 있자 마구잡이로 붙잡도록 술법을 부린 것이리라.

망자는 목에서 그르렁 소리를 내는 것도 모자라 굶주린 들개처럼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도망치기는커녕 공포에 질려서 발이 얼어붙을 만한 모습.

그런데 서백은 거꾸로 망자를 향해 움직였다.

왕이삼이 봤다면 후배가 드디어 미쳤다면서 기겁했을 장면.

휙.

서백은 망자가 휘젓는 두 팔을 가볍게 피해서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어서 망자가 붙잡기 전에 보법을 밟으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스스슥.

그러자 서백은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망자를 통과해서 뒤로 빠져나가 버렸다.

지금 서백이 펼친 보법은 명문정파의 고수라면 누구나 시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살점이 썩어 문드러진 망자를 향해 스스로 뛰어드는 평정심은 설령 고수라도 함부로 따라하지 못할 터.

그 위험천만한 경신법을 서백은 간단히 해냈다.

하지만 서백이 진짜 노린 것은 따로 있었다.

‘이게 당신의 노림수인가?’

서백의 손에는 잔뜩 낡고 구겨진 종잇장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로 제갈혁이 만든 부적으로, 방금 전까지 망자의 가슴팍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망자는 잠시 동작을 멈추는가 싶더니 곧이어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부적이 떨어지자 제갈혁의 술법에서 풀려나 혼백이 없는 혈귀로 돌아온 것이리라.

‘짐작이 맞았군.’

망자를 조종하는 부적.

이것으로 제갈혁이 흑랑비서를 연구해서 부적으로 망자를 부린다는 게 확실해졌다.

사실 천지현황진을 돌파하면서 망자들이 가슴에 부적 한 장씩을 붙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백은 일부러 때를 기다렸다.

공터에서 망자들의 부적을 제거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제갈혁이 부적의 위력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망자들을 한꺼번에 움직일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지금처럼 좁은 통로에서는 망자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위치가 탄로 난다고 해도 망자 떼에게 포위당할 위험 자체를 없애 버린 작전!

작전이 성공하자 서백은 주저없이 망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일렬로 이동하면서 서백을 찾는 망자들의 부적을 하나씩 떼어 버렸다.

휙 휙 휙 휙.

두 팔을 마구잡이로 휘젓는 망자쯤은 서백한테 움직이지 않는 목인상이나 마찬가지.

삽시간에 서백은 근처에 있는 망자 십여 구의 부적을 떼어 냈다.

그러자 부적이 떨어진 망자들과 아직 부적을 붙이고 있는 망자들이 뒤섞였다. 망자들은 서로 길을 막으며 이리저리 뒤엉켰다.

‘당신 의도쯤은 손바닥 들여다보는 것보다 쉽다.’

제갈혁의 심중을 꿰뚫고 파훼한 서백은 얼기설기 뒤엉킨 망자 떼를 뒤로 하고 유유히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통로를 이동했을까.

복잡하게 얽혀 있던 통로가 어느새 갈림길이 줄어들더니 일직선이 되었다.

통로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뜻.

서백은 재빠르게 그러나 기척 없이 이동했다.

제갈혁의 모든 술책을 돌파했지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석가심결의 시전 시간이었다.

‘남은 시간은?’

함정에 걸려서 망자 소굴에 떨어졌을 때가 대략 반 시진 전쯤이었다.

석가심결을 전수할 때 스승은 목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반 시진 동안 석가심결을 시전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어서 반 시진 이상 석가심결을 시전했다가는 주화입마에 들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망자들을 보기 위해 줄곧 석가심결을 시전하고 있었으니 한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아직 여유는 있지만 충분하진 않다.’

통로는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기 때문에 망자가 갑자기 덤벼들 위험은 없었다.

하지만 석가심결을 중지할 수는 없었다.

제갈혁이 또 어떤 술법을 부릴지, 지하에 또 어떤 기관진식이 작동하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석가심결을 시전하지 않아도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는 숨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내공을 못 쓰게 되면 외공으로만 망자를 상대해야 된다. 석가검법을 못 쓰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두르자.’

지하에 떨어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서백의 머릿속에는 현재 위치가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정확히 파악되고 있었다.

잠시 후 서백은 이동 속도를 늦췄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지도에 따르면 바로 위의 지상에 제갈혁의 방이 위치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좁은 통로가 끝나고 넓은 공터가 나왔다.

‘도착했군.’

망자 소굴은 아마도 여기가 끝이리라.

서백은 공터를 좌우로 살피며 제갈혁의 방으로 이어지는 비밀 출입구를 찾았다.

출입구를 찾는 것은 쉬웠다.

공터는 사방이 막혀 있었는데 건너편에 좁은 통로 하나가 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출입구인 것은 누가 봐도 뻔할 터.

‘저기군.’

그때였다. 통로에서 인영 하나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망자인가? 아니면 제갈세가의 무사?’

인영이 통로에서 나오자 그 몰골을 보고 서백은 망자라고 확신했다.

인영의 몰골이 산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남루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온통 산발한 봉두난발 머리. 개방 방도도 걸치기 꺼려할 만큼 낡아빠진 도포. 발가락이 나올 정도로 찢어진 가죽신 등등.

특히 도포는 절반 이상 찢어져 있어서 상체가 거의 드러나 있다시피 했다.

서백은 망자가 통로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뒤로 돌아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망자의 모습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저벅 저벅 저벅…….

‘뭐지?’

망자가 어두운 통로에서 완전히 나온 순간 의문이 해소되었다.

망자의 얼굴이 누군가와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제갈세가의 이공자 제갈혁이었다.

‘……!’

서백은 생전 처음 제갈세가를 방문했지만 망자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제갈혁의 얼굴을 쏙 빼닮은 망자.

아니, 둘째 아들과 닮은 망자.

봉두난발을 한 망자는 바로 무림에 소식이 끊긴 채 은둔했다고 알려진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명재였다.

‘그랬었군.’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명재는 무공 수련을 위해 은둔한 게 아니었다. 망자가 돼서 세가의 땅밑을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백은 처음부터 이곳이 단순한 망자 소굴이 아니라 제갈세가의 비밀을 숨긴 장소일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망자가 돼서 지하에 가둬 놓은 걸까?

아니면 다른 망자들처럼 지하에 가둔 다음 망자로 만든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제갈혁이 인륜을 저버렸든 무림을 집어삼키려 하든 서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죄가 하나 더해질 뿐이니까.’

어차피 제갈혁이 세상에 사죄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었다.

‘먼저 부적을 떼낸 다음 목을 벤다.’

한때 무림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가주였던 인물. 목을 베어서 곱게 황천으로 보내 주는 것이 무림 명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리라.

그런데 제갈명재에게 뛰어들려는 찰나 서백은 무언가를 보고 평소 그답지 않게 발을 멈췄다.

‘……!’

제갈명재한테 붙어 있는 것은 평범한 부적이 아니었다.

부적이라면 수십수백 장이 붙어 있든 떼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제갈명재의 몸에 있는 부적은 절대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갈명재의 몸통에는 붉은 먹물을 바늘로 찔러서 몸에 새긴 부적 문신이 맨살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 * *

절대 뗄 수 없고 태울 수도 없는 부적.

청의인이 왕이삼에게 귀띔했던 부적은 바로 문신이었다.

부적을 그려서 망자에게 붙이면 술법이 발동된다.

그런데 부적을 아예 망자의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면?

부적을 없앨 방법이 없으니 망자는 영영 술자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청의인은 제갈혁이 그 수법을 썼으리라고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제갈혁의 탁상에서 바늘을 봤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여인이 쓰는 바늘이 왜 문사의 탁상에 있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을 일.

그러나 청의인은 문신에 쓰는 바늘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문신을 새기려면 오랜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다. 많은 숫자는 아니더라도 망자들 중 최소 하나는 문신을 새긴 채 제갈혁에게 조종받고 있으리라.

어쩌면 망자들 중 최강의 고수가 문신을 새겼을지도…….

헐레벌떡 달리는 왕이삼이 청의인에게 물었다.

“그럼 문신을 새긴 망자를 쓰러뜨리면 어떡해야 되는 거요?”

“딱히 방법은 없소. 망자의 목을 베고 혈선충을 박멸하는 수밖에.”

망자의 목을 베는 것도 쉽지 않은 판에 술법에 조종되는 망자, 그것도 제거 불가능한 부적을 붙인 망자라니.

그야말로 최악 중 최악의 상황!

그런데 뜻밖에도 왕이삼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아주 쉽겠군.”

“쉽다고?”

“그렇소. 부적 따위가 무슨 상관이오? 망자 목을 베는 것은 후배가 가장 잘하는 거요!”

청의인은 왕이삼의 말이 정곡을 찌르자 그답지 않게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그렇군.’

상대가 기관진식 함정을 설치하든 기문둔갑 술법을 부리든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이 진짜 무림인의 왕도(王道)!

이윽고 통로가 끝나고 천정에 지상으로 나가는 출입구가 나왔다.

청의인과 왕이삼은 뚜껑처럼 생긴 문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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