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기문둔갑 술법(2)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청의인에게 물었다.
“제갈혁 놈이 펼쳐 놓은 기문둔갑이란 게 대체 어떤 거요?”
청의인의 대답은 간단하고 무심했다.
“그건 본인도 모르오.”
“모른다고? 후배가 망자굴에 떨어진 판인데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이 있소?”
“제갈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소?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은 본인에게는 없소.”
“…….”
왕이삼은 다시 한번 우문현답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청의인이 귀가 번쩍 열리는 말을 했다.
“어떤 술법을 썼을지 짐작할 실마리는 있소.”
“실마리? 그게 뭐요?”
“제갈혁의 취향이오.”
“취향?”
“그는 본관 문이 열리는 기관진식 장치를 정원에 설치해 놓았소.”
그 말을 듣자 왕이삼은 서백이 파훼한 기관장치가 떠올랐다.
“후배가 바둑을 따라했다고 한 장치 말이오?”
“그렇소. 바둑은 옛부터 군자의 취미라고 했소. 무림인이 아니라 문사 같은 제갈혁이 기관진식을 바둑으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오.”
“쳇. 무림인 주제에 탁상머리에 앉아서 허송세월하는 꼴로 보이는군.”
“기문둔갑도 마찬가지요. 분명 자기 취향대로 술법을 펼쳐 놓았을 것이오.”
청의인의 설명은 논리정연해서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바람에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종종 튀어나오는 우문현답이 문제지만.
“굳이 왜 자기 취향대로 술법을 펼치지? 적한테 실마리를 주는 것 아니오?”
“좋은 지적이오.”
청의인이 뜻밖에도 칭찬을 하자 왕이삼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리가 좋은 자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법이오.”
“실마리를 줄 테니 어디 한 번 풀어 봐라, 이건가?”
“맞소. 제갈혁은 어떤 무림인도 자신의 술법을 풀지 못할 거라고 자신할 거요.”
“쩝, 그렇군.”
그 말을 듣고 왕이삼은 입맛을 다셨다.
그 무림인 중에 자신도 들어갔기 때문이다.
자기 역시 오목만 둘 줄 알고 바둑에는 까막눈이라 정원이 바둑 모양의 기관진식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지 않은가?
“그럼 제갈혁의 취향이 뭐일 것 같소?”
왕이삼은 또 우문현답을 할까 싶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다행이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이 돌아왔다.
“해답은 제갈혁의 탁상에 있소.”
“탁상?”
“그의 탁상에는 여러 물건이 놓여 있었소. 그중에 바둑돌도 있었지. 그 물건들 중에 술법을 풀 실마리가 있을 거요.”
“호오.”
왕이삼은 청의인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자기 취향을 늘 가까이 하는 법이다.
왕이삼 자신도 항상 물병에 술을 넣고 다니지 않는가?
그러나 왕이삼은 제갈혁의 탁상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잠깐 시야에 스쳐지나갔을 뿐인데 탁상 위를 기억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탁상을 일부러 봤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슬쩍 본 것을 몽땅 기억한다는 게 말이 되오?”
“충분히 가능하오.”
청의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소년은 제갈혁의 탁상을 기억할 것이오.”
* * *
‘해답은 제갈혁의 탁상에 있다.’
서백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 제갈세가는 가주가 오랫동안 은둔해 있고 일공자는 무림맹에 가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실질적인 가주인 이공자 제갈혁이 자기 입맛대로 세가를 바꾸어 놓았을 터.
바둑 사활 매화육궁을 이용한 연못이 그 증거였다.
서백은 제갈혁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의 탁상 위에 바둑돌이 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지하에도 그의 취향대로 기문둔갑을 펼쳐 놓았을 게 분명했다.
서백의 추리는 적중했다.
망자들의 움직임에서 규칙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 규칙은 제갈혁의 탁상 위에 놓여 있던 어떤 물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무림인보다 문사이길 바라는 듯한 제갈혁.
그의 탁상에 있던 것은 도검이나 암기 같은 병장기도, 무공의 정수를 기록한 비급도 아니었다.
바로 지필묵연(紙筆墨硯)이었다.
반듯하게 닳은 먹. 호랑이 모양이 새겨져 있는 벼루. 새외에서 수입한 말총으로 만든 붓. 어떤 글귀가 적혀 있는 종이.
그중에서 기문둔갑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은…….
‘종이다.’
당시 종이에는 검은 먹물로 막 써내려간 글귀가 있었다.
그 글귀가 망자 떼를 통과하는 비밀이리라.
글을 쓴 필체는 해서체였다.
초서체가 글자를 흘려 써서 부드럽고 우아한 반면, 직선적인 해서체는 힘 있고 강건한 서체다.
제갈혁의 성정을 엿볼 수 있는 면목.
그러나 기문둔갑에 좋아하는 서체를 녹여낸 것과 달리, 종이에 쓴 것은 중원의 글자를 배운 자라면 누구나 아는 문장이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되는 문장.
바로 천자문이었다.
서백은 제갈혁의 방에서 천자문을 봤을 때부터 의문을 갖고 있었다.
학식 높은 문사인 척하는 그가 고작 천자문을 정성들여 쓴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술법의 실마리를 적어 놓은 것이었군.’
적한테 일부러 실마리를 보여 주는 대담함.
그만큼 제갈혁은 서백 일행을, 아니, 전 무림인을 자기 발밑으로 보는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서 배회하는 망자들의 움직임이 제갈혁의 필체를 닮아 있었다.
혼백 없는 망자들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걷는다.
하지만 눈앞의 망자들은 일직선으로 걷다가 어느 순간 각도를 정확하게 틀어서 방향을 바꾼 뒤 다시 걸음을 재개했다.
둥글지 않고 각진 해서체로 쓴 천자문의 필체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
그것이 서백이 알아 낸 기문둔갑의 비밀이었다.
‘시작하자.’
망자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읽고 있던 서백은 정확한 시점에 망자 떼 속에서 몸을 빼냈다. 그리고 보법을 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늘 천.’
천(天) 자는 네 개의 획으로 되어 있다.
수평으로 두 번, 대각선으로 두 번.
서백은 붓으로 종이 위에 천 자를 쓰는 것처럼 보법을 밟으며 이동했다.
스스스슥.
획 수가 넷이니 걸음도 네 번.
망자 떼 속에서 보법을 밟자 코앞에서 망자가 스쳐지나갔다. 때로는 서백이 망자 등짝에 코를 박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백의 몸은 종잇장 차이만큼 아슬아슬하게 망자들을 피하며 지나갔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갈혁이 걸어놓은 술법에 따라 공터를 돌고 있는 망자 떼.
하지만 술법의 이치를 깨달은 서백이 천자문에 따라 보법을 밟자 망자 떼는 서백과 스치지도 못했다!
계속해서 서백은 보법을 밟으며 망자 떼 속을 유유히 통과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 일월영측(日月盈昃), 진수열장(辰宿列張)…….
얼마나 천자문의 획을 보법으로 밟으며 이동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백은 어느새 망자 떼를 뒤로 하고 통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별것 아니었군.’
옆에 망자만 없었더라면 서백은 그답지 않게 비웃음을 날리고 싶었다.
적을 상대하면서도 유희를 즐기는 제갈혁.
생사를 걸고 싸우는 무림에서 그런 안일한 성정은 치명적인 약점일 터!
‘제갈세가의 이공자는 어설픈 백면서생이군.’
제갈혁의 기문둔갑을 파훼한 서백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서 통로로 들어갔다.
* * *
본관 지상에 있는 제갈혁의 방.
제갈혁의 앞에는 스물네 명의 무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혁이 탁상에 놓인 어떤 물건을 보며 말했다.
“꼬마 놈이 천지현황진을 통과했군.”
천지현황진(天地玄黃陣).
천자문의 첫 문장인 천지현황에 병법 용어인 진법을 붙인 말. 즉 천지현황진은 제갈혁이 스스로 만든 진법이었다.
“망자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망자판이 된 험지를 뚫고 융중까지 온 놈들이니까.”
제갈혁이 두 눈썹을 사납게 휘면서 말했다.
“사사십육, 열여섯 바퀴만 더 돌았으면 놈은 정신이 홀려서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묻는 말에 스스로 진실을 토하도록 되었을 텐데 아깝군.”
그러자 무사들 중 맨 앞에 나서 있는 수장이 고개를 살짝 조아리며 말했다.
“제법이군요.”
“평범한 꼬마는 아니라고 느꼈지. 뭐 상관없다.”
방금까지 눈썹을 일그러뜨리던 제갈혁이 금세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급한 성정이 엿보이는 면모였다.
“권주를 거절한 놈에게 벌주를 내려 줘야지.”
제갈혁이 두 손을 뻗어서 탁상 위에 올렸다.
탁상 위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작은 대야가 놓여 있었는데, 대야에 가득 담긴 물 한가운데에 작은 잎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기이하게도 잎은 녹색이 아니라 피처럼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제갈혁이 허공에 두 손을 휘저으며 기이한 도형을 그렸다.
그러자 잠잠하던 물이 갑자기 소용돌이가 일면서 붉은 잎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놈을 제구(第九) 구역으로 몰아넣는다.”
그 말에 수장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제구 구역은 금역으로 선포하신 곳이 아닙니까?”
“그랬지.”
제갈혁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무림맹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그 방법까지 쓰시려는 겁니까?”
“물론이다.”
제갈혁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올리며 웃었다.
“애송이 꼬마 놈은 제갈세가 앞에서 감히 고개를 치켜들어선 안 된다는 것을 똑똑히 깨닫게 될 것이다.”
* * *
통로를 이동하던 중에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까막눈이니 기문둔갑이 뭔지는 모르오. 하지만 어떻게 술법을 거는지는 궁금하군.”
“당신도 이미 보지 않았소?”
“뭘 말이오?”
“복도에 붙어 있는 부적들.”
“아…….”
“제갈혁은 부적으로 망자들을 조종하는 게 틀림없소.”
청의인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왕이삼이 반문했다.
“어떻게 그리 잘 아시오?”
“…아는 방법이 있소.”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갈혁은 분명 흑랑비서를 보고 부적을 그렸을 테니까.
그리고 흑랑비서라면 청의인이 밤잠을 자다가도 악몽을 꿀 만큼 잊고 싶은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무림맹의 원로 격이 된 제갈세가의 일공자 제갈성은 치밀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동생 제갈혁에게 손쉽게 흑랑비서를 넘겨주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서로 가주 자리를 노린다고 해도 결국 형과 동생 사이.
즉 제갈성은 제갈혁에게 흑랑비서의 사본을 전해 준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혹시…….
‘무림맹 일에 바쁜 자기 대신 동생이 흑랑비서의 비밀을 캐내도록 하려는 속셈인가?’
그게 더 그럴 듯한 추측이리라.
그렇다면 제갈성은 실수를 저질렀다.
제갈혁은 겉모습만 유약한 문사일 뿐 속마음은 무림을 집어삼키려는 시커먼 야욕이 가득한 인물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청의인의 뇌리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청의인은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왜 멈추시오?”
왕이삼이 궁금한지 물었다.
“…제갈혁은 부적으로 술법을 부리오.”
“알고 있소. 바로 당신이 말하지 않았소?”
“당신이라면 부적을 붙인 망자를 상대할 때 어떻게 하겠소?”
“나야 뭐, 그렇지! 그깟 종잇장 떼어 버린 다음 태우면 그만 아니오?”
왕이삼이 스스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 신바람을 내며 말했다.
하지만 청의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세상에는 절대 뗄 수 없고 태울 수도 없는 부적이 존재하오.”
“헹, 그런 부적이 어디 있소?”
“있소.”
청의인이 왕이삼에게 뭐라고 한 마디 말을 했다.
그러자 멍하니 있던 왕이삼은 잠깐 후에야 청의인의 말뜻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그런 방법이…….”
멍청히 있던 왕이삼은 곧이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럼 당장 후배를 구하러 가야지, 뭘 늑장 부리고 있소? 빨리 갑시다!”
왕이삼은 말을 마치자마자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청의인은 그런 왕이삼을 보며 생각했다.
‘실력은 일류에 못 미치지만 좋은 동료군.’
좋은 사람 옆에는 좋은 동료가 붙는다. 어떻게 만났는지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서백과 왕이삼은 서로에게 좋은 동료이리라.
청의인은 과거 일이 떠올라서 새삼 감회에 젖었다.
운남에 낙향했던 그가 다시 중원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게 된 계기.
바로 더 이상 동료들이 고생하는 것을 눈 감고 외면하지 않겠다고 결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서백부터 구하는 것일 터.
‘서둘러야겠군.’
청의인은 소리 없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