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기문둔갑 술법(1)
왕이삼의 눈앞에서 서백이 떨어진 곳의 바닥이 자동으로 닫혔다.
쿠웅.
이어서 청의인과 왕이삼의 앞을 가로막았던 쇠창살도 위로 올라가더니 천정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구우우우. 철컹.
그러자 지하 통로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만약 잠깐 한눈을 팔았다면 눈 깜빡할 사이에 서백이 사라진 것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터.
이것이 제갈세가의 기관진식!
왕이삼은 눈앞에서 서백이 함정에 빠져 사라지자 입을 딱 벌린 채 경악했다.
그는 명문정파의 절정 고수가 무공을 펼치는 것은 몇 번 본 적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관진식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호사가들이 떠드는 소문으로도 들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왕이삼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청의인이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시오. 걱정해 봐야 변하는 건 없소.”
“사람이 함정이 빠졌는데, 그것도 망자들이 있는 곳에 빠졌는데 진정하라는 거요?”
“그 소년은 진정하고 있을 거요.”
“……!”
그랬다.
서백은 설령 목젖에 검날이 닿는다고 해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을 인물이 아닌가?
하지만 왕이삼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일단 관을 따라가서 지상으로 빠져나갈 출입구를 찾읍시다.”
“그다음은? 설마 우리 둘만 도망치자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오. 우리가 출입구를 찾고 있는 동안 소년도 지하에서 탈출할 것이오.”
“…….”
왕이삼도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청의인 말대로 걱정하고 있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될 터였다.
서백의 능력은 잘 알고 있었다. 망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지하를 탈출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서둘러 통로를 빠져나간 뒤 서백이 탈출하는 것을 돕는 방법을 찾는 게 지금 해야 할 일!
“그럼 이동합시다.”
“좋소.”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발을 뗐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서백이 떨어질 때 왜 이공자라는 말을 한 거요?”
“그 소년이라면 이해할 것이오.”
“나는 이해 못 할 거란 말이오?”
왕이삼이 분통이 터지려고 하는데 청의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차분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측간 복도를 헤매던 것 기억하오?”
“당연하지. 몇 시진이나 지났다고 그걸 까먹겠소?”
“그럼 제갈세가 이공자가 복도에 어떤 술책을 꾸며놓았는지도 기억하오?”
“그건 설마… 기문둔갑 술법?”
왕이삼이 목소리를 떨며 묻자 청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소년이 떨어진 지하에도 분명 제갈세가 이공자가 술법을 부려 놓았을 것이오.”
* * *
한 점의 빛도 없는 어둠 속을 서백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스으으윽.
서백의 발소리는 내공 고수가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만큼 희미했다.
망자는 빛이나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서백은 바닥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보법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서백은 오른손으로 검을 쥔 채 검신을 어깨 뒤로 넘겨서 비스듬히 세우고 있었다.
보통 무림인이라면 검의 무게에 눌려서 훨씬 전에 팔이 마비되었으리라.
그러나 검을 쥔 서백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만약 앞에서 마주치는 망자가 서백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그대로 검을 휘두를 태세.
서백이 떨어진 망자 소굴은 위의 통로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었다.
마음껏 검을 휘둘러도 벽면에 닿을 염려는 없었다.
설령 벽이나 천정에 검날이 닿는다고 해도 그대로 갈라버리고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망자 창궐을 이용하고 있는 제갈세가의 건물.
무너진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닥치는 대로 난동을 피워도 상관없는 상황.
‘그거 하난 마음에 드는군.’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지만 서백의 현 상황은 사실 목숨을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백을 둘러싼 전후좌우에 망자들이 비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석가심결을 시전했기 때문에 서백은 망자들의 몰골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청의인이 말하길 하나같이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무림인이었다는 망자들.
풍운일검 탁상도는 서백의 검만큼이나 큼지막한 박도를 등에 멘 채 정처 없이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왕이삼이 알아맞힌 사파의 고수 곽칠도 있었다.
대머리에 독수리 문신이 있기 때문에 서백은 한눈에 곽칠을 알아봤다.
그밖에도 생전에 이름 좀 날렸으리라 여겨지는 무림인 망자들이 지하를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간다?’
서백은 안광을 돋우며 어둠 속을 살폈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곳에 통로로 보이는 곳이 희미하게 보였다.
망자들이 배회하는 이곳은 넓은 공터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공터 한복판을 가로지른 건너편에 있는 통로가 지하를 벗어나는 출입구일 터.
통로는 어딘가로든 이어질 것이다.
지상으로 이어지든, 아니면 또 다른 지옥으로 이어지든 간에.
서백은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저기로 간다.’
계획을 세우자 서백은 지체 없이 발을 움직였다.
스으으윽.
서백이 움직인 방향은 뜻밖에도 풍운일검 탁상도 쪽이었다.
만약 왕이삼이 옆에 있었다면 스스로 망자한테 접근하면 어떡하냐고 기겁했을 움직임.
서백은 탁상도에게 접근한 것도 모자란지 아예 그의 뒤에 바싹 붙었다.
세 걸음만 더 나아가도 탁상도의 등짝에 코를 박을 법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망자를 잘 알고 있는 서백에게는 최대한 효율을 쥐어짠 움직임이었다.
‘이게 공터를 빠져나가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커다란 용구도를 등에 메고 있는 바람에 탁상도의 몸은 걸을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망자들은 혼백이 없지만 괜히 자극해서 좋을 리 없다. 게다가 제갈세가가 잡아 둔 망자들이니 어떤 특이한 점이 있을지 모르는 일.
그런데 탁상도의 뒤를 따라가자 반대로 서백이 그와 마주칠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또한 큰 박도를 든 탁상도가 앞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다른 망자들도 저절로 서백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책!
서백이 신경 쓸 것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탁상도와 걷는 속도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뿐.
그 정도 보법은 서백에게 일도 아니었다.
스스스스.
왕이삼이 옆에서 봤다면 기가 막혔으리라.
망자를 피해서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망자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는 서백. 그런데 그것이 망자판 한가운데를 유유히 통과할 수 있는 비법이라니!
될 놈은 된다고 운도 따랐다.
탁상도가 걷는 방향이 마침 공터 건너편의 통로 쪽이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탁상도만 따라가도 자연스레 망자판을 통과해서 통로에 도착할 터.
주위는 썩어서 문드러지고 있는 망자들의 살점 때문에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어떤 망자는 지하에 갇힌 지 오래 됐는지 두 눈알이 없는 대신 그 텅 빈 구멍 속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말 그대로 생지옥 구렁텅이.
그러나 서백의 움직임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했다.
어느새 탁상도와 서백은 공터의 삼분지이를 가로질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통로에 도착하는 상황.
아쉽게도 운은 거기서 다했다.
비틀거리며 걷던 탁상도가 갑자기 두 발을 딱 멈춘 것이었다.
터덕.
그의 뒤에 바싹 붙어서 이동하던 서백은 즉시 낌새를 느끼고 발을 멈췄다. 망자 등짝에 코를 박는 일은 물론 벌어지지 않았다.
잠깐 발을 멈췄던 탁상도는 비틀거리며 몸을 틀더니 걷는 방향을 왼쪽으로 바꿨다.
탁상도가 일직선으로 끝까지 걸어갔다면 대박이었으리라. 하지만 세상일은 운이 좋게만 흘러가지 않는 법.
‘여기까지군.’
서백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미련을 가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으니까.
이어서 탁상도가 왼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서백은 슬쩍 그의 뒤를 빠져나와 이동 방향을 수정했다.
물론 공터 건너편에 있는 통로 쪽으로.
만약 다른 망자가 탁상도처럼 통로를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인다면 그의 뒤에 따라붙어서 이동하면 된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배회하는 망자들의 움직임은 불규칙적으로 보여서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서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혼백 없는 망자들이 아무렇게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망자들의 움직임이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것은 산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달려들 때나 그렇다.
다른 때는 망자도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짐승은 서로 무리를 이루어서 몰려다닌다. 하물며 곤충도 그러지 않는가.
망자 역시 마찬가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망자들은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습성이 있었다. 오죽하면 망자 떼라고 부를까.
서백은 눈앞에서 배회하는 망자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봤다.
곧이어 망자들이 움직이는 동선이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졌다.
‘저기다.’
서백은 망자 하나가 지나간 곳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이어서 망자를 다섯 걸음 뒤따라가다가 몸을 왼쪽으로 돌려서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계속해서 망자들의 움직임에 따라 전진과 후퇴, 방향 전환을 하며 이동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인 격.
그러자 서백은 망자들의 이동을 전혀 거스르지 않은 채 무리 속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었다.
망자들은 코앞에 서백이 스쳐지나가도 냄새를 맡기는커녕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지하에는 수많은 망자들이 있었지만 서백의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백은 망자들 틈새를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서백이 이동하고 있는 위치가 조금씩 통로와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뭐지?’
예상 못한 상황에 서백은 일단 이동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망자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바람에 멈춰 있을 수가 없었다. 서백은 방금처럼 다시 망자들 속에 끼어들었다.
그러던 중 상황이 왜 잘못되었는지 깨달았다.
목표를 향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일직선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망자들을 피해야 하니 갈 지(之) 자 모양처럼 좌우로 이동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문제는 망자들이 오른쪽에서 계속 몰려온다는 것이었다.
갈 지 자 이동법은 한 번 왼쪽으로 갔으면 다음은 오른쪽으로 가야 방향이 맞는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이동하려고 하면 망자들이 몰려와서 방향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방향은 점점 더 왼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그게 몇 번 거듭되자 서백은 원을 그리며 공터를 한 바퀴 도는 셈이 되었던 것이다.
통로로 가는 게 아니라 제자리를 맴돈 것!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혼백이 없는 망자, 즉 혈귀는 자기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지금 망자들의 움직임은 언뜻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실은 일사불란하게 서백을 한쪽으로 몰고 있었다.
‘그렇다면…….’
망자들을 조종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
그게 무엇일까?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지하로 떨어질 때 청의인이 일갈했던 한 마디.
-이공자!
제갈세가 이공자 제갈혁.
단순히 그를 조심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지하의 망자 소굴에도 제갈혁이 술책을 부려 놨을 거라고 경고한 말!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망자들은 제갈혁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게 틀림없었다.
‘망자들을 조종하는 게 가능한가?’
순간 서백은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망자의 비밀을 담은 서책이 있다. 흑랑성에서 나온 흑랑비서다.
스승은 흑랑비서로는 망자를 완벽하게 퇴치할 수 없다고 하셨다.
애초에 흑랑비서는 망자 퇴치가 아니라 망자 조종법을 기록한 서책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혼백이 없는 망자를 조종한다. 즉 기문둔갑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는 기문둔갑으로 중원에 이름을 떨치는 제갈세가의 본관 융중.
‘그렇다면…….’
제갈혁이 어떤 기문둔갑을 펼쳐 놨는지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
서백은 망자들의 이동을 거스르지 않고 물살에 몸을 맡기듯이 움직였다.
그러자 망자들의 움직임에서 규칙을 발견했다.
‘역시 그랬었군.’
서백은 제갈혁이 망자를 부리는 기문둔갑의 비밀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