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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54화 (54/123)

54화 제갈세가 이공자의 음모(3)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갈세가를 적으로 삼자고?

제갈세가는 중원 오대세가 중 손꼽히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본관까지 오는 동안 몇 번씩 거쳐야 됐던 기관진식. 본관 곳곳에 모습을 숨긴 채 잠복해 있는 무사들. 사람을 홀리는 기문둔갑 술법 등등.

그런데 지금 제갈세가의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이자는 말인가?

지금은 호랑이굴이 아니라 호랑이 입속에 들어와 있는 셈. 즉 당장 싸움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왕이삼은 서백을 진정시키려고 슬며시 말했다.

“그냥 못 본 척하고 소림사나 가면 안 될까? 아니면 적어도 여기를 빠져나간 뒤에 싸우는 게…….”

“안 됩니다.”

서백은 한 마디로 왕이삼의 제안을 묵살했다.

“소림사로 가는 건 망자 창궐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망자 창궐을 이용하는 자를 그냥 놔둔다고요? 설령 소림사에서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저런 자들 때문에 중원에는 다시 망자가 창궐할 겁니다.”

“쩝, 그런가…….”

왕이삼은 입맛을 다시며 입을 다물었다.

서백도 청의인도 일단 말을 꺼내면 논리정연해서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말은 못하지만 왕이삼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럼 나만 빼 주면 안 되나… 일단 물어라도 볼까?’

그때 서백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선배님, 같이 싸우실 거죠?”

“다, 당연히 그래야지, 암!”

서백에 기세에 눌린 왕이삼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어쨌든 놀라운 사실이었다.

명문정파의 절정 고수는 아니지만 무림에서 이름 꽤나 날린다는 인물들이 망자가 된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왜 제갈세가의 지하를 배회하고 있는가였다.

그때 어떤 생각이 왕이삼의 뇌리를 스쳤다.

“잠깐! 저 망자들 설마…….”

“뭔가 알아낸 게 있는 모양이오?”

“저 망자들, 최근 십 년 동안 무림에서 하나둘 실종된 자들이오!”

왕이삼의 말에 평소 무심하던 서백과 청의인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저자들은 내가 알기로는 공통점이 있소.”

왕이삼이 서백과 청의인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왕이삼이 몸담은 무림은 명문정파와 오대세가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무공을 빌려 주고 궂은일을 하는 도검수의 무림이었다.

자연히 도검수들은 무림의 밑바닥 소문에 귀가 밝았다. 물론 왕이삼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적을 만드는 게 무림인의 숙명.

어떤 무림인이 일이 년 자취를 감추고 있으면 사람들은 적을 피해서 잠시 잠적했다고 여겼다.

만약 몇 년 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적에게 칼침을 맞아서 죽었다고 보는 게 보통이었다. 또는 명문정파의 고수가 하급 무림인을 응징했다는 소문이 떠도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지하 통로의 망자들은 누구 하나 죽었다는 소문이 나지 않았다.

즉 무림에서 어느 날 홀연히 실종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망자가 되어 제갈세가의 지하를 방황하고 있을 줄 그 누가 꿈이나 꾸었을까?

왕이삼의 설명을 듣고 청의인이 말했다.

“본인은 운남으로 낙향한 지 몇 년이 넘어서 현재 무림 사정을 정확히 모르지만 확실히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렇다니까.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이 끊긴 자들이오.”

“제갈세가가 잡아 두었군.”

“대체 왜…….”

“그건 본인도 알 수 없소.”

둘의 대화가 길어질 때 서백이 끼어들며 말했다.

“굳이 이유를 알 필요는 없습니다.”

서백의 눈빛이 여느 때와 달리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왕이삼은 서백이 저렇게 얼음처럼 차가울 때야말로 진짜 화났을 때라는 걸 잘 알고 있는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백은 다음 말을 꺼내지 않고 몸을 돌려 통로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왕이삼과 청의인도 그 뒤를 따랐다.

“당신 후배는 망자가 엮이면 분노를 참지 못하는 모양이오.”

청의인의 말에 왕이삼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후배가 저래 봬도 한 번 화나면 무섭소.”

“그런 것 같군. 그게 저 소년의 강점이자 약점이 될 것이오.”

“…….”

‘강점이면 강점이고 약점이면 약점이지, 동시에 둘 다 될 거라는 게 당최 무슨 소리냐?’

왕이삼은 입을 열고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대신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어둠 속을 걸었을까.

선두로 걷던 서백이 갑자기 발을 멈추며 말했다.

“천정에 관이 있군요. 본관에서 사자상으로 목소리를 전달하는 관이 이것일 겁니다.”

“……!”

왕이삼이 시선을 올리자 대나무처럼 생긴 철제 관이 천정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서백이 기름불을 들어서 천정에 연결된 관을 비추며 말했다.

“이 관을 따라가면 사자상이 위치한 곳이 나오겠군요.”

서백 말대로 관은 복도 길을 따라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었다.

“하지만 후배, 다른 곳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아닙니다. 지금 걷는 방위가 정남향이니 이 길이 직선으로 이어진다면 정확히 사자상이 있던 곳과 연결됩니다.”

“…….”

왕이삼은 재차 입을 다물었다.

서백의 말이 믿기지 않는 게 아니라 기가 막혀서였다.

지하로 내려와서 어둠 속을 이동하고 있는 판에 방위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청의인이 아무 말 없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서백의 의견에 동감하는 게 분명했다.

마치 고수 두 명이 서로 합을 나눌 때 중간에 낀 삼류 무림인이 어리둥절하는 것 같은 광경.

“사자상까지 가면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숨은 출입구가 있을 겁니다. 일단 지상으로 올라가서 건물에 숙식 중인 무림인들에게 제갈세가의 흉계를 알립시다.”

“그래 봤자 죄다 삼류 무림인들뿐인데 도움이 될까?”

“직접 도움이 되지 않아도 손해는 아니겠죠. 그들이 제갈세가 편을 드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러자 청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본인 생각도 그렇소.”

왕이삼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어련하시겠어! 그래, 나는 하수라서 네놈들 마음속에 무슨 구렁이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이쪽으로.”

서백은 천정을 향해 고개를 든 채로 기름불을 들고 이동을 재개했다.

그때 청의인이 눈썹을 찡그리며 일갈했다.

“정지!”

말과 동시에 서백의 움직임이 인형처럼 딱 멈췄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서백 발 아래의 통로 바닥이 밑을 향해 열리면서 발 지탱할 곳이 사라진 것이다.

덜컹.

제갈세가의 또 다른 기관진식!

졸지에 서백의 몸은 허공에 붕 뜬 셈이 되었다.

하지만 서백은 그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발밑이 꺼지는 찰나 서백은 몸을 질풍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이어서 회전으로 얻은 힘에 몸을 싣고 발을 뻗어서 벽면을 강하게 찼다.

벽을 차서 생기는 반탄력으로 함정을 벗어나려는 임기응변의 수법.

그러나 기관진식은 바닥이 꺼지는 함정이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바닥처럼 문이 열린 천정에서 반짝이는 거미줄 같은 것이 서백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것이다.

촤아아아.

거미줄의 정체는 은빛 철사로 만든 그물이었다.

서백은 검잡이를 쥐었지만 대검을 휘두르기에는 공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임기응변을 펼쳤다.

대검을 모두 뽑는 게 아니라 손바닥 한 뼘만 검날이 나올 만큼만 뽑아서 떨어지는 은사 그물에 갖다 댄 것이었다.

은사 그물은 추락하는 힘을 못 이기고 검날에 잘려서 중간에 올이 나갈 터.

그때 찢어진 그물의 틈새를 뚫고 빠져나가자는 게 서백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서백의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제갈세가가 장인에게 명해서 직접 제조한 은사는 십성의 내공을 실은 일검이 아니면 토막 낼 수 없을 정도로 질기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채챙.

은사는 검날에 잘라지기는커녕 검날을 튕겨냈다.

결국 서백은 은사 그물을 전신에 뒤집어쓰고 말았다.

후배가 함정에 빠지자 왕이삼은 물불 가리지 않고 박도를 들고 달려들려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바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청의인의 인영이 사라져 있는 게 아닌가?

휙.

왕이삼이 박도를 잡기도 전에 몸을 날린 청의인은 공중에서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방금 찰나의 순간에 청의인은 제갈세가의 은사가 검으로 쉽게 자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걸 감지한 그는 검을 뽑지 않은 채 검집째로 뻗어서 서백을 향해 내밀었다.

“이걸 잡아!”

은사 그물을 자를 수 없으니 일단 서백이 아래로 떨어지는 걸 막자는 의도였다.

서백이 손을 내밀어 검집을 잡았다.

…아니, 잡을 뻔했지만 그전에 다른 일이 벌어졌다.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은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철컹.

어느새 천정에서 쇠창살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청의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집을 뻗었지만 쇠창살이 더 빠르게 앞을 가로막으며 떨어졌다.

터엉.

천정에서 내려온 쇠창살이 바닥에 꽂히자 서백과 청의인 사이에 마치 감옥벽이 생긴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청의인은 포기하지 않고 창살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때 은사 그물이 서백을 옭아맨 채 빠른 속도로 아래로 끌어당겼다.

은사 그물은 그냥 천정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끝이 아래쪽으로 연결되어서 사람을 포획횄을 때 자동으로 감기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촤아아아악.

거미가 거미줄을 뒤집어쓴 먹잇감을 낚아채듯이 은사 그물은 서백의 전신을 칭칭 감고서 지하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후배!”

왕이삼이 뒤늦게 달려왔지만 쇠창살에 가로막혀서 아무 도움이 못 됐다.

그때 서백을 향해 청의인이 뜻 모를 말을 일갈했다.

“이공자!”

그러나 서백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대답도 없이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 * *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으로 떨어지면서 서백은 허공에서 몸을 회전했다.

은사 그물이 전신을 옭아매고 있어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바닥에 두 발로 착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찰나 서백은 임기응변으로 아래쪽을 향해 등을 돌렸다.

텅. 바닥에 등이 닿았다.

순간 서백은 몸을 둥글게 말며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회전력으로 추락하는 속도를 줄여서 안전하게 착지하는 경공인 대붕전시(大鵬轉翅)를 응용한 동작.

은사 때문에 사지가 자유롭지 않자 오히려 몸을 둥글게 말아서 낙법을 시전한 것이다.

그 동작 하나로 서백은 멍든 곳 하나 없이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떨어지면서 몸을 회전하느라 기름불이 꺼졌기 때문에 지하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서백은 뒷걸음질 치듯이 뒤로 바닥을 기었다.

곧 벽면이 맞닿은 모서리에 등이 닿았다.

‘됐다.’

지금 떨어진 지하는 망자들이 떠도는 곳.

망자를 상대할 때 사방이 트인 곳은 가장 위험하다. 사방팔방에서 망자들이 뛰어들면 피할 곳이 없어서 포위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벽에 등을 대면 상황은 조금 나아진다.

뒤가 막혀 있으니 전방의 망자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처럼 모서리에 있는 것.

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 구석을 등지고 있으면 망자가 덤벼드는 방향이 절반으로 줄어드니까.

유리한 위치를 점한 뒤 서백은 다음으로 석가심결을 시전했다.

팟.

서백의 두 눈이 은은한 촛불을 켠 것처럼 어둠 속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바로 지하를 배회하는 망자들!

그러나 들킬 염려는 없었다.

숨결과 표정을 조심하는 것은 잠자면서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또한 떨어질 때 상처를 입지 않았으니 피 냄새 걱정도 필요 없었다.

서백은 몸에 얽힌 은사 그물을 천천히 벗었다.

은사 그물은 지하로 떨어지면서 연결된 부분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벗을 수 있었다.

그물에서 몸을 빼낸 뒤 은사를 바닥에 놓으려고 하던 서백은 손을 멈췄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은사 그물을 차곡차곡 접어서 옷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검날이 닿아도 끊어지지 않는 은사 그물.

제갈세가가 제작한 것이니 훗날 쓸 일이 있을 터.

‘그거 하난 고맙군.’

서백은 어둠 속 망자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앞으로 할 일을 계획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망자굴에서 탈출한다.’

그다음 할 일은?

‘제갈혁의 야욕을 박살 낸다.’

함부로 망자를 이용한 제갈혁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아주 값비싼 대가를.

스윽.

서백은 어깨에서 대검을 내린 뒤 망자들이 배회하고 있는 어둠 속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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