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청의를 걸친 남자(3)
잠시 후 서백과 왕이삼은 인영과 마주하고 섰다.
인영은 다름 아니라 중앙 천막에서 왕가 요새의 불안함을 지적했던 청의인이었다.
왕이삼은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불평을 터뜨렸다.
“제길! 그런 데서 우두커니 서 있으니 사람이 안 놀라?”
그러나 청의인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왕이삼을 조용히 쳐다볼 뿐이었다.
청의인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대하자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쳇, 눈에 칼을 박아 놨나…….”
왕이삼이 발을 빼자 서백이 청의인에게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보시다시피.”
청의인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짓으로 요새 문을 가리켰다.
“일단 문부터 닫아야겠군요.”
그러자 왕이삼이 서백을 말렸다.
“후배, 잠깐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요새 문이 열려 있으니 당연히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방벽을 지키는 무사들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
“그것도 당연하죠. 무사들이 있었다면 문이 열린 채 놔둘 리 없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서백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었다.
왕이삼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괜히 놀라서 비명을 지른 자신이 부끄러웠다.
서백은 방벽으로 걸어간 다음 요새의 이중문을 닫는 기관장치 앞에 섰다.
물레방아를 가로로 눕혀놓은 모양의 기관장치는 네 개의 자루가 박혀 있어서 무사 네 명이 힘을 합쳐서 돌리는 형태였다.
그런데 서백이 자루를 잡고 힘을 쓰자 기관장치가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었다.
끼이이익. 덜컹덜컹덜컹.
왕이삼은 서백을 도우려고 했지만 어느새 기관장치는 몇 바퀴를 돌아서 문이 내려온 뒤였다.
서백은 요새 안으로 들어와서 이번에는 두 번째 문의 기관장치를 돌렸다.
왕이삼은 이번에야말로 도우려다가 청의인이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네놈은 뭐냐? 돕지는 못할망정 구경이나 하고 있고!”
“그러는 당신도 멀뚱히 보기만 했지 않소?”
“그건 후배가 너무 빨리 돌리는 바람에…….”
“저 소년의 외공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하고 있었소.”
“…….”
청의인의 말투가 너무나 태연하고 당당하자 왕이삼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외공만으로 저 정도이니 내공을 싣는다면 상당한 수준이겠소.”
“헹, 그걸 이제야 아셨나? 저 녀석이 나랑 사천에서부터 함께한 동료라고!”
청의인이 서백을 칭찬하자 왕이삼은 어깨가 으쓱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청의인은 멈추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짐승 가죽을 덧댄 피풍의는 망자 대비용 같소.”
“잘 보셨군. 저 녀석이 유비무환의 전형이지.”
“등에 멘 대검은 체구에 비해서 지나치게 큰데 망자를 베기 위해 특별 제작한 검인가 보군.”
“그 생각은 못 해 봤는데…….”
“내공심법만 받쳐 준다면 망자를 쓰러뜨리는 데 최적화된 검이오.”
“눈썰미 한 번 좋군. 저래 봬도 저 녀석이…….”
신바람을 내며 맞장구치던 왕이삼은 무언가를 깨닫고 말을 삼켰다.
‘잠깐. 처음에는 서백을 칭찬하는 줄 알았는데 하는 말이 점점 수상해지는걸?’
그랬다. 청의인의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서백을 속속들이 살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림에서는 자신의 장점을 숨기는 게 중요하다.
적과의 승부에서 일검에 목이 떨어지는 것이 무림.
때문에 명문정파에서는 목숨의 위기가 아니면 비전 무공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또한 타문파의 비전 무공은 훔쳐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법도가 존재한다.
그런데 서백의 장점을 유심히 살피는 자가 있다?
만약 그자가 서백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라면?
‘치려면 지금 쳐야 한다.’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허리춤에 찬 박도로 슬며시 손을 내렸다.
그런데 청의인의 한 마디 말에 그만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냥 지켜보는 것뿐이니 박도를 들 필요는 없소.”
‘…어떻게 알았지?’
청의인은 왕이삼보다 몇 발짝 앞에 서 있으며 줄곧 서백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왕이삼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모두 알고 있다니?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왕이삼은 무림밥을 오래 먹었지만 눈앞의 청의인 같은 기인이사(奇人異士)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서백이 이중문을 닫고 돌아와서 말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습니다.”
“잘했소.”
청의인이 서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왕이삼은 속으로 괜한 트집을 잡았다.
‘이놈은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칭찬만 늘어놓네.’
왕이삼은 청의인과 얘기하느라 자신 역시 서백을 돕지 않았다는 것은 깜빡 잊고 있었다.
어느새 동이 트기 시작하자 요새 안쪽에서 무림인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침 먹을 시간도 안 됐는데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는군. 요새라서 그런가?”
“해도 뜨고 있겠다, 선배님 귀곡성도 들었으니 잠이 안 깨는 게 이상하죠.”
“쩝, 내 목소리가 그렇게 컸나.”
공동 숙소가 방벽 근처에 있기 때문에 왕이삼의 비명과 이중문이 바닥에 떨어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무림인들이 잠에서 깬 것이었다.
무림인뿐 아니라 피난민들도 여기저기서 하나둘 방벽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중 한 명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요새 문이 열려 있어서 닫았습니다.”
서백의 대답에 무림인들이 서로 쳐다봤다.
“무사들은 어디 가고 말이냐?”
“아무도 없습니다.”
“뭐라고? 왕씨세가의 무사들이 삼개조로 나눠서 방벽을 밤낮 없이 지키는 걸로 아는데?”
무림인들이 술렁거리고 있을 때 청의인이 나서며 말했다.
“왕씨세가의 가주는 물론 그와 손잡은 문파인들은 모두 요새를 떠났소.”
“떠나? 어디로?”
“어디인지는 본인도 모르오.”
무림인들은 청의인의 말뜻이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무림인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요새를 버리고 도망쳤군요. 그럴지 모른다고 예상은 했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서백이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싸늘한 눈빛의 청의인과 약관도 안 된 소년이 하는 말이니 누구 하나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림인 하나가 반박하고 나섰다.
“왕씨세가의 가주 왕충은 명예를 소중히 하는 분이니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러자 청의인이 고갯짓으로 방벽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그럼 삼개조로 방벽을 지키는 무사들은 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오? 또한 옆에 마구간이 있는데 말 울음소리는 왜 안 들리는 것이오?”
“…….”
무사가 말문이 막혔을 때 다른 무사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중얼거렸다.
“맞아. 내 잠자리 옆이 마구간이라 매일 잠을 설쳤는데 오늘 아침은 왠지 조용하다 싶더니 마구간에 말이 한 마리도 없더군.”
“……!”
그 말에 무림인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직 현실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뭔가 사정이 있겠지. 왕씨세가가 도망쳤다는 증거라도 있냐?”
그러자 청의인이 한 마디로 단언했다.
“있소.”
“뭐라고? 그게 뭐냐?”
“말을 읽었소.”
“말을 들은 게 아니라 읽었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
“사람이 말할 때 입술의 움직임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읽을 수 있소.”
청의인이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그걸 보고 서백이 말했다.
“독순술이군요.”
독순술(讀脣術). 상대가 말할 때 입술의 모양을 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는 수법.
청의인이 서백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말을 계속했다.
“어제 중앙 천막 회의 때 중간에 들어온 무사가 왕충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보고를 하더군. 망자 떼가 요새로 접근하고 있으니 당장 피해야 됩니다라고.”
“……!”
“방벽은 그렇다 치고 요새 안에서 왕씨세가의 무사들을 본 사람이 있소? 하루아침에 그들이 전부 어디로 갔단 말이오?”
이제 무림인들은 더 이상 청의인의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린 게 시작이었다.
“망자가 무서워서 야반도주했군.”
무림인들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앞에 닥친 현실을 깨닫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왕씨세가와 몇몇 문파가 손잡고 세운 왕가 요새.
그러나 망자 떼가 접근하자 그들은 요새와 피난민들을 버리고 자기들만 도망친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왕씨세가를 칭송하던 무림인들은 상황을 깨닫고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랏밥을 먹는 관리도 병사들을 끌고 도망치더니 명문정파 놈들도 다 똑같군!”
“관도 무림도 믿을 놈 하나 없다!”
“명문정파라고 별 거 있나? 태평성대일 때 입으로만 명예를 지키는 놈들이지!”
어느새 방벽 앞은 사람들이 시장바닥처럼 운집해 있었다. 무림인뿐 아니라 객잔 점소이 같은 피난민들도 소란을 보고 하나둘 몰려든 것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요새 안에 있으면 안전하겠지?”
“안전하긴 개뿔! 왕씨세가도 나 몰라라 도망쳤는데 안전하겠냐?”
난리통에 간신히 자리를 잡은 피난민들은 그 말에 망연자실했다.
망자 창궐로 무너진 세상의 질서.
그나마 사람들은 무림인들이 질서를 다시 세워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왕씨세가는 뒤통수를 때렸다.
무림인들은 세상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의 이득을 위해 무공을 쓸 뿐…….
왕씨세가의 배신을 깨닫자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서, 또한 절망에 좌절해서 소란을 떨었다.
서백은 그런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무림인들이 대략 일이백. 피난민들까지 합치면 수백이 넘는다.’
이들을 모두 피신시킬 방법은?
문제는 요새로 접근하는 망자 떼였다.
왕씨세가가 한밤중에 야반도주한 것으로 볼 때 요새는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위험한 상황일 것이다.
망자 떼가 사람들을 덮친다면 결국 무공이 고강한 몇몇 무림인만이 살아남을 것이 뻔했다.
‘사람들을 살릴 방법은 없는 건가? 그렇다면…….’
희생을 피할 수 없다면 몸을 피해서 소림사행을 재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터.
한참을 욕하던 사람들은 누군가 외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빨리 도망치자!”
순간 사람들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왕씨세가도 버린 요새에 망자 떼가 오고 있다.
-당장 도망가야 목숨을 건진다!
와아아아아!
무림인 피난민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방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중문을 올리는 기관장치에 매달렸다.
그러나 서백 혼자서 돌린 기관장치에 네 명이 아니라 그 이상이 붙어도 이중문은 느릿느릿 간신히 움직였다.
“문 빨리 열어!”
사람들은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그 앞으로 밀물처럼 몰려갔다.
그런데 인영 하나가 팔짱을 낀 채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앞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청의인이었다.
“당신 뭐야? 빨리 비켜!”
“그럴 순 없소.”
“뭐야? 빨리 안 비키면…….”
“지금 요새를 나가면 모두 죽소.”
“뭐라고?”
사람들은 청의인의 말에 흠칫 놀라며 동작을 멈췄다. 아니, 그의 말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을 보고 발을 멈춘 것일지도 몰랐다.
수백 명의 발을 말 한 마디에 멈추게 만든 청의인.
그가 이번에는 기관장치를 돌리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만두시오. 문을 열면 망자가 들어올지 모르오.”
“……!”
그 말에 사람들은 흠칫 놀라서 기관장치에서 손을 뗐다.
설마 망자가 요새 문 밖에 있다는 말인가?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왕씨세가가 한밤중에 말을 몽땅 끌고 야반도주한 이유는 망자 떼가 코앞까지 도달해서였을 테니까.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오직 서백만이 머릿속에서 모든 사실을 하나씩 꿰맞추고 있었다.
‘청의인이 독순술로 왕씨세가의 배신을 읽었는데 미리 말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순간 서백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그런 것이었군.’
서백은 왜 청의인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진상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