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왕가 요새(3)
무림인들이 놀란 것은 서백의 몸에 망자에게 물린 상처가 나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서백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도검으로 먹고사는 무림인이라면 몸에 검상 두셋쯤은 있는 것이 당연한 일.
그런데 검상은커녕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무림에서 그런 자는 둘 중 하나였다.
무림인이랍시고 강호에 막 나온 애송이.
아니면 상대의 검을 허용한 적이 없는 고수!
무림인들은 직접 보면서도 자기 눈을 의심했다.
정말 저 소년이 몸에 검 한 번 스쳐 본 적 없는 고수란 말인가?
무림인들이 놀란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의 몸이 엄청난 근육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백은 키와 체구가 어른보다 작은 만큼 우락부락한 근육질 신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부피만 큰 근육보다 저렇게 날렵하고 미끈하게 빠진 몸이 훨씬 다부지다는 사실을!
왕이삼도 서백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사천에서 함께 왔지만 마치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대체 어려서부터 어떤 수련을 받았길래 저런 몸을 만든 거지?
서백이 자기 신체보다 큰 검을 마구 휘두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저런 몸이라면 무신 관우의 팔십이 근 청룡언월도도 수수깡처럼 다룰 테니까.
반면 왕이삼은 옷을 벗자 불룩한 배가 나왔다.
그는 자신의 술배를 보며 생각했다.
-외공으로는 후배한테 안 되겠군. 아니, 그냥 막힘을 써도 내가 지겠는데.
왕이삼은 새삼 서백한테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백과 왕이삼이 옷을 벗자 수장이 다가와서 망자에게 물린 상처가 없는지 살폈다.
잠시 후 조사가 끝났다.
“둘 다 멀쩡해 보이는군. 왕가 요새의 출입을 허락하오.”
“감사합니다.”
서백은 무덤덤하게 인사한 뒤 옷을 입었다.
둘이 옷을 입자 방벽을 막고 있던 두 번째 문이 덜컹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그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가 보였다.
바로 왕가 요새였다.
“따라오시오.”
왕씨세가 무사가 서백과 왕이삼을 안내한 곳은 암벽 근처의 구석진 곳에 있는 공동 숙소였다.
“잠은 저기 있는 숙소에서 해결하시오. 무림인들을 위해 마련한 공동 숙소이니 비용은 따로 치를 필요 없소.”
“알겠습니다.”
“신시(申時)에 회의가 있으니 관심 있으면 요새 중앙에 있는 왕씨세가의 천막으로 오시오.”
왕씨세가 무사는 그 말을 남긴 뒤 가 버렸다.
서백과 왕이삼은 공동 숙소를 구경하러 갔다.
그런데 숙소를 본 왕이삼은 바로 불평을 터뜨렸다.
“쳇, 여기서 자라고? 장강삼협에서 노숙하느니만 못하겠군.”
그의 불평도 일리가 있었다.
말이 숙소지 나무 기둥을 바둑판처럼 격자로 세운 뒤 낡은 천을 씌운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바닥에는 볏짚단으로 짠 돗자리가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돗자리 배치는 자다가 한 바퀴 구르면 다른 사람과 포개질 만큼 비좁았다.
“이거야 비만 피할 수 있지 옆에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겠군.”
“망자 걱정 안 하고 잠드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쩝.”
“시간은 많으니 구경이나 하죠.”
따로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천막에 짐을 두고 다니기도 불안했다.
결국 서백과 왕이삼은 여장을 풀지도 못하고 짐을 그대로 짊어진 채 요새 구경을 나섰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병장기를 들고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거리 양옆에는 잡상인들이 판대를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통나무를 엮어서 급조한 티가 나지만 이 층 건물도 종종 보였다.
망자 창궐이 통째로 바꾸어 놓은 중원.
하지만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다.
망자 창궐 지역을 떠난 피난민들은 한데 뭉쳐서 눈앞의 요새나 관문처럼 방벽을 세워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거 대도시에 비하면 규모는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왕가 요새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마침 거리 옆에 객잔이 보이자 서백이 말했다.
“시간도 남았는데 국수나 한 그릇 먹죠.”
“좋지. 술도 한 잔 해야겠군.”
둘이 객잔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 점소이가 달려왔다.
그런데 점소이는 서백과 왕이삼이 말도 안 했는데 자기가 알아서 주문을 했다.
“여기 국수 두 그릇이오! 술은 몇 잔 드실 거요?”
“잠깐. 국수 말고 다른 식사는 없나?”
“망자 피난 처음 하시오? 이런 요새에서는 국수 하나밖에 안 팝니다. 이 난리통에 산해진미를 찾는다면 딴 데 가시오.”
“알았다. 국수 둘에 술 한 잔.”
“선금이오.”
왕이삼이 등짐에서 은원보 하나를 꺼낸 다음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데 잔돈 거슬러 줄 수 있나?”
그런데 점소이가 피식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선 은자 안 받소.”
“뭐야? 돈을 왜 안 받아?”
“이 난리통에 은자가 산만큼 있으면 뭐합니까? 여기서는 물건만 받소.”
“물물교환만 한다는 말이냐?”
“그렇소.”
“그럼 뭘로 지불을 하면 좋냐?”
“가장 좋은 건 도검이오. 금창약도 받고 있소.”
“도검과 금창약을 내고 국수를 먹으라고? 허!”
왕이삼이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도검이 무림인의 손발이라면 검상을 치료하는 금창약은 무림인의 목숨이다.
그런데 고작 국수 두 그릇에 병장기와 금창약을 넘기라고 하니 객잔의 횡포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 난리통에 그만한 값을 치르지 못하겠으면 국수는 꿈도 꾸지 마시오.”
점소이는 말마다 난리통을 강조했다.
생각해 보면 점소이 말도 이해가 됐다.
망자 창궐로 세상이 뒤집혔는데 누가 은자를 받고 귀중한 식량을 준단 말인가? 굶주렸다고 은자를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망자 창궐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세상의 법칙이었다. 은자를 안 받는 객잔처럼.
왕이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하고 있을 때 서백은 점소이의 눈빛을 살핀 뒤 말했다.
“대금은 이걸로 치르겠습니다.”
서백이 점소이에게 내민 것은 등짐에 묶어뒀던 멧돼지 가죽이었다.
서백은 멧돼지를 잡고 구워먹은 뒤 가죽을 벗겨 놓았다. 수색대를 따라오느라 시간이 부족해서 모든 부위를 벗기진 못했지만 짐승 가죽은 언제 어디서든 귀한 물품이었다.
실은 서백은 점소이가 멧돼지 가죽에 눈길을 준다는 것을 눈치 채고 물물교환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점소이가 말을 흘리며 대답했다.
“뭐 나쁘진 않은데…….”
“대신 국수 세 그릇에 술도 두 잔 주십시오.”
“뭐라고? 그렇게는 못하지. 이 난리통에 고작 가죽 쪼가리 가지고 국수를 먹겠다는 거냐?”
점소이가 팔짱을 끼며 배짱을 부렸다.
서백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왕이삼에게 말했다.
“선배님, 다른 객잔 가시죠.”
“응? 그러지 뭐…….”
그러자 점소이가 얼른 서백과 왕이삼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이고, 힘들게 어딜 가시려고! 그냥 앉으시오. 국수 세 그릇에 술 두 잔 내오면 될 거 아니오?”
서백과 왕이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멧돼지 가죽을 받은 점소이는 국수와 술을 가지러 갔다.
“후배는 흥정도 잘하는군.”
“아무리 멧돼지라도 가죽은 가죽이니 제값을 받아야죠.”
멧돼지 가죽은 털이 거칠고 냄새가 고약해서 공들여 무두질을 하지 않으면 큰 값어치가 없다.
하지만 점소이 말대로 이 난리통에서는 그만한 가죽도 귀한 값어치를 한다.
서백은 그걸 바로 눈치 채고 점소이와 흥정을 한 것이었다.
곧이어 국수와 술이 나왔다.
“자, 먹자고!”
“맛있게 드십시오.”
둘은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은 다음 그릇째 입에 대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몇 입 먹지 않았는데 둘은 점수 매기기에 돌입했다.
“평생 먹은 양춘면 중 가장 맛대가리 없군.”
“양춘면은 닭을 푹 삶은 국물에 잘게 썬 쪽파 고명을 올려야 되는데 쪽파는 보이지도 않고 국물은 싱겁군요.”
“나는 이 양춘면에 불합격 주겠네.”
“저도 동감입니다.”
삼 일을 굶어도 멧돼지 고기를 품평하던 서백 일행.
곧 죽어도 미식에 목숨 거는 둘에게 피난민 숙수가 부족한 식재료로 만든 싸구려 양춘면이 입에 맞을 리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멧돼지 가죽을 구워 먹을 걸 그랬어.”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둘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멧돼지 고기 말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지가 며칠 전이기 때문에 결국 게 눈 감추듯 국수를 먹어치웠다.
배를 채우고 객잔을 나오자 신시가 되어 있었다.
“신시군요. 요새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러 가죠.”
“당연하지. 무림인은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가 보자고.”
서백과 왕이삼은 요새 중앙에 있다는 왕씨세가의 천막을 찾아갔다.
왕씨세가의 천막은 비만 막을 수 있는 공동 숙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삼각형 모양을 한 천막은 일이백 명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랬다. 또한 두터운 천으로 되어 있어서 비바람을 막는 것은 물론 내부가 포근하고 따뜻했다.
왕이삼은 그답게 또 불평을 했다.
“제길! 무림인이면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더니.”
“왕씨세가에서 세운 요새이니 이 정도는 눈감아 줘야죠.”
“나도 같은 왕씨인데. 그나저나 명문정파 아니라고 내쫓는 거 아냐?”
그 생각은 기우였다.
천막 입구를 지키는 무사는 뜻밖에도 흔쾌히 서백과 왕이삼을 들여보냈던 것이다.
“들어가시오.”
“정말 들어가도 되오?”
“물론이오. 왕가 요새는 신분을 따지지 않소. 요새 운영을 돕고 싶은 무림인은 문파와 소속을 따지지 않고 참가해도 좋소.”
“허! 오랜만에 보는 진짜 명문정파로군!”
방금까지도 불평을 늘어놓던 왕이삼은 표정을 싹 바꿔서 왕씨세가를 칭찬했다. 도검수 출신인 그는 내심 감격했는지 무사들에게 포권지례까지 올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반면 서백은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는 자들을 조심해라. 그들은 자신의 신분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중원 무림을 팔아먹고도 남을 족속이다.
왕씨세가가 정말 소림사처럼 중원의 안정을 위하는 곳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서백은 왕이삼을 따라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은 이미 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문파와 소속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은 일단 사실인 것 같았다. 무림인들의 복장이 각양각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수색대도 복장이 제각각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생각했나?’
서백은 왕씨세가를 좀 더 두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천막 중앙에는 단상이 있었고 그곳에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왕씨세가의 인물들과 왕가 요새를 지배하고 있는 군소 문파의 무림인들이었다.
회의는 이미 한참 진행되었는지 여러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현재 왕가 요새로 접근하는 망자 떼는 없소. 수색대를 계속 파견했지만 요새 근처에서는 망자 떼를 찾을 수 없었소.”
단상의 가운데 있는 인물이 말하자 주위 무림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왕가 요새의 주인 격이자 왕씨세가의 가주인 왕충이었다.
왕충은 얄상한 얼굴에 길게 턱수염을 기른 모습이 무림인보다는 글공부 깨나 한 문사처럼 보였다. 정중한 말투와 기품 있는 목소리가 그런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왕가 요새는 문파와 소속에 상관없이 무림 동도들의 도움을 받고 있소. 의견이 있는 자는 주저 말고 말씀하시오.”
왕충이 말했지만 바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말은 차별은 안 한다고 하지만 왕가 요새의 실질적인 주인 앞에서 함부로 끼어들기에는 다들 뒤가 켕겼던 것이다.
혹시라도 왕씨세가의 눈 밖에 나는 날에는 큰일이 아닌가?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자 왕충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겠소. 수색대는 항상 모집 중이니 누구든 요새 일을 도와주시오.”
“왕씨세가 천세!”
단상에서 왕충 옆에 앉은 자가 크게 소리치자 무림인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왕충은 가볍게 손을 들어서 답례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천막 안에 울려 퍼졌다.
“왕가 요새는 망자를 막기에 부적합하오.”
막 몸을 돌리던 왕충은 물론 천막 안의 모든 무림인이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서백과 왕이삼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낡은 청의를 걸친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