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질풍무사-43화 (43/123)

43화 왕가 요새(2)

유소운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왕이삼이었다.

“함께 못 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다. 나는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허! 보아 하니 왕씨세가에 대단한 연줄이라도 있나 보군!”

왕이삼이 내심 실망했는지 불평을 터뜨렸다.

서백은 왕이삼과 달리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왕씨세가와는 볼일 없다. 단지 왕가령에 볼일이 있을 뿐이지.”

“왕가령에 찾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역시 서백은 속일 수 없군.”

유소운의 말은 왕가령에 사람을 찾으러 떠난다는 것이었다. 왕이삼도 그걸 깨닫자 자기가 오해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물었다.

“누굴 찾는데? 우리도 함께 가면 되잖아?”

“그건 무리다.”

유소운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왕가령까지 최소 일주일 거리니 왕복하면 보름이 걸린다. 서백에게 짐을 지울 수야 없지.”

“끄응…….”

서백이 소림사행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은 왕이삼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더 불평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왕가령에 내가 찾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불명확한 일에 자네들까지 동행하자고 부탁할 수는 없는 일.”

“먼저 운남으로 찾아갔다는 분 말입니까?”

“아니, 왕가령에서 찾을 사람은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우친 선생이다. 예전에 흘려들었는데 왕가령이 선생의 고향이라고 하셨던 것 같군.”

유소운의 설명은 명쾌했으나 왕이삼은 여전히 불만을 지우지 못하고 말했다.

“고향? 다 큰 놈이 고향에 남아 있겠냐?”

“그래서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선생이라면 먹물 먹은 놈이겠군.”

“도술을 쓰는 선생이다.”

“도술? 어디서 굴러먹던 말코도사 하나 있나 보군.”

왕이삼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렸다.

서백과 유소운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동료를 아끼는 왕이삼이 유소운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동행은 못하지만 선생을 찾은 뒤 곧장 북상할 테니 소림사에서 볼 수 있겠지.”

“빨리 찾으시면 도중에 만날 수도 있겠군요.”

“그럼 더욱 좋고.”

유소운은 바닥에 내려놨던 활과 활통과 봇짐을 등에 멨다.

“제갈세가에 가면 내 이름을 대고 무림맹에서 일공자 임무를 맡고 있다고 해라. 분명 편의를 봐줄 거다.”

“알겠습니다.”

그때 왕이삼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말했다.

“참! 은자는 어떡하고?”

“잘 보관했다가 소림사에서 돌려 주시지.”

“그전에 내가 다 써 버리면?”

“은자 한 푼까지 쳐서 빚을 받아 낼 거다.”

“에라이 매정한 놈!”

말은 그렇게 해도 왕이삼은 여전히 아쉬운 눈빛이었다.

“그럼 소림사에서 보자.”

“몸 조심하십시오.”

유소운은 한 차례 눈빛 인사를 나눈 뒤 횅하니 몸을 돌려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왕이삼이 이번에는 서백에게 불평을 했다.

“사천에서 여기까지 동행한 동료와 헤어지는데 후배는 아쉽지도 않은가?”

“어차피 다시 만날 것 아닙니까. 정말 아쉬운 것은 영원한 작별입니다.”

서백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어딘가 딱딱했다.

그 한 마디를 던지고 서백이 몸을 돌리자 왕이삼은 영문을 몰라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뭐 실수했나?”

서백이 왕이삼에게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한 것은 화가 나서가 아니라 석가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사모님, 사형사제들.

그들은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영원히 작별한 것이다.

서백은 유소운이 사라진 숲을 보면서 생각했다.

‘소림사에서 다시 만납시다. 반드시.’

* * *

무림인들이 멧돼지 고기를 다 먹자 서백과 왕이삼은 불을 끈 다음 그들을 따라 길을 나섰다.

고기를 먹을 때 잠시 긴장을 늦췄던 무림인들은 다시 삼엄한 태세를 갖추었다.

언제 어디에서 망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반면 서백과 왕이삼은 태연하게 숲을 걸었다.

왕씨세가 소속이었다는 무림인이 그런 둘을 보고 왕이삼에게 물었다.

“왜 그리 태연하시오? 여기는 망자 창궐 지역으로 눈앞에서 망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인데.”

“이 근처는 망자가 없소.”

“그걸 어찌 아시오?”

“뭐 다 아는 수가 있소.”

실은 왕이삼이 태연한 것은 서백 덕분이었다.

만약 망자가 나타난다면 서백이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릴 게 뻔하다. 그런데 서백이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으니 왕이삼은 안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무림인은 왕이삼이 배짱이 두둑한 것으로 착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서백을 힐긋 보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강호를 돌아다니다니 고생이 많소.”

“어린 아이? 뭘 모르시는군. 내가 평생 본 무림인 중 가장 강한 검객이오.”

“저런 꼬마가 무슨…….”

무림인이 그 말은 믿지 못하겠는지 피식 웃었다.

서백과 왕이삼이 요새에 도착한 것은 무림인들을 따라 숲을 통과한 지 한 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여기가 바로 왕씨세가가 세운 왕가 요새요.”

왕가 요새는 삼면이 암벽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해 있었다.

망자는 일부러 높은 곳에 오르거나 험지를 통과하지 않는다. 즉 요새에 접근하려면 암벽으로 둘러싸이지 않은 입구를 거쳐야 한다.

그 입구에 통나무를 줄줄이 세워서 높은 방벽을 세워놓았다. 또한 끝을 뾰족하게 자른 나무들을 비스듬히 세워서 땅에 박아놓았다.

고슴도치 가시처럼 솟아 있는 통나무벽.

망자 떼가 접근할 경우 싸움에 대비한 것이었다.

지형을 이용한 최적의 요새!

왕이삼이 요새 방벽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촉도관보단 못하지만 제법 괜찮은걸?”

하지만 서백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잘 만든 요새지만 너무 낡았군요. 촉도관처럼 수만 구의 망자 떼가 들이닥치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겁니다.”

서백이 검지로 방벽 곳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역청을 칠하지 않은 생나무라 비바람에 썩은 곳이 많습니다. 망자 떼가 밀어붙이면 반 시진이면 구멍이 뚫릴 겁니다.”

“그런가?”

“입구는 방비가 튼튼하나 방벽 전체에 경비가 서기에는 인원 부족에 시달릴 것 같군요. 망자 떼가 방벽에 도달하기 전에 미리 발견하기 힘들다는 뜻이죠.”

“쩝. 생각해 보니 그렇군.”

“촉도관도 함락됐으니 돌이나 나무 방벽으로 망자 떼를 막겠다는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제길! 당최 어떡해야 그놈의 망자들 좀 퇴치할 수 있는 거냐고?”

왕이삼이 불평을 터뜨렸으나 서백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걸 위해서 소림사로 가는 겁니다.’

무림인들이 다가가자 입구를 지키는 자들이 통나무를 이어서 만든 문을 수직으로 들어 올렸다.

덜컹덜컹덜컹.

문이 위로 올라갔지만 요새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 문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즉 왕가 요새의 입구는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서백과 왕이삼은 무림인들을 따라 방벽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등 뒤에서 첫 번째 문이 닫혔다.

왕씨세가 무림인이 요새 사람들에게 서백과 왕이삼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러자 입구를 지키는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서백과 왕이삼을 보며 말했다.

“왕가 요새에 온 걸 환영하오. 왕가 요새는 무림인들이 힘을 합쳐서 망자 떼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곳으로 문파 소속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자를 막지 않소.”

그런데 상황이 수장의 말과 다르게 흘러갔다.

무림인들이 수장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벽쪽을 향해 양옆으로 물러섰다.

다음 순간 요새의 수장과 무사들이 서백과 왕이삼을 향해 일제히 창을 겨누었다.

척!

창뿐이 아니었다. 방벽 뒤편에 높이 서 있는 망루에서도 무사들이 시위에 활을 매기고 서백과 왕이삼을 겨냥했다.

조금만 수틀려도 당장 창을 찌르고 화살을 쏘아 붓겠다는 태세.

상황이 돌변하자 왕이삼이 분통을 터뜨렸다.

“찾아오는 자는 안 막겠다더니 이게 무슨 횡포냐?”

그러자 수장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왕가 요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 조건은 바로…….”

“망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겠죠.”

누군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수장의 말을 끊고 방벽에 울려 퍼졌다. 무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서백이었다.

“함부로 망자를 들였다가 요새 전체가 감염되는 날이면 끝장이니까요. 이해합니다.”

“…….”

무사들은 정곡을 찔렸는지 서백을 멍하니 쳐다봤다.

얼핏 보기에 약관도 안 된 소년.

그런데 망자를 색출하기 위한 과정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다니…….

대검을 등에 멘 소년을 보고 처음에는 비웃었던 무사들도 이제 서백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수장이 팔짱을 끼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잘 알고 있군. 그럼 망자가 아닌지 확인하겠소.”

그러자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우리 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망자에게 물린 상처가 몸에 없는지 확인할 테니 옷을 벗으시오.”

“옷을 벗으라고?”

“물론이오.”

“나랑 지금 장난해? 여기서? 홀랑?”

“실 한 오라기 남기지 말고 모두 벗으시오.”

왕이삼은 어이가 없어서 서백을 돌아봤다.

그런데 서백은 어느새 등짐을 내리고 피풍의를 벗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왕이삼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의혈방 놈들도 그랬잖아?’

서백과 사천에서 처음 만났을 때 진석평과 의혈방 패거리가 사람들 옷을 벗기며 망자 색출을 하던 것이 기억났다.

“후배, 이거 꼭 벗어야 될까?”

“다른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없군.”

서백의 대답은 단호했다.

왕이삼은 민망해서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반면 서백은 재빠르게 훌훌 옷을 벗어 던지며 생각했다.

왕이삼과 달리 서백은 왕가 요새가 제법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망자의 존재는 몰라도 혈귀에 대한 대비는 그럭저럭 하고 있군.’

입구를 지키는 무사들이 들고 있는 창은 강철로 된 촉이 없이 그냥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것이었다.

무림인이 무공을 겨룰 때는 효능이 떨어지겠지만 망자 떼를 상대할 때는 꽤 쓸모 있는 병장기.

게다가 철이 필요 없으니 돈을 쓰지 않고 많은 창을 양산할 수 있을 터. 망자 상대로 가성비 좋은 최적의 병장기였다.

‘방벽만 수리한다면 제법 괜찮은 요새인데.’

반대로 요새가 괜찮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망자에 대해 두려워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즉 망자가 창궐한 수도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을 벗는데 왕이삼이 말했다.

“잠깐. 여인도 요새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할 거 아냐?”

“그래야겠죠.”

“후배 먼저 들어가 있게. 나는 여인이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가 나중에 들어갈 테니.”

“훔쳐보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훔쳐보다니 나를 뭘로 보는가! 요새 규칙이 그렇다는데 보이는 걸 안 볼 수도 없고 나야 아무 잘못 없지, 흠흠!”

왕이삼은 헛기침을 하며 발뺌을 했다.

그러자 서백이 구석에 있는 무사들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저기 있는 무림인은 여인으로 보이는군요. 여인이 요새에 오면 저들이 따로 확인을 할 겁니다.”

“쩝. 좋다 말았군.”

왕이삼은 혀를 차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서백이 겉옷과 속곳까지 모두 벗고 알몸이 되었다.

“준비됐으니 확인하십시오.”

순간 왕이삼과 요새의 무사들 모두는 서백의 몸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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