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왕가 요새(1)
왕이삼이 서백한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서백 녀석 대체 왜 저러는 거지?”
“글쎄. 논어 때문이 아닐까?”
“논어? 네놈 또 무슨 흰소리를 늘어놓는 거냐!”
유소운마저 뜻 모를 말을 하자 왕이삼은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유소운은 그런 왕이삼을 놔두고 서백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은 좋은 동료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과거를 봤지만 무과 급제를 못 하고 무림을 떠돌아다닌 지 어언 십여 년.
간혹 과거에 붙은 자들은 유소운에게 위로를 한답시고 이렇게 얘기했다.
-자네는 실력은 있는데 운이 없군.
-실력만 믿지 말고 연줄부터 만들라고.
-연줄을 어떻게 만드냐고? 뇌물을 줘야지 맨입으로 되나!
하지만 중원 땅에서 혈연도 연고도 없는 유소운이 연줄을 만들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유소운은 지난날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흑랑성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동료 하나는 잘 만나고 있으니까.
강호에 나와서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친우들과 만났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친우가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유소운은 논어를 중얼거리면서 서백을 바라봤다.
서백은 천리형에게서 얻은 철장방의 신물과 비급을 손일서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자신보다 키는 작지만 서백의 등은 그 어떤 사내보다 넓고 듬직해 보였다.
저 등이 자신의 앞에 있다면 목숨을 건 싸움터에 있더라도 두렵지 않을 터.
손일서 일행은 서백에게 포권지례를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하오! 천리형 일당을 제거한 것도 모자라 신물과 비급까지 찾아주었으니 철장방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린 것뿐입니다.”
“두고 보시오. 어머니가 계신 손씨세가에게 도움을 받아 철장방의 위세를 꼭 되찾고 말겠소!”
손일서는 당찬 아이답게 가슴을 치며 장담했다.
곧이어 서백 일행은 그들과 작별을 고했다.
서백 일행은 철장산으로 향하는 손일서 일행을 배웅했다. 유일한 여인인 축영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백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왕이삼이 말했다.
“정말 저 꼬마가 철장방주 자리에 오를까?”
“모르죠. 무림 일에 절대라는 건 없지 않습니까.”
냉랭하던 서백의 분위기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방도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것 같으니 잘해 내겠지.”
유소운이 그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을 거야.”
그 말에 서백과 왕이삼도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자 창궐로 기존 질서가 무너진 무림.
장강삼협수로채도 철장방도 마찬가지였다.
강호의 정리보다는 힘이 우선하고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왕이삼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철장방처럼 제법 이름 있는 방파까지 저러니 나머지는 오죽하겠냐.”
“호들갑 떨 일은 아니지. 무림은 원래 그랬으니까.”
유소운의 말이 정답이었다.
“소림사행을 서둘러야겠습니다.”
“무림 일을 돕겠다며 속도를 늦춘 게 누군데? 자, 빨리 가자고!”
왕이삼이 앞장서자 서백과 유소운은 서로를 보며 씨익 웃은 다음 뒤를 따라갔다.
* * *
철장방 사건이 있은 지도 며칠이 지났다.
서백 일행은 지도를 살피면서 복잡한 협곡을 통과했다. 그러나 무사히 길을 가는가 싶던 일행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한 숲속.
그 숲을 서백, 유소운, 왕이삼이 세 방위를 맡아서 소리 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셋은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병장기를 쥐고 있었다.
각각 대검, 박도, 활.
눈앞에 무언가 나타나는 순간 당장에라도 도륙해 버릴 기세.
곧이어 서백이 목소리를 죽여서 속삭였다.
“옵니다.”
“얼마 남았냐?”
“십 장 정도 됩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구 장, 팔 장, 칠 장…….”
목표가 일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공격이 실패하면 우리는 죽는다.”
“당연하죠. 반드시 놈을 쓰러뜨려야 합니다.”
왕이삼과 서백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시작하지.”
유소운이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귀밑까지 잡아당겼다. 끼기기긱. 짐승의 뿔로 만든 활이 한계까지 잡아당겨지자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 서백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수신호를 했다.
“지금입니다.”
피이이잉. 유소운이 시위를 놓자 화살이 바람보다 빠르게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계속해서 그는 연속으로 삼 연발 화살을 쐈다.
동시에 왕이삼이 고함을 지르며 돌격했다.
“으아아아!”
고도의 집중력. 일사불란한 움직임.
목표를 향한 셋의 집념은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세 발의 화살이 모두 적중하자 목표가 괴성을 울부짖었다.
꿰애애액액!
목표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적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왕이삼을 발견하고는 땅바닥을 구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투타타타타!
엄청난 속도로 일행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망자… 가 아니라 멧돼지였다.
왕이삼이 멧돼지의 어깨에 박도를 박았다. 콰직. 그리고 몸을 날려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멧돼지의 돌진을 피했다.
멧돼지는 기세를 멈추지 않고 달려서 나무를 들이받았다. 쿠웅.
그러나 쓰러지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렸다. 과연 산속의 패왕이라 불릴 만한 맷집!
푸르르륵. 독이 오른 멧돼지는 도리질을 한 다음 재차 왕이삼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 나무 위로 올라갔던 서백이 아래로 뛰어 내리며 멧돼지의 목을 베어 버렸다.
뎅겅. 털퍼덕.
서백의 일도양단에 목이 떨어진 멧돼지가 통나무 쓰러지듯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잡았다!”
왕이삼이 신바람을 내며 외쳤다. 망자 떼를 도륙했어도 이보다 더 기쁘지는 않았을 터.
셋은 쓰러진 멧돼지 앞에 모여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군.”
그랬다. 서백 일행은 협곡을 빠져나온 뒤 며칠 동안 간신히 물만 마셔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철장방에서 얻은 식량은 다 떨어진 지 오래.
간혹 인가가 나왔지만 망자 창궐로 피난 가느라 텅텅 비어 있었다. 때문에 쌀 한 톨 못 먹고 굶주린 채 걸음을 옮겼다.
게다가 들판을 떠도는 망자 떼가 곳곳에 즐비했다.
잘못 들켰다가 망자 떼에 포위되면 끝장이다.
결국 망자가 보이면 멀리 길을 돌아가야 했고, 제갈세가로 향하는 일정은 점점 느려지기만 하던 중이었다.
그런 참에 멧돼지를 발견한 것은 동굴에서 천하제일 무공비급을 발견한 것보다 더욱 기쁜 일!
“삶아 먹을까, 구워 먹을까, 생으로 먹을까?”
“돼지고기는 익혀서 먹어야 됩니다.”
“근처에 물이 없으니 구워 먹는 걸로 하지.”
“좋다! 오늘 저녁은 멧돼지 통구이다!”
셋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식사 준비를 했다.
서백은 화섭자로 불을 피웠고, 왕이삼은 장작을 모아 왔으며, 유소운은 단검으로 멧돼지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제거했다.
잠시 후 숲을 지배하던 멧돼지는 불에 지글지글 끓는 기름을 뚝뚝 흘리며 구워졌다.
“잘 먹겠습니다!”
멧돼지 고기는 질기고 냄새가 심했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셋은 정신없이 멧돼지 고기를 뜯으며 굶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나 어느 정도 배가 차자 기운이 생긴 셋은 맛을 따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굶주렸어도 멧돼지 고기는 입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좀 더 센 불에 구울걸 그랬나? 고기가 너무 질겨서 턱이 다 아프군.”
“술이 있었으면 야들야들할 때까지 푹 쪄서 잡내를 없앴을 텐데 말야.”
“사모님이라면 사천의 갖은 향신료를 넣어서 고기의 감칠맛을 살리셨을 겁니다.”
죽은 멧돼지가 들었으면 열불이 터졌을 대화.
그런데 서백과 유소운이 갑자기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하자 나뭇가지로 이빨을 쑤시던 왕이삼이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배 잘 채우고 왜들 그러냐?”
순간 숲속에서 검을 든 인영 여섯 명이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서백과 유소운은 등을 맞댄 채 검과 활을 겨누며 인영들과 대치했다.
“뭐, 뭐야?”
왕이삼은 그제야 깜짝 놀라며 이쑤시개를 뱉었다.
서백은 재빠른 시선으로 인영들을 살폈다.
인영들은 황의, 청의, 흑의 등을 걸치고 있어서 복장이 통일되지 않았다. 또한 누구는 두건을 두르고 누구는 상투 튼 머리인 등 제각각이었다.
적어도 같은 문파인은 아니었다.
문파가 같지 않은 여섯 명이 합공을 펼치는 것은 무림에서는 보기 드문 일.
‘녹림인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망자 창궐로 소속이 없어진 삼류 무림인들이 힘을 합쳐서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다면 그게 녹림이지 무엇이겠는가?
다행이 녹림은 아닌 듯했다.
여섯 명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검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서백 일행을 훑어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망자는 아닌 것 같군.”
그들이 검을 내리고 공격할 의사를 보이지 않자 맞설 이유가 사라졌다. 서백도 검을 내린 뒤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우리는 사천에서 온 일행으로 제갈세가로 가는 중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제갈세가로 간다는 말을 듣자 무림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우리는 망자 떼의 이동을 정찰하러 요새에서 나온 수색대다.”
그 말에 왕이삼이 씨익 웃으며 나섰다.
“다들 망자가 아니니 같은 편이군! 이 근처에서 망자는 못 봤으니 멧돼지 고기나 한 점 드시오.”
“…그래도 되겠소?”
“물론이오. 우리는 배터지게 먹은 참이니까.”
왕이삼이 넉살 좋게 권하자 무림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장작불 주위에 모여 앉았다.
셋이 배부르게 먹었으나 커다란 멧돼지는 반의반도 못 먹은 상태.
왕이삼은 나무에 통째로 꽂은 멧돼지를 장작불에 돌리면서 뜨겁게 익혔다. 그런 다음 박도로 큼지막하게 썰어서 무림인들에게 한 조각씩 나눠줬다.
무림인들은 허겁지겁 멧돼지 고기를 먹었다.
“고기가 너무 질기고 냄새는 고약하군.”
“불평하지 말고 먹어 둬라. 고기 먹어 본 적이 대체 언제냐.”
“하긴 그렇지.”
서백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두 가지를 추리했다.
‘저들의 요새란 곳은 적어도 식량 부족에 시달리진 않는군.’
양념도 안 된 멧돼지 고기가 입에 맞지 않아서 불평을 하지만 먹고는 있다. 즉 평소 고기만 먹지 못할 뿐 배를 굶주리진 않는다는 뜻.
그리고 하나 더.
사실 이게 더욱 중요한 추리였다.
‘저들은 망자를 잘 모른다.’
수색대는 서백 일행을 포위했으나 망자가 아닌 것을 보고 검을 내렸다.
즉 산 사람만 보면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혈귀만 봐온 게 뻔했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산 사람들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진석평이나 천리형 같은 망자다.
진짜 망자와 혈귀를 구분 못하는 것을 보면 요새는 망자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 요새에 망자가 숨어든다면?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터.
무림인들은 맛이 없어서 불평하면서도 멧돼지 고기를 배부르게 먹었다.
“잘 먹었소.”
“어차피 남는 고기인데 서로 나눠 먹어야 하지 않겠소? 하하하!”
“당신들 제갈세가로 간다고 했소?”
“그런데?”
“제갈세가라면 우리 요새를 거쳐 가면 되오.”
그 말에 유소운과 왕이삼이 서백을 돌아봤다.
일행의 수장은 엄연히 서백이니 결정하라는 뜻.
“요새에 들어가서 하루 쉬었다 갈 수 있습니까?”
“물론이다. 망자만 아니면 상관없다.”
“그럼 하룻밤 신세를 지겠습니다.”
서백이 결정을 내리자 왕이삼이 신바람을 냈다.
“오랜만에 차가운 밤이슬 맞지 않고 잘 수 있겠군! 고맙소!”
“우리 왕가 요새는 모두 힘을 합쳐서 망자 떼를 막기 위해 모인 곳이오. 무림인은 누구나 환영하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순간 유소운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왕가 요새? 혹시 왕가령에 있는 왕씨세가 말이오?”
그러자 무림인 중 한 명이 나서서 대답했다.
“맞소. 본인이 왕씨세가의 무사였소.”
“왕가령은 여기서 가깝소?”
“아니, 여기서 정남쪽으로 걸어서 일주일쯤 걸리오. 망자 떼를 피해 간다면 더 걸릴지도 모르겠군.”
“…….”
유소운이 말없이 침묵하고 있자 왕이삼이 궁금한지 물었다.
“왜 그러냐? 왕씨세가와 연줄이라도 있냐?”
“연줄은 없지만 볼일은 있지.”
유소운은 뜻 모를 말을 던지더니 다시 침묵했다.
서백은 유소운이 겉으로 보기엔 태평하지만 속은 누구보다 깊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재촉하지 않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유소운이 침묵을 깨고 꺼낸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서백, 아무래도 나는 소림사에 함께 가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