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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39화 (39/123)

39화 추격대의 비밀(4)

서백의 말을 들은 천리형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복수? 후후후… 크하하하하!”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는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철장방의 일이다! 애초에 하찮은 부방주 자식 놈을 방주로 추대하는 게 말이 되냐? 게다가 그 애새끼는 철장방의 신물과 비급을 훔쳐서 달아났다고!”

천리형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무림에서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대의명분이다.

문파가 무림에서 인정받는다는 증거인 신물은 가장 중요한 보물. 때문에 무림에서는 신물을 둘러싼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백은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제가 들은 얘기와 다르군요. 옛 방주가 부방주의 아들을 후계자 삼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꾸며 낸 거짓말을 믿느냐? 그보다 방주와 부방주가 모두 죽어서 없는데 그 말을 어떻게 증명할 거냐?”

뜻밖에도 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사람은 말을 못 하는 법이죠.”

“잘 아는군.”

“그래서 철장방의 방주와 부방주가 망자 떼에 휩싸일 때 그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겁니까?”

“뭐라고?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그럼 당신은 그날 어떻게 탈출했습니까?”

“어떻게라니? 죽어라 뛰어서 도망쳤지.”

“혹시 방주와 부방주를 죽이려고 일부러 망자 떼를 유인한 것은 아닙니까? 그 둘이 없으면 철장방은 당신의 손아귀에 떨어지니까 말입니다.”

“개소리 그만하고 닥쳐라!”

천리형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자충은 그런 천리형을 지켜보며 서백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아버지인 방주와 사사건건 불화가 끊이지 않던 천리형.

중원을 떠도는 수천수만 구의 망자 떼에 휩쓸리면 살아서 빠져나가기 힘들다. 만약 포위되는 경우 모든 방도는 뒤를 막고 방주 먼저 탈출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천리형은 혼자만 살아 돌아왔으니…….

천리형이 아버지의 죽음을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친 것은 틀림없었다. 천리형의 성품은 그러고도 남았다.

어쩌면 손일서를 후계로 삼은 것도 그래서일까?

방주는 아들에게 배신당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부방주와 그의 아들에게 철장방을 넘겨주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것 말고도 이상한 점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뭐냐?”

“추격대가 쫓는 도망자는 평범한 도검수, 무공을 모르는 여인, 어린 아이입니다. 협곡까지 올 동안 추격대 열두 명은 뭘 했길래 그 셋을 못 잡았습니까?”

“놈들이 산길을 잘 아는지 미꾸라지처럼 잘도 도망치더군.”

“여인이 사냥덫을 밟았는데 산길을 잘 안다고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천리형이 어깨를 으쓱하자 서백이 다음 의문점을 제시했다.

“하나 더. 도주 경로를 짐작하고 있으면서 왜 추격대를 삼개조로 나누었습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넓게 흩어져서 포위망을 만드는 건 간단한 병법 아니냐? 후후후.”

천리형이 모처럼 여유를 되찾았는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서백의 질문을 듣고 있던 자충은 기분이 꺼림칙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철장방은 개망나니인 천리형보다 손일서를 새 방주로 추대하자는 자가 적지 않았다. 단지 천리형이 이끄는 무사들이 무공이 뛰어나기에 다들 숨죽이고 있을 뿐.

그들이 손일서의 탈출을 도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고작 무사 하나에 여인과 어린 아이다. 제 시간에 추격했다면 반나절이면 따라잡기에 충분했을 터.

문제는 천리형이 아침밥까지 챙겨먹으며 여유를 부렸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도망자가 숨기 좋은 협곡까지 와야 했고 결국 하룻밤을 밤이슬이 차가운 협곡에서 노숙해야 됐다.

처음에 자충은 천리형의 성품 때문이라고 여겼다.

일부러 늑장을 피우는 것은 목숨을 거는 도박처럼 사냥감을 추격하는 재미를 갑절로 늘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말인가?

서백이 자충의 의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말을 계속했다.

“일부러 시간을 끌고 인적 드문 협곡으로 추격대를 이끈 이유는 방도들을 속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방도들을 속여?”

“주위에 보는 눈이 적을 것. 몰래 일을 실행할 수 있도록 외지에서 밤을 보낼 것. 들통날 경우를 대비해서 인원을 적은 수로 쪼갤 것. 모두 방도들을 속이려고 꾸민 술책이죠.”

“별 개소리를 다 듣겠군. 나는 철장방의 방주가 될 몸인데 방도들을 속일 이유가 어디 있냐? 하하하하!”

천리형이 웃음을 터뜨리자 자충과 방도도 함께 웃었다.

그러나 서백은 웃지 않았다.

“망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혼백 없는 혈귀와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망자입니다. 혈귀는 산 사람을 무작정 공격하지만, 망자는 산 사람들 틈에 숨어서 기회를 노립니다.”

“갑자기 망자 얘기는 왜…….”

“사람만 동료가 있는 게 아닙니다. 망자들이 서로 물어뜯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들이 같은 동료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

“제 추리는 이렇습니다. 방주와 부방주가 망자 떼에 죽었을 때 당신도 그들과 함께 죽었을 겁니다. 단 당신은 혈귀가 아니라 망자가 되었던 겁니다.”

“…….”

“당신은 정체를 숨기고 철장방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방도들을 모두 망자로 만들기엔 숫자도 많고 보는 눈도 많았겠죠.”

“…….”

“그때 도망자가 나오자 심복들을 추격대로 선발해서 철장산을 떠난 겁니다.”

“…….”

“이후 협곡에서 네 명씩 조를 나눠 숙식했으니 한밤중에 방도들을 같은 망자로 만들기는 쉬웠겠죠.”

“…….”

“모든 게 당신이 방도들을 동료로, 즉 같은 망자로 만들기 위해 꾸민 술책입니다.”

“…….”

서백이 길게 말을 늘어 놨으나 천리형은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협곡으로 보낸 추격조 네 명은 목을 베었지만 망자가 아니더군요. 하지만 당신과 계속 붙어 다닌 세 명은 분명 망자로 만들었겠죠.”

계속해서 서백이 자충과 방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스스로 느끼지 못할 뿐 이미 죽었을 겁니다.”

“……!”

자충과 방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침묵했다.

그러다가 방도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그런 개소리는 삼십 평생 처음 듣는구나! 증거라도 있냐…….”

그러나 방도의 웃음소리는 서백의 한 마디에 뚝 그치고 말았다.

“있습니다.”

서백이 엄지를 세워서 목을 가로로 긋는 시늉을 했다.

“제 추리가 맞다면 당신들의 목에 검으로 벤 흔적이 있을 겁니다.”

“멀쩡한 목에 무슨 놈의 검흔이…….”

방도는 웃음을 흘리며 자충을 돌아보다가 말을 삼키고 말았다. 자충이 방도의 목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거참 기분 이상하게 형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저 꼬마 말을 믿는 건 아니죠?”

“…….”

“형님?”

그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방도의 얼굴이 새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자충의 목 둘레에 새빨간 금이 둥글게 나 있는 것이 아닌가?

검흔은 잘 벼린 검을 썼는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가늘었다. 서백의 말이 아니었다면 못 보고 넘어갔을 것이다.

방도는 무심코 고개를 내렸지만 자신의 목은 볼 수 없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그러자 자신의 목에도 얕은 검흔이 가로로 나 있는 게 손끝에 느껴졌다!

“아문 지 얼마 안 돼서 붉은 검흔이 남아 있는 겁니다. 옷깃을 올려서 목을 숨긴다면 당신들이 망자인 걸 알아채는 자는 아무도 없겠죠.”

서백의 말에 방도는 아무 대꾸도 못하다가 천리형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꼬마 말이 사실입니까?”

“…….”

“방주님!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주십시오…….”

순간 한 줄기 검광이 방도의 목을 스쳐지나갔다.

방도는 목에 뜨끔한 느낌을 받고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시야에서 세상이 기우뚱 기울다가 곧 바닥이 보였다.

털퍽. 방도의 목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천리형이 검으로 순식간에 베어 버린 것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자충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땅에 떨어진 방도의 목이 두 눈알을 뒹굴 굴려서 천리형을 쳐다봤다. 그리고 잘린 목이 살아 있는 것처럼 입을 열어서 말했다.

“방주님? 지금 제 목을 베신 겁니까? 왜요?”

“…….”

“제가 망자라니 그럴 리가… 아니죠? 저 꼬마가 미쳐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거죠? 그렇죠?”

“쓸모없는 놈.”

“아니라고 말하십시오!”

방도가 턱뼈가 빠질 만큼 입을 벌리고 일갈했다.

순간 그의 입속에서 수십 개의 문어발 같은 혈선충 다발이 꿈틀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쐐애애애액!

“으아아악!”

바로 옆에 있던 자충이 경악하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꾸웨에엑… 바앙주우… 왜애 내애 모글… 베엔 거시이오오…….”

방도가 혈선충이 꿈틀거리는 입으로 말을 하자 발음이 새서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서 그걸 보는 자충은 공포에 질려서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뒤로 기어갔다.

그때 천리형이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목은 다시 붙이면 되니까 걱정 마라.”

“……!”

천리형의 말에 자충은 재차 경악했다.

자충은 망자가 잘린 목을 어깨 위에 올리자 다시 붙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서백의 말이 맞다는 뜻인가?

자충이 목소리를 덜덜 떨며 물었다.

“방주… 방주가 망자라는 게 사실입니까……?”

“자충, 내 오른팔이 돼서 함께 철장방을 접수하고 중원 무림을 지배하자.”

“먼저 대답을… 저 소년의 말이 정말입니까……?”

“하아,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

천리형의 한숨 섞인 말투는 서백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천리형이 망자인 것을 숨기면서 자충과 방도들을 망자로 만들었다는 뜻!

자충은 손을 벌벌 떨면서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그는 천리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 몇 년 간 공을 들였다.

그런데 파락호 천리형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철장방의 실세가 되려던 꿈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잠을 자는 사이 목이 베이고 망자가 되었다니…….

“내가 망자일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내가 망자일 리가…….”

실패한 권력욕은 허무함을 낳았고, 허무함은 분노로 바뀌었다.

“천리형, 이 개새끼……!”

넋을 잃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자충이 천리형을 돌아보며 검을 들었다.

그러나 자충의 변심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천리형이 선수를 쳐서 검을 휘둘렀다.

촥. 털퍽.

자충의 목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쪽팔리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라.”

천리형은 발밑에 뒹구는 자충의 목을 한쪽으로 차버렸다. 그리고 서백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놈 차례다. 네놈도 목을 베어서 이놈들처럼 망자로 만들어 주마.”

“거절하겠습니다.”

서백이 등에 멘 검을 내려서 손에 들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서백은 검을 한 바퀴 빙 돌리더니 검날을 아래로 해서 땅바닥에 박았다.

푹.

땅에 수직으로 선 검이 마치 묘지의 비석 같았다.

“검을 쓰지 않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권장술로 내 검법을 당해낼 것 같냐?”

“물론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

“철장방의 비전 무공을 구경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 방의 비전 무공을?”

천리형이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곧 광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크하하하하! 너 같은 꼬마 애송이가 뭘 안다고 개소리냐? 우리 철장방의 비전 무공은 소림사의 장경각에도 정보가 전혀 없는 것으로 유명한 비밀 무공으로…….”

“알고 있습니다. 철장비뢰공.”

“……!”

서백의 한 마디에 천리형의 웃음이 뚝 그쳤다.

“지금부터 평생 수련한 철장비뢰공을 십성으로 펼치십시오. 십성에서 일성이라도 부족하면 싸움이 시시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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