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추격대의 비밀(2)
푸른 그림자는 서백이었다.
서백은 수직 암벽을 달리다가 발을 차며 방도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느새 서백의 손에는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이 들려 있었다.
“저, 저거… 그 꼬마다!”
헛것을 본 것으로 여기고 어리둥절하던 방도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리춤에 찬 검으로 손을 내렸다.
순간 서백이 방도들을 덮쳤다.
서백이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검을 내질렀다.
그런데 석가검법을 출수할 때면 일어나는 질풍이 이번에는 없었다. 검이 아니라 검잡이를 잡고 휘둘렀기 때문이다.
병장기는 길면 길수록 좋다. 길수록 멀리 있는 적을 베거나 찌를 수 있으며 무게중심이 앞에 있기 때문에 위력이 증가한다.
그런 만큼 검잡이로 치는 것은 일부러 약점을 떠안는 것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서백은 약점을 감수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절대 침묵.
천리형에게 들키지 않고 방도들을 처리하려면 검성을 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유소운과 왕이삼이 위험해질 테니까.
혹시라도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검잡이로 방도를 후려친 것이었다.
그러나 서백의 무공 수위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
방도가 검을 뽑지도 못한 찰나 서백의 검잡이는 이미 그의 얼굴을 박살내고 있었다.
뻑.
검잡이가 방도의 관자놀이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해일 같은 엄청난 힘을 못 이기고 방도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으드득.
고개가 순식간에 반 바퀴 이상 돌아가자 목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방도는 땅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이미 목숨이 끊어졌다.
기수식도 초식도 없는 마구잡이 공격.
하지만 서백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건 비무가 아니라 죽고 죽이는 싸움이니까.
동료가 순식간에 숨이 끊어지자 남은 방도는 화들짝 놀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신호탄을 쏴서 천리형에게 알리려는 것.
서백이 그걸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서백은 검잡이로 후려친 동작을 계속 이어서 몸을 회전했다. 그리고 방도의 배에 뒷발차기를 먹였다.
빠각.
살집이 오른 배에 발차기를 먹였는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서백의 각법이 워낙 빠르고 강맹해서 방도의 복부를 파고든 다음 척추를 박살 냈기 때문이다.
방도의 몸이 그 힘을 못 이기고 허공에 붕 떴다.
그리고 몇 장을 날아간 뒤 안개가 자욱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낭떠러지가 얼마나 깊은지 방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지 돌무더기가 구르는 소리만 몇 번 들렸을 뿐.
서백은 목뼈가 부러진 방도의 시신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렸다.
예상대로 매복한 인원은 두 명이었다.
앞으로 여섯.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인질을 무사히 구해 내는 것이 적을 도륙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우니까.
마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산은 해가 일찍 진다. 잠입해서 인질을 구출하는 데는 어둠속이 유리할 것이다.
막 해가 진 직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지 않았을 때가 작전을 개시하는 데 최적의 시간!
문제는 석가심결이었다.
천리형이 매복조를 찾으러 사람을 보낼지 모른다. 또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한시라도 석가심결을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남은 시간은?’
서백은 지는 해를 보며 시간을 계산했다.
서백이 자란 석가장은 산속 깊은 곳에 있었다.
평생 산에서 생활한 서백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앞으로 일각이면 해가 진다.’
현재 석가심결은 이각은 운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해가 지고 나서도 최소 일각은 운용할 수 있다는 뜻.
그거면 충분했다.
서백은 심호흡을 한 뒤 본격적으로 석가심결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귀식대법을 하듯이 숨 쉬는 소리가 깨끗이 사라졌다.
십성까지 끌어올린 석가심결 운용!
서백은 수풀이 우거진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 * *
천리형은 유소운과 왕이삼이 철사위를 굴릴 수 있도록 밧줄을 풀어 줬다.
방도 두 명이 각각 유소운과 왕이삼의 등 뒤에서 목울대에 검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거나 역습할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왕이삼은 손바닥 위에 놓인 철사위 두 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왕이삼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천리형이 기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박 솜씨가 제법 있어 보이시니 너무 걱정 마시오.”
“…….”
“이왕이면 철사위 두 개 다 오(五)를 굴리면 어떻소? 새끼손가락 두 개 자르면 되니까.”
그 말에 방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옳으신 말씀!”
“새끼손가락 그거 붙어 있어도 아무 쓸모 없잖아?”
“그걸로 탄지신통을 출수할 거야, 뭐할 거야?”
“와하하하!”
“어서 던지시오. 그러다 해 떨어지겠소.”
“…….”
왕이삼은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양손을 합쳤다.
그런데 두 손바닥 안에서 철사위를 굴리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다라삼막보리보리, 다라삼막보리보리.”
“뭔 소리냐?”
유소운이 영문을 몰라서 귓속말로 물었다.
“웬 땡초가 읊던 불경인데 도박할 때 주문으로 외우고 있지. 큰 판이 열릴 때마다 이걸로 싹쓸이를 했다.”
“복운을 빌지.”
유소운은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왕이삼의 심정에 공감했다. 그만큼 뭔가에 매달리고 싶으리라.
한참을 손바닥에서 철사위를 굴리던 왕이삼이 마침내 결심을 하고 땅으로 손을 뿌렸다.
철사위 두 개가 회전하며 땅바닥을 굴러갔다.
데구르르르.
순간 온화하던 천리형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사냥감이 걸리길 기다리는 맹수의 본색이 드러난 것.
유소운, 왕이삼, 천리형 일당은 물론 손일서 일행 모두의 시선이 철사위 두 개에 집중되었다.
왕이삼이 철사위를 향해 일갈했다.
“쌍장 나와라!”
철사위 두 개의 윗면에 나온 숫자는…….
아니, 숫자는 없었다.
철사위 두 개의 윗면에 나온 것은 검은 손바닥 두 개였다. 삼십육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쌍장이 나온 것이었다!
“우와아아앗! 아싸!”
왕이삼이 허공에 두 주먹을 휘둘렀다.
“해냈다, 해냈어! 내가 동정호 만춘당의 도박판을 좌지우지했던 몸이라고!”
천리형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 참. 이런 경우도 다 있군.”
유소운도 한 마디 했다.
“복운을 축하하지.”
“거봐라! 내가 도박은 다 이긴다고 하지 않았냐?”
그러자 천리형이 말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온화하던 그의 목소리가 살짝 카랑카랑하게 변해 있었다.
“다음 차례요.”
“아…….”
그 말에 왕이삼은 입을 다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은 운 좋게 벌칙을 넘겼지만 유소운 차례가 아직 남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유소운도 삼십육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쌍장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든 일.
유소운은 왕이삼의 미안해하는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땅바닥에서 철사위를 집어들었다.
“걱정 마시지. 운이라면 나도 빠지지 않으니까.”
“너도 다라삼막보리보리 읊고 던져라.”
“나는 주문은 됐소.”
유소운은 왕이삼의 제안을 피식 웃으며 거절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자신도 과거에 활을 쏠 때 경문을 읊었다는 게 기억났다.
경문을 읊지 않으면 제대로 활을 못 쏘던 시절.
그때가 떠오르니 감회가 새로웠다.
위기에 처한 지금,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조문… 뭐라고? 무슨 놈의 주문이 그러냐?”
“논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지.”
휙.
유소운이 무심한 손길로 철사위를 던졌다.
철사위 하나가 땅바닥을 구르다가 회전을 멈췄다.
“장(掌)이다!”
왕이삼이 신바람을 내며 소리쳤다. 기막힌 우연으로 철사위 하나가 다시 검은 손바닥이 나온 것이다.
“이제 하나만 더 장이면…….”
그러나 다른 철사위가 회전을 멈추자 윗면에는 붉은 점 두 개가 찍혀 있었다.
이(二)가 나온 것이었다.
“아…….”
왕이삼은 입을 벌린 채 넋이 나갔고 유소운은 무심한 눈빛으로 철사위를 바라봤다.
“호오, 이가 나왔군.”
“…….”
“맞다, 당신 궁수라고 하지 않았소? 홍(紅)에 이(二)라니 아주 잘됐군, 하하하하!”
천리형이 다 알고 있으면서 방금 생각난 척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뒤늦게 천리형의 말뜻을 깨닫은 왕이삼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유소운을 쳐다봤다.
“홍에 이라면 오른손 검지……!”
궁수는 시위를 당길 때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엄지와 검지로 양쪽에서 줄을 잡든가, 아니면 검지와 중지를 줄에 걸어서 당기든가 하는 방법이다.
두 가지 방법은 공통점이 있으니 모두 검지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소운이 굴린 철사위가 바로 오른손 검지를 자르는 벌칙이 나온 것이다.
즉 오른손 검지를 잘린다는 것은 다시는 활을 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궁수한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준비하시오!”
천리형이 소리치자 방도가 유소운의 목에 검을 바싹 들이대고 상체를 엎드리게 시켰다. 그러자 다른 방도가 와서 유소운의 오른손을 잡고 땅바닥에 눌렀다.
싸악.
천리형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서슬이 퍼렇게 잘 벼린 단검이었다.
“검지한테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나 하시오.”
천리형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유소운의 대답이 이상했다.
“그럴 필요 없다.”
“무슨 소리요?”
“이 손가락을 자르면 나는 죽는다.”
“검지 하나 자른다고 사람이 죽는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군! 걱정 마시오. 철사위를 굴릴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를 텐데 열 개 다 잘라도 죽지 않을 테니까!”
천리형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는 왕이삼은 유소운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닫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궁수의 목숨과 같은 오른손 검지.
유소운은 검지가 잘릴 경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리형을 죽이고 함께 동귀어진하겠다는 각오를 밝힌 것이었다.
무림밥을 오래 먹은 왕이삼은 죽을 각오를 한 무림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아무리 그래도 검지 하나에 목숨을 걸다니.
활을 쏠 수 없으면 검을 잡으면 되는 일 아닌가?
왕이삼은 유소운에게 무슨 사연이 있길래 활에 대한 집착이 저리 강하고 절박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끔할 테니 이빨 꽉 무시오.”
천리형이 방도가 꽉 누르고 있는 유소운의 손에다가 단검을 갖다댔다.
그때였다.
촤아아악. 피이이잉.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한계까지 휜 대나무가 단숨에 펴지는 듯한 소리.
유소운과 왕이삼이 영문을 모르고 있을 때, 천리형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외쳤다.
“걸렸구나!”
천리형은 유소운의 검지에서 단검을 떼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소운과 왕이삼을 잡고 있는 방도들에게 명령했다.
“꼬마 놈을 잡아올 테니 다른 놈들을 지키고 있으시오.”
“존명!”
천리형은 방도 세 명을 이끌고 수풀 사이로 들어가 사라졌다.
인질을 지키는 방도 둘이 유소운과 왕이삼의 목에 검을 들이댄 채 말했다.
“새 방주가 어디 갔는지 아냐? 덫에 걸린 짐승을 끌고 오려는 거다.”
“우리가 오면서 덫을 놨거든. 저년이 걸린 사냥덫 말고 진짜 사람 잡는 덫 말이다!”
그런데 유소운이 다시 한번 뜻 모를 말을 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군.”
“무슨 소리냐?”
“서백이 네놈들 덫에 걸릴 리 없다. 덫은 자기보다 영리한 자가 놔야 걸리는 거지, 멍청한 놈들이 놓은 덫에 걸리는 게 아냐.”
“아주 그 꼬마 놈을 철석같이 믿는군.”
“당연하지. 살면서 그런 고수를 몇 번 본 적 없거든.”
유소운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자 방도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방도가 궁금한지 물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했지? 덫에 걸리는 게 틀렸다고 치고 그럼 맞는 말은 뭐냐?”
“간단해. 서백은 짐승 맞다.”
유소운이 대답했다.
“네놈들은 초식동물이다. 초식동물이 사나운 짐승한테 싸움을 걸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