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추격대의 비밀(1)
-도박이라고?
천리형이 뜬금없이 도박 얘기를 하자 유소운과 왕이삼은 영문을 몰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배신자 놈들도 잡았으니 도박 한 판 안 할 수 없지. 안 그렇소?”
“맞습니다!”
천리형이 운을 띄우자 방도들이 신을 내며 환호성을 외쳤다.
유소운은 천리형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이삼은 그 생각은 못 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왕년에 도박 좀 했다. 놈이 어떤 도박을 하든 내가 다 이길 테니 걱정 마라.”
“어련하실까.”
양산이 둘의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천리형의 도박은 보통 도박과는 다르오.”
그 말에 유소운과 왕이삼은 양산을 돌아보다가 흠칫 놀랐다.
양산의 표정이 사형대에 오르는 죄수처럼 냉랭하게 굳어 있는 것이 아닌가?
“방주님이 천리형을 후계자로 삼지 않고 철장방에서 내친 것도 도박 때문이오.”
“도박으로 철장방 재산을 탕진이라도 했나? 아무리 그래도 아들 놈을 내치는 건 좀…….”
도박을 좋아하는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묻자 양산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천리형의 도박은 사람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이오. 놈은 악마요.”
“…….”
천리형의 명을 받은 방도들이 유소운과 왕이삼을 일으켜서 모닥불가로 끌고 왔다.
천리형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오늘 도박은 이걸 갖고 놀겠소.”
그의 손바닥 위에는 한 쌍의 주사위가 놓여 있었다.
주사위는 옥을 깎아 만든 것으로 상당히 비싸 보였다. 도박을 즐기는 천리형의 성품이 엿보였다.
“오랜만에 주사위 도박을 보겠군요!”
방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왕이삼이 방도들이 듣지 못하도록 유소운에게 귓속말을 했다.
“걱정 마라. 주사위는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도박이다.”
“세상에는 마음대로 안 되는 게 하나 있지.”
“그게 뭐냐?”
“운이다. 복운은 타고나는 거지,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 주사위도 마찬가지지. 운에 달려 있는 도박이니까.”
“괜찮아. 나는 평생 복운이 따르는 놈이거든.”
왕이삼의 호언장담에 유소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왕이삼이 유독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불안감을 숨기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왕이삼을 믿어 보는 것 말고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럼 주사위 도박 방법을 설명하겠소.”
천리형이 검지로 두 개의 주사위를 굴리며 말했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것으로, 철사위라고 하오.”
주사위는 나무나 짐승의 뼈를 깎아서 정육면체를 만든 다음 각 면에 일부터 육까지 점을 찍어서 만든다. 이때 사(四) 자 면에 붉은(朱) 점을 찍는다고 해서 주사위(朱四位)라고 부른다
그런데 천리형은 붉을 주(朱)자 대신 철장방의 철(鐵)자를 넣어 철사위라고 했다.
그가 검지로 주사위를 굴리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철사위는 일이삼사오는 보통 주사위와 같지만 육이 없소. 대신 철장이 있지.”
그의 말처럼 철사위는 점 여섯 개가 찍혀 있어야 할 면에 검은 손바닥(철장)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떻소? 철장방에 딱 어울리는 철사위 아니오?”
“…….”
천리형의 목소리는 온화하면서도 정중해서 방주다운 기품이 있었지만 고작 주사위 자랑을 하고 있으니 유소운과 왕이삼은 그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었다.
“철사위는 각각 홍과 청이 있소.”
그 말대로 철사위 하나에는 붉은(紅) 점이, 다른 하나에는 푸른(靑) 점이 찍혀 있었다.
“도박 방법은 간단하오. 철사위 두 개를 굴려서 철장 둘, 즉 쌍장(雙掌)이 나오면 당신들의 승리요.”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다른 숫자가 나오면?”
“본인의 승리지.”
“뭐라고? 그런 법이 어딨냐? 이건 도박이 아니라 사기잖아!”
왕이삼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왕이삼이 분노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방도들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가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 자그마치 삼십육분의 일이다!”
“어이쿠, 엄청 높은 확률이군!”
“그러게 말야. 나라면 전 재산을 걸고 크게 한탕 노린다!”
“재산뿐이냐? 나 같으면 마누라도 걸겠다!”
“와하하하하!”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대는 왕이삼과 달리 유소운은 냉정한 눈빛으로 천리형을 노려보며 말했다.
“명색이 무림의 명문정파가 비겁하기 짝이 없군.”
“보시다시피 우리가 당신들을 붙잡았으니 그 정도 이득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유소운이 비꼬았지만 천리형은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철사위 도박은 아직 규칙이 하나 더 남았소.”
“뭐지?”
“도박에 내기가 없으면 재미가 없지. 해서 본인이 이기면 담보물을 받는 벌칙이 있소.”
“담보물?”
“그렇소. 일이삼사오가 나오면…….”
천리형이 손을 들어서 손가락 다섯 개를 차례로 접으며 말했다.
“나오는 숫자에 맞춰서 손가락을 자르겠소.”
“……!”
왕이삼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이게 무슨 도박이냐? 그냥 고문 아냐?”
“싫으면 쌍장을 굴려서 이기면 되지 않소?”
“…….”
천리형의 태연자약한 말투에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오랜 세월 무림물을 먹은 왕이삼은 천리형 같은 자는 상대하지 말고 피해야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사람을 죽이면서 눈 한 번 깜빡 안 하는 괴물!
유소운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쌍장이 나오면 네놈의 양쪽 손목을 자르나?”
“그렇게는 못하지. 말했듯이 우리가 당신들을 붙잡았으니 이득이 있어야 되니까.”
“…….”
“누가 먼저 시작하겠소?”
천리형이 철사위를 내밀었다.
뜻밖에도 왕이삼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외쳤다.
“내, 내가 먼저 하겠다!”
유소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왕이삼을 돌아봤다.
애초에 이건 도박이 아니라 고문이다.
재미 삼아 사람들을 죽이는 자들의 유희.
왕이삼은 무림물을 먹은 도검수였다. 은자를 목숨처럼 챙기는 걸 보면 이런 경우 몸을 사릴 법도 한데 먼저 나선다고?
동료를 끔찍이 아끼는 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쩌면 외로운 도검수라서 오랜만에 생긴 동료를 더욱 아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재미있군.’
유소운은 이번 사천행에서 많은 수확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살아서 탈출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용기가 가상하군. 자, 굴려 보시오.”
천리형이 왕이삼에게 철사위 두 개를 건넸다.
순간 유소운의 두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상은 운이다. 평생 복운을 타고난 자라도 언젠가 한 번은 고꾸라진다. 반대로 극악처럼 운이 나쁜 자라도 사는 동안 한 번의 기회는 찾아온다.
그 기회를 잡는 자가 성공하는 것이 인생!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위기를 벗어날 기회가 반드시 온다.
유소운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다.
* * *
내공진기를 운용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서백은 굳게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우우. 서백은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몸 상태는 완벽했다.
석가심결을 다시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선택을 한 것이 옳았던 것이다.
이제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멀리 떨어진 협곡도 매의 눈처럼 또렷하게 볼 수 있을 터.
심호흡을 끝낸 서백은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산봉우리에 오른 서백은 가장 키가 높은 나무를 골라서 타고 올라갔다.
사방을 둘러보는 것도 잠시.
철장방 추격대는 의외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 협곡에서 한 줄기의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추격대가 모닥불을 피우고 노숙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
먼저는 손일서 일행에게 들킬까 봐 불조차 피우지 않았던 추격대. 그러나 지금은 사냥을 해서 고깃국이라도 끓이는지 크게 불을 피우고 있다.
그게 말하는 것은?
천리형이 서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
아니, 오히려 서백이 추격대를 뒤쫓기를 바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매복했군.’
천리형은 추격대 인원을 빼서 어딘가에 복병을 숨겨 둔 것이 분명했다.
‘최소 두 명에서 최대 네 명까지.’
하지만 유소운과 왕이삼을 포함해서 손일서 일행까지 다섯 명을 인질로 잡았으니, 네 명 한 조를 몽땅 보내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추격대가 인질들보다 숫자가 적으면 아무래도 불안할 테니까.
‘그럼 두 명이다.’
두 명. 매복했다고 해도 서백을 처리하기에는 부족한 숫자.
천리형은 두 명이서 서백을 처리하기보다 먼저 발견한 뒤 신호를 보내라고 명령했으리라.
추격대가 일단 서백을 발견한다면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유소운과 왕이삼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서백으로서는 큰 약점이 있는 셈이었다.
결국 누가 먼저 상대를 발견하느냐가 승패의 갈림길이 될 터.
‘매복한 자들을 발견해서 처치하고 추격대를 암습한다.’
작전이 수립됐다. 이제 움직일 차례.
서백은 나무에서 내려온 뒤 다시 몸을 날렸다.
* * *
협곡 사이로 난 좁은 길목.
그곳에서 철장방도 두 명이 수풀이 우거진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협곡의 굳은 땅에서 차가운 공기가 올라오자 방도 둘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모삼국 놈, 왜 안 오는 거지? 추워 죽겠는데.”
“혹시 그 꼬마 놈한테 당한 거 아냐?”
“설마 쪽수가 몇인데 그럴 리가 있냐? 꼬마 놈 처리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하긴. 그건 그렇고 새 방주는 심계는 치밀한데 가끔 지나치단 말야. 굳이 매복하고 있을 필요가 어디 있다고.”
“입조심해라. 새 방주 귀에 그 말이 들어가면 네놈은 제삿날이다.”
“뭐 어때. 여기서 누가 듣는다고…….”
그때 어디선가 투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무슨 소리 들렸지?”
“글쎄. 돌 떨어지는 소리 같은데?”
방도 둘은 약속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어떤 미친놈이 저기로 오겠냐?”
“하긴.”
방도들이 매복한 수풀 뒤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족히 수십 장은 넘는 암벽이 자리했다.
절대 사람이 운신할 수 없는 험지.
또한 수풀 앞쪽은 짙은 안개가 끼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다. 그 사이에 공터로 향하는 길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사람이 수직으로 난 절벽을 탈 수 있을까?
설마! 그게 가능하다면 사람이 아니라 새가 아니겠는가?
즉 제아무리 경공의 고수라도 매복 장소를 통과하려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매복에는 최적의 장소!
천리형은 방도들에게 이 지점에서 매복한 다음 모삼국 조가 오면 함께 복귀하고 만에 하나 서백이 온다면 조용히 뒤를 밟은 뒤 신호를 보내라고 명령했다.
서백이 뒤를 밟힌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철장방도들한테 앞뒤를 포위당했을 터.
“새 방주가 인물은 인물이야. 지도만 보고 이런 곳을 찾아내서 매복시키다니.”
“그러니 지 아비도 버리고 방주 자리를 꿰찼지.”
“그 입 때문에 언젠가 네놈 목이 날아갈 거다.”
“네놈이나 걱정해라. 난 백 년은 더 살 테니까.”
방도들이 킬킬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뒤쪽에서 다시 한번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투두두둑.
“뭐야? 들짐승인가…….”
귀찮은 눈으로 고개를 돌리던 방도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푸른 그림자가 수직으로 깎아지른 암벽을 평지처럼 달리며 방도들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