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협곡의 추격전(4)
모삼국과 함께 킬킬대고 있던 방도들은 그의 목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이 꼬마가…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분노한 방도들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서백은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교훈 하나 가르쳐 드리죠.”
“무슨 교훈?”
“악행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뭐라고? 이 새끼가 감히……!”
맨 앞에 있던 방도가 허리춤에 찬 박도를 잡았다.
그러나 박도를 치켜들기도 전에 세찬 질풍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팟.
팔을 들던 방도는 뜨끔한 느낌을 받고 고개를 돌리다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의 손이 박도 검잡이를 쥔 채 허리춤에 남아 있었다. 박도를 쥔 손목이 베어져서 팔뚝만 들어 올린 것이었다.
“아아아악…….”
이어서 서백이 검을 휘두르자 방도는 비명도 다 지르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동료 두 명이 서백의 검에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남은 방도 둘은 그제야 서백이 얕볼 꼬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네놈!”
방도 하나가 서백의 등 뒤에서 박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에게 기합을 지르며 하는 암습이 통할 리 없었다. 서백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돌려서 가볍게 검격을 막았다.
까앙.
그때 목이 떨어진 방도의 뒤쪽에서 빛이 번쩍였다.
장포를 느슨히 묶고 있던 방도가 품에서 비검을 꺼내 투척한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된 암습.
코앞으로 세 개의 비검이 날아들었다. 서백은 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넓은 검면으로 비검을 튕겨냈다.
채채챙.
좌우로 하나씩 튕겨 낸 뒤 마지막 비검은 일부러 허공에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비검이 핑그르르 돌 때를 노려서 검면으로 비검을 후려쳤다.
까앙.
비검은 방도가 투척한 것보다 몇 배 이상 빠른 속도로 되돌아갔다. 깜짝 놀란 방도가 비검을 낚아채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비검은 그가 투척했을 때와 달리 서백의 내공진기가 실려 있었다.
그 비검을 맨손으로 쥐려 했으니…….
싸악.
비검은 주인인 방도의 검지와 중지를 절단하며 그대로 나아갔다. 그리고 방도의 이마에 정통으로 박혔다.
퍽. 얼마나 세게 박혔는지 검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어서 서백은 검을 멈추지 않고 크게 원을 그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등 뒤에 있는 마지막 방도를 향해 내려쳤다.
“이런 죽일 놈이……!”
방도가 박도를 수평으로 뉘어서 검을 막았다.
그러나 서백의 검은 방도의 박도를 무 베듯이 두 동강 내 버렸다.
썩둑.
검은 그대로 방도의 어깨에 박혔다.
콱.
계속해서 방도의 어깨 죽지를 파고든 서백의 검이 그의 몸통을 대각선으로 갈라 버리며 허리 쪽으로 빠져나왔다.
서백은 한 차례 검을 휘둘러서 핏물을 턴 다음 등 뒤 고리에 검을 걸었다.
그제야 몸통이 갈라진 방도의 상체가 피 분수를 뿌리며 스르르 미끄러져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철퍼덕.
“무림 선배의 교훈?”
서백은 방도들의 시신 네 구는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별로 도움은 못 되었군. 악인들의 목숨 따위 원래 신경 쓰지 않아서 말이지.”
이로써 협곡의 탈출로를 선점하려던 모삼국 추격조는 서백에게 제거되었다.
후우우우.
서백은 길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석가심결의 제한 시간을 넘길 뻔했다.
추격조보다 먼저 오기 위해 석가심결을 최대한으로 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심결을 운용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
반 시진 이상 썼을 때 주화입마에 들 위험이 있다는 것!
스승은 목숨이 위기에 처했을 때만 반 시진까지 석가심결을 운용하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지금 제한 시간을 넘길 뻔했던 것이다.
스승이 알았다면 멍청한 놈이라고 질타했을 선택.
설령 석가심결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모삼국 추격조 네 명은 서백의 적수가 못 됐다.
하지만 제한 시간까지 석가심결을 운용하면서 추격조를 일도양단했다.
그만큼 서백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석가장이 멸문하던 날.
스승은 서백에게 소림사행의 중책을 맡겼다. 서백은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석가장은 수천수만 구의 망자 떼에 휩싸이고 말았다.
사형제들을 버리고 혼자 탈출했다는 자책감이 남아 있는 것일까? 이후 서백은 망자를 처단할 때 손속에 정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망자를 상대할 때의 얼음장 같은 분노가 지금 다시 불타오른 것이다.
동료를 배신한 자들 때문에.
서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유소운과 왕이삼을 그만큼 아끼게 되었다.
어쨌든 모삼국 추격조는 해치웠으니 천리형에게 연락이 닿을 염려는 놓아도 될 것이다.
이제 유소운과 왕이삼이 손일서 일행과 함께 오는 것만 기다리면 될 터.
서백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공진기를 가다듬었다.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면 석가심결을 무리하게 운용한 것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그런데 일각이 지났을 때였다. 하늘 높은 곳에서 신호탄이 터졌다.
서백이 유소운에게 주었던 청색 신호탄이었다.
모삼국 추격조는 처리했는데 또 다른 추격조와 마주쳤다고?
‘천리형이다.’
서백은 직감했다.
추격대를 삼개조로 나누었던 천리형.
하지만 모삼국 추격조 말고 다른 두 개 조도 소림사와 아미파가 아니라 협곡으로 향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삼개조로 나눈 것은 처음부터 천리형이 서백 일행을 속이려고 한 노림수가 분명했다.
‘놈에게 당했군.’
석가심결은 아직 덜 회복됐지만 시간이 없었다.
서백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호탄이 발사된 곳을 향해 달려갔다.
* * *
잠시 후 서백은 신호탄이 발사된 위치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석가심결을 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호탄이 발사된 곳은 협곡 사이에 나 있는 작은 숲이었다.
그런데 숲에는 유소운과 왕이삼은 물론 손일서 일행도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땅바닥에 어지럽게 발자국들이 나 있었다.
바닥을 살피던 서백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군가 흘린 핏방울 자국!
천리형의 추격대와 싸우느라 일행 중 누군가가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주위에 화살이 한 발도 안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암기보다 빠르게 활을 쏘는 유소운이 적을 만나 화살 한 발 못 쐈다고?
적이 매복하고 있다가 불시에 암습했다는 뜻.
어쩌면 천리형이 유소운이 궁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방비했을지도 모른다. 눈썰미가 있는 고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내 실수다.’
모삼국 추격조를 상대할 때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게 잘못이었다. 석가심결을 무리해서 운용하지 않았더라면 천리형보다 빨리 숲에 도착했을 테니까.
서백은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했다.
손일서는 철장방의 배신자로 낙인 찍혔으니 당장 죽이지 않고 철장산으로 압송할 것이다.
양산과 축영도 일단 인질로 삼을 것으로 생각됐다.
문제는 유소운과 왕이삼이었다.
천리형은 둘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으리라.
게다가 유소운은 일류 고수이며 왕이삼도 꽤 실력이 있는 도검수다. 괜히 살려 두었다간 언제 뒤탈이 날지 모르는 인질들.
천리형이 유소운과 왕이삼을 죽이고 철장산으로 귀환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
반면 긍정적인 예측도 있었다.
숲에 핏자국만 있고 유소운과 왕이삼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둘을 아직 살려 두었다는 증거!
‘왜 둘을 당장 죽이지 않고 끌고 갔지?’
이유는 천리형만이 알 것이다.
굳이 알아낼 필요는 없다. 둘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그러나 천리형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
‘한시라도 빨리 천리형을 뒤쫓아야 한다.’
하지만 서백은 발을 멈췄다.
이제 추격극이 인질 구출극으로 바뀌었다.
인질이 붙잡히면 몇 수 위의 고수도 하수한테 무릎 꿇는 상황이 생긴다. 인질의 목숨을 구하려다가 되려 하수한테 약점을 잡혀서 패배하는 것이다.
모삼국 추격조를 상대할 때 석가심결을 한계까지 운용했던 실수를 저지른 서백.
‘두 번 다시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서백은 추격은 잠시 보류하고 자리에 앉아서 내공진기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거칠었던 서백의 호흡이 어느새 명경지수처럼 고요한 흐름으로 바뀌었다.
* * *
협곡 사이에 난 작은 공터.
그곳에 천리형 일행이 모여 있었다. 인원수는 천리형을 포함해서 모두 여섯 명이었다.
공터 중앙에는 나무를 패서 피운 모닥불이 활활 불타는 중이었다. 불 위에는 양고기를 잔뜩 썰어 넣은 국그릇이 놓여 있었다.
방도 하나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냄새 한번 좋군!”
“국 다 끓는데 모삼국 놈들은 왜 안 오는 거지?”
“늦게 오면 좋지. 그럼 고깃국은 우리가 몽땅 먹어치울 것 아니냐?”
“와하하하!”
방도들이 시끌벅적 웃어 젖혔다.
그러다가 방도 하나가 설마 하는 얼굴로 말했다.
“혹시 그 꼬마한테 당한 거 아닐까? 그 꼬마 제법 실력 있어 보였는데.”
“엄마젖도 못 뗀 꼬마한테 모삼국이 당했다고? 웃기는 소리!”
방도들이 터무니없다며 웃자 조용히 있던 천리형이 입을 열었다.
“설령 꼬마가 모삼국 조를 해치웠다고 해도 문제될 것 없소.”
동시에 천리형이 고개를 돌려서 공터 구석을 바라봤다.
“인질들이 있으니까 말이오.”
그곳에는 유소운과 왕이삼이 밧줄에 포박되어 있었다. 손일서, 양산, 축영도 그 옆에 묶여 있었다.
천리형 일행과 한바탕 싸운 탓에 유소운, 왕이삼, 양산은 얼굴과 의복 곳곳에 핏자국이 나 있었다.
특히 유소운은 두 눈이 시퍼렇게 퉁퉁 붓고 얼굴이 피떡이 돼 있었다. 유소운의 저항이 가장 거칠자 방도들이 그를 붙잡은 뒤 앙갚음으로 몰매를 퍼부었던 것이다.
“새 방주님 말이 옳습니다!”
방도들이 천리형의 말을 인정하며 맞장구쳤다.
이제 천리형의 말을 반박할 방도는 아무도 없었다. 손일서를 잡은 지금 천리형이 새 방주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니까.
천리형의 오른팔 격인 자충이 호기롭게 외쳤다.
“행여 모삼국이 실수로 놓쳤더라도 꼬마 놈은 도망쳤을 게 뻔합니다. 약관도 안 된 놈이 감히 철장방을 상대하러 온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가 아닙니까!”
“와하하하!”
방도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천리형도 방도들의 아첨이 만족스러운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흥겨운 분위기를 깼다.
“아니, 녀석은 반드시 온다.”
천리형과 방도들이 일제히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백 녀석은 네놈들과 다르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목소리의 주인은 유소운이었다. 그는 얻어맞아서 퉁퉁 부어터진 입술을 힘들게 움직여서 말했다.
그러자 천리형이 모닥불가에서 일어나 유소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꼬마를 무척 믿는가 보군.”
“당연하지. 서백은 동료를 배신하고 버리는 네놈들과 근본이 다르니까.”
유소운은 손일서 일행에게 들은 얘기를 언급한 것이었다.
철장방이 망자 떼에 휩싸였을 때 방주와 부방주를 버리고 혼자 도망친 천리형을 비꼬는 말.
천리형이 그걸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게 강호의 정리라는 것이오?”
“그렇다. 게다가 서백은 네놈들이 평생 본 적 없는 고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네놈들은 목이 떨어질걸? 내기해도 좋아.”
“내기? 말 한번 잘했소.”
천리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가 유소운과 왕이삼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나랑 도박 한 판 해 보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