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협곡의 추격전(3)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났을 때 왕이삼이 절벽에 난 가파른 길을 뛰어올라 왔다.
“잡았구나… 후배 잘했다… 헉헉헉…….”
왕이삼은 숨넘어갈 듯이 헉헉대며 박도를 치켜들었다. 서백은 미리 도착한 유소운과 심드렁하게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왕이삼을 말렸다.
“박도는 치우시죠. 그보다 숨넘어가시겠습니다.”
“그럴까? 헉헉…….”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던 왕이삼은 서백의 말에 얼른 박도를 내렸다.
그는 손일서 일행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포박하지 않고 왜 그냥 놔둔 거냐?”
“그럴 밧줄이 어디 있습니까. 그보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서백은 유소운과 왕이삼을 따로 불러서 자리를 피한 다음 얘기했다.
일찍 도착해서 서백한테 설명을 들은 유소운이 왕이삼한테 어떤 상황인지 얘기했다.
얘기가 끝나자 왕이삼이 소리쳤다.
“저런 나쁜 놈! 그런 파락호는 절대 용서할 수 없지!”
“우리가 용서하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건 그렇지만…….”
“저들을 돕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천리형에게 우리를 속인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그 말에 유소운과 왕이삼이 눈빛을 교환하며 씨익 웃었다.
“후배 뜻대로 하시게.”
“암! 무림에서는 이용당하고 그냥 넘어가면 더 우습게 본다고.”
모처럼 유소운과 왕이삼의 의견이 맞았다.
“단지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또 뭐냐?”
“저들이 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천리형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질시킬 수도 없고 말입니다.”
“끄응. 도망자들을 돕겠다면서 추격대를 기다린다는 건 말이 안 되지.”11
서백은 손일서 일행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천리형이 철장방의 배신자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물론이오. 천리형에게 그날 어떻게 혼자 돌아왔는지 아시오?”
“망자 떼에 포위돼서 방주가 죽은 날 말입니까?”
“맞소. 그날 천리형은 혼자 살아서 돌아왔소. 우리는 그가 일부러 혼자 몸을 빼내서 다른 자들을 죽게 내버려둔 거라고 의심하고 있소.”
그때 말없이 조용히 있던 축영이 입을 열었다.
“그날 제 오빠도 방주님과 함께 있었는데… 며칠 뒤에 망자가 된 몸으로 나타났어요…….”
그녀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울먹이자 양산이 뒷일을 설명했다.
“축영의 오빠 축무대는 방주의 호법이었소.”
축무대는 철장방에서 방주 다음 가는 고수였다.
특히 그는 신법이 날렵해서 망자 떼 수십 구 정도는 가볍게 떨쳐 낼 정도였다.
망자 떼를 정찰할 때 항상 선두에 나가면서도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몸을 빼서 귀환하곤 했다.
그런 축무대마저 망자가 되고 말았으니…….
“축무대보다 신법이 뛰어나지 않은 천리형이 혼자 돌아온 것은 무슨 흉계가 있었던 게 분명하오.”
“…….”
서백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손일서 일행의 주장은 정황 증거일 뿐 물증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뻔한 거짓말은 추격대에 잡히면 금세 탄로 날 테니 거짓말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행동해야 할 차례.
“신호탄을 봤으니 추격대 한 조가 곧 나타날 겁니다.”
“천리형의 수하 중 모삼국이란 자가 있는데 협곡 지리를 잘 알고 산 타는 데 도사요.”
서백은 지도를 펼쳐서 양산에게 보이며 물었다.
“혹시 추격대가 매복할 곳이 있습니까?”
“여기요.”
양산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던 협곡이 중간에 끊어진 곳을 가리켰다.
“여기 좁은 길목이 있는데 협곡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오. 모삼국도 물론 알고 있을 거요.”
탈출구가 하나밖에 없는 협곡.
그렇다면 상황은 간단해진다.
탈출구를 먼저 통과하면 도주자들의 승리. 반대로 추격대가 길목을 선점하고 신호탄을 쏘면 패배하는 셈.
서백이 지도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제가 먼저 가서 추격대가 매복하는 것을 막겠습니다.”
“혼자서 말이오?”
“모두 함께 이동하면 속도도 느리고 들킬 위험이 큽니다.”
서백 혼자서 매복조를 처리하겠다고 하자 손일서 일행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유소운과 왕이삼을 돌아봤다.
하지만 유소운과 왕이삼은 팔짱을 낀 채 나서지 않았다. 서백의 실력을 잘 알고 있으니까.
중년 도검수와 청년 무림인이 약관도 안 된 소년한테 중책을 맡기는 모습.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손일서 일행은 서백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서백은 거침없이 작전을 세워 나갔다.
“놈들이 신호탄을 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서백은 두 발 남은 신호탄 중 하나를 유소운에게 건넸다.
“다른 추격대를 발견하면 신호탄을 쏴서 연락하죠.”
“천리형이 준 신호탄을 역으로 사용하자는 거냐? 자기 꾀에 자신이 당한다는 게 이런 거군.”
“추격대를 발견하면 제가 올 때까지 몸을 숨기고 최대한 시간을 끄십시오.”
“네 명 한 조는 왕이삼이 한 명만 처리해 주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 수 있는데.”
유소운이 슬쩍 미덥지 못하다는 눈길로 왕이삼을 흘겨봤다.
그러자 왕이삼이 분개하며 말했다.
“네놈 혼자 셋을 없애겠다고? 허세 부리지 마라!”
“허세랄 것도 없지. 세 발이면 충분하니까.”
유소운이 절벽 아래 난 길로 시선을 돌렸다.
절벽에 일직선으로 난 길. 게다가 오르막이다.
추격대가 무작정 돌진해 온다면 유소운의 일발명중 화살에 꿰이고 말 터!
고지 위에서 명궁의 화살이 날아오는데 절정 고수가 아닌들 누가 무사할까?
왕이삼도 그제야 유소운의 뜻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서두르죠. 당신이 다친 여인을 업으십시오.”
서백은 양산에게 축영을 업으라고 했다. 둘이 연인 사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명령한 처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양산과 축영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아이를 업지.”
“아이가 아니라 내 이름은 손일서요!”
“이런. 철장방의 새 방주님을 몰라뵀군요.”
유소운이 씨익 웃으며 손일서를 업었다.
마지막 남은 자는 서백과 왕이삼.
“선배님, 제가 업어 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날 뭘로 보는 거냐?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어도 내 발로 뛸 거다!”
“그러셔야죠.”
서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뒤를 부탁합니다.”
서백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은 다음 발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탓.
곧이어 푸른 그림자가 순식간에 절벽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져 버렸다.
유소운과 왕이삼은 태연했지만 손일서 일행은 입을 딱 벌린 채 그 광경을 쳐다봤다.
* * *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선 절벽에 마차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만한 틈새가 나 있었다.
마치 병풍을 검으로 베어서 양옆으로 벌어진 것 같은 모습.
이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협곡을 빠져나가는 데 며칠 이상이 걸린다. 바로 양산이 추격대가 매복할 곳으로 지목한 곳.
그 틈새에 모삼국이 이끄는 추격조가 막 도착했다.
협곡 지리에 밝은 모삼국은 서백이 쏜 신호탄을 보자마자 산등성이를 탔다. 그리고 서백 일행을 앞질러서 미리 온 것이다.
모삼국을 포함한 네 명은 속도를 늦추고 땀을 식혔다.
여유가 생기자 그들은 서백 일행을 조롱했다.
“그 꼬마 놈. 강호물 좀 제법 먹은 줄 알았더니 멍청하기 짝이 없군.”
“제 손으로 신호탄을 쏴 주니 우리야 고맙지.”
“꼬마가 뭘 알겠어? 새 방주가 추켜세워 주자 홀딱 넘어간 거지.”
그때 멀리 협곡의 틈새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쉿! 누구지?”
“배신자 놈들인가? 우리보다 먼저 왔을 리가 없는데.”
방도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모삼국이 말했다.
“일찍 와서 잡혀 주면 더 좋지 뭐가 걱정이냐? 역시 소림사나 아미파 말고 손식 놈 외가로 도망치려는 모양이군.”
“엄마젖이 그리운 모양이지.”
“와하하하하!”
모삼국 조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협곡에 난 틈새로 다가갔다.
그런데 인영은 틈새를 막고 있는 것처럼 우두커니 선 채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비탈길을 올라 틈새 앞에 도착한 모삼국 조는 인영이 누군지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제 오십니까? 많이 기다렸습니다.”
“네놈은… 그 꼬마?”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인 채 추격조를 쳐다보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서백이었다.
모삼국이 방도들을 스윽 한 번 쳐다본 뒤 말했다.
“신호탄 쏜 건 잘 봤다.”
“그러셨군요.”
“근데 배신자 놈들은 어디 있냐?”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면 도착할 겁니다.”
“그럼 너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백이 기다렸다는 자들은 바로 모삼국 추격조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삼국과 방도들은 말뜻을 오해했다.
“호오, 지도를 보고 놈들이 여길 통과하려는 걸 짐작한 거냐? 눈썰미는 있구나.”
“철장방이 이 은혜를 잊지 않을걸세!”
하인은 주인을 닮는다는 말처럼 모삼국과 방도들은 입만 열면 상대에게 사탕발림을 했다.
그러나 서백은 아첨하는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좋을 대로.”
“철장방이 망자 떼에 포위되던 날 당신들은 뭘 했습니까?”
“뭘 하긴, 도망쳤지.”
“방주와 부방주를 버리고 말입니까?”
“어쩔 수 없었다. 목을 베도 죽지 않는 게 망자인데 도망치는 것 외엔 딱히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를 버린 천리형처럼 말입니까?”
그 말에 모삼국이 방도들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이 꼬마가 강호를 잘 모르는군.”
다른 방도들도 킬킬대며 한 마디씩 했다.
“꼬마야, 병법을 모르는구나. 도망친 게 아니라 작전상 후퇴라는 거다.”
“우리가 몽땅 죽으면 철장방은 누가 꾸려나갈 건데? 희생은 안타깝지만 산 사람은 살고 봐야지.”
“강호는 그런 곳이다. 알겠냐, 꼬마야?”
“…….”
서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방도들을 살폈다.
철장방. 장법으로 명성을 얻은 방파.
장법은 도검에 비하면 엄청난 내공과 수련 시간을 필요로 한다.
방주나 장로쯤 되지 않는 이상 방도들의 장법은 신통치 않다고 여겨도 상관없을 터.
그렇다면 방도들은 주로 도검을 쓰리라.
모삼국은 허리에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다른 두 방도는 날이 넓고 휘어진 박도.
마지막 하나는 검을 차고 있지만 검잡이가 매끈하고 낡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검을 잘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또한 날씨가 서늘한 협곡인데 장포의 가슴팍을 느슨하게 묶어 두었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쉽게 한 것.
즉 비검술을 쓴다는 뜻. 아니면 암기.
서백이 말없이 있자 모삼국과 방도들은 말문이 막힌 것으로 여겼는지 킬킬거리며 말했다.
“꼬마야, 강호는 전쟁터다. 전쟁터에서 죽으면 자기만 손해라고!
“백 번 옳은 말이군!”
마침내 서백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축무대도 버리고 도망친 겁니까?”
“어라? 그놈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모삼국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그놈 평소에도 호법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더니 방주 보고 피하라고 한 다음 망자 떼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결국 방주도 죽고 자기도 죽었고 말야. 목숨 귀한 줄 모르면 그렇게 되는 거다.”
“잘 알겠습니다.”
서백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스로 죽을 길로 들어서는 사람한테는 신경 쓰지 마라. 그런 말입니까?”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군. 무림 선배의 교훈이니 잘 새겨 둬라.”
“그렇군요.”
팟. 휘이이잉.
갑자기 거친 질풍이 몰아치면서 모삼국의 머리칼을 미친 광인처럼 흩날렸다.
“이 꼬마 녀석이 지금 뭐한 거…….”
모삼국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모삼국은 입에서 피거품을 물며 두 눈을 허옇게 뒤집었다. 곧이어 모삼국의 목이 어깨 위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땅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