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협곡의 추격전(2)
왕이삼이 못 믿겠는지 물었다.
“잘못 본 거 아닐까? 아지랑이 아냐?”
“아닙니다. 이 싸늘한 협곡 날씨에 무슨 아지랑이가 핍니까.”
서백은 한 마디로 잘라 반박했다.
“저는 먼저 가서 도망자들을 잡겠습니다.”
석가심결은 이미 시전한 상황.
서백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수풀 속으로 달려가 사라졌다.
“나도 먼저 가지.”
유소운도 한 마디를 툭 던지더니 그 뒤를 따랐다.
“이봐! 같이 좀 가자고!”
혼자 남은 왕이삼은 둘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몇 발 안 가서 걸음을 멈췄다.
지난번에 촉도관으로 가는 잔도에서 서백을 따라가려다 녹초가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래. 서백 녀석이 알아서 잘 하겠지.”
당시 교훈을 깨달은 왕이삼은 터벅터벅 걸어서 서백과 유소운을 뒤따라갔다.
…포기하니까 역시 편했다.
* * *
얼마나 수풀을 헤치며 달렸을까.
곧이어 숲이 끝나고, 서백의 앞에 깎아지른 절벽이 튀어나왔다.
산 중턱으로 가려면 절벽을 우회해야 한다.
하지만 서백은 일직선으로 가는 경로를 선택했다.
“후읍.”
서백이 입으로 짧게 숨을 토한 다음 순간.
탓. 서백은 왼발로 벽면을 차며 그대로 절벽을 계단처럼 뛰어 올라갔다.
타타타탓.
흡사 평지를 달리는 듯한 경공.
무공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삭막한 회색 절벽에 한 폭의 푸른 천이 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마침 뒤를 쫓아온 유소운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무거운 대검을 등에 메고… 저 녀석 대체 정체가 뭐야?”
유소운은 절벽을 오르기 전 휘파람을 불며 신바람을 내려다가 멈칫 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차차, 도망자들이 들으면 안 되지.”
그는 피식 웃은 뒤에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려 서백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선 절벽을 뛰어오른 서백은 산등성이에 발을 딛고 섰다.
이제 협곡 하나만 넘으면 도망자들을 발견한 곳에 다다를 것이다.
그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철장방한테 받은 폭죽을 써서 신호하는 것.
서백은 가죽 꾸러미를 풀어서 폭죽을 꺼냈다.
청황적(靑黃赤) 세 가지 색의 폭죽.
그중에서 서백은 적(赤), 즉 빨간 색 폭죽을 집어 들었다.
천리형은 세 가지 색 폭죽을 용도에 맞게 쓰라고 했지만 서백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공포탄을 쏘는 것은 맹수를 한 쪽으로 몰 때나 하는 일. 사냥감을 추격할 때는 최대한 은밀히 다가가는 쪽이 훨씬 낫다.
때문에 도망자들을 발견했을 때 바로 청색 폭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신호탄을 아껴 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터.
서백은 폭죽을 하늘을 향해 겨눈 뒤 끝에 달린 끈을 잡아당겼다.
찌직. 펑.
끈이 잡아당겨지자 안에 설치된 화약이 폭발하면서 폭죽이 발사됐다.
이어서 높이 떠오른 폭죽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퍼엉.
마치 붉은 꽃 한 송이가 하늘에 핀 것 같은 광경.
서백이 이동한 협곡은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러나 하늘 높은 곳에서 폭죽이 터졌기 때문에 근방 수십 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폭죽을 보았을 게 틀림없었다.
그 말은 도망자들 역시 폭죽을 봤을 거라는 뜻.
하지만 서백은 상관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도망자들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
그 증거로 폭죽 꽃송이는 아직 허공에 꺼지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서백의 신형은 이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 * *
철장방의 도망자들 세 명은 깎아지른 절벽에 난 길을 오르고 있었다.
각각 스무 살 가량의 남녀와 어린 소년.
남녀의 이름은 양산과 축영이고 소년의 이름은 손일서였다. 손일서는 바로 철장방 부방주였던 손식의 아들이었다.
힘겹게 길을 오르고 있을 때 그들은 하늘 높은 곳에서 붉은 신호탄이 터지는 것을 목격했다.
양산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장방의 신호탄입니다.”
“지금 저 색깔은 적색 아니오?”
“그렇습니다.”
셋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서로를 돌아봤다.
적색 신호탄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추격대가 바로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는 뜻!
즉 당장 어딘가에서 철장방 무리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놈들이 뒤쫓아 왔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그래야겠소.”
손일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이가 열 살도 안 돼서 소년이라기보다 아이에 가까운 손일서. 하지만 손일서의 표정은 당차고 심지가 굳어 보였다.
그때 일행 중 유일한 여인인 축영이 말했다.
“저를 두고 가세요.”
그녀는 발목 피부가 심하게 찢기고 살점이 뜯겨나가 있었다. 서백의 예측대로 사냥덫에 걸린 자가 바로 그녀였다.
축영이 부상당한 바람에 일행은 계획보다 반나절 가량 이동이 느려졌다. 그 바람에 추격대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축영이 심하게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녀는 도주하는 중에도 몇 번씩 자신을 버려두고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양산은 못 들은 척했다.
그녀와 자신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이대로 가면 모두 잡힌다.’
양산은 입술을 꽊 깨물며 슬픈 눈으로 연인을 바라봤다.
“그럴 수는 없소.”
그때 손일서가 나서며 말했다.
“축영은 철장방이 과거 큰 빚을 졌던 축씨 가문의 여식이오. 철장방은 은혜를 잊지 않으니 절대 두고 가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소. 더 말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일행을 이끄는 자는 젊은 무인인 양산이지만, 그들의 수장은 손일서임을 알 수 있는 장면.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젊은 두 남녀가 아이의 명령을 받는 것을 이상한 눈빛으로 보았으리라.
양산은 축영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자 힘이 났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앞장을 서서 길을 올랐다.
그때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푸른 그림자가 날아와서 길 앞을 막아섰다.
‘뭐지?’
양산은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눈을 의심했다.
지금 일행이 가는 길은 왼쪽은 깎아지른 돌벽이고 오른쪽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다.
게다가 건너편 절벽은 수십 장이 떨어져 있었다.
소림사나 아미파의 고승이라면 모를까, 웬만한 경공으로는 뛰어넘을 엄두도 낼 수 없는 거리.
그런데 대체 어디서 인영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인영이 어떤 자인지 살피는 순간 양산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약관도 안 된 소년?’
눈앞의 인영은 자신보다 네다섯 살 이상 어려보이는 소년이었다.
은거 고수 뺨칠 만한 경공의 소유자가 고작 십대 소년이라니……!
양산은 재빨리 승패를 예상해 봤다.
절벽을 건너뛸 고수라면 승산이 없었다.
그렇다면 목숨을 버려서라도 길을 여는 것만이 마지막 남은 한 수.
‘뒷일을 부탁하오.’
양산은 축영을 향해 눈빛을 보낸 뒤 소년을 향해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런데 양산이 미처 검을 뽑지도 못한 찰나, 머리칼이 세찬 바람에 휘날리더니 서슬 퍼런 검끝이 목젖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걸음만 더 디뎠더라면 목이 검에 관통되어 즉사했을 터.
소년의 무공은 경공만큼이나 놀라웠다. 양산은 검 한 번 뽑지 못하고 패배를 직감했다.
이어서 믿기지 않는 무공의 소유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귀어진할 생각입니까? 그만두시죠.”
“……!”
소년의 말에 양산은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승산 없는 싸움. 양산은 처음부터 자신이 죽든 말든 눈앞의 상대를 죽이고 함께 동귀어진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생각마저 꿰뚫어 보고 있었다니…….
‘내 적수가 아니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이 대체 어떻게 저런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일까?
생전 처음 진정한 고수를 만나자 양산은 무력감에 몸을 떨 뿐이었다.
* * *
서백은 눈앞의 청년이 절망에 차서 고개를 떨구는 것을 조용히 쳐다봤다.
그의 뒤에는 청년과 비슷한 나이의 여인과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있었다.
‘역시 천리형의 말과는 다르군.’
서백은 철장방의 일을 돕겠다고 했을 뿐 그들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그리고 짐작이 들어맞았다.
‘저 아이가 부방주의 아들인가.’
두 남녀와 달리 용모와 의복이 정갈한 것을 볼 때 아이는 철장방 부방주였다는 손식의 아들이 확실했다.
천리형의 얘기만 들었을 때는 부방주의 파락호 아들이 철장방의 신물을 훔쳐서 달아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방의 규율을 어긴 파락호가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라고?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서백은 계속해서 두 남녀를 살폈다.
남자는 부방주의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방도일 것이다. 사냥덫에 걸려 중상을 입은 여인은 무공을 모르는 몸이리라.
그런데 청년과 여인이 서로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연인 사이인가?’
도망자들의 행색은 천리형의 얘기와 딴판이었다.
아니, 도망자보다는 차라리 피난민에 더 가까웠다.
서백은 이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철장방의 일은 철장방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서백이 청년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말했다.
“당신들이 철장방의 신물과 비급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소.”
예상대로 청년이 아니라 아이가 대답했다.
“당신은 천리형이 보낸 자요?”
“그렇습니다.”
“철장방도는 아닌 것 같은데.”
“천리형에게 보답할 일이 있어서 말이죠. 그러니 신물과 비급을 내놓으면 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서백으로서는 굳이 이들의 목을 벨 필요는 없었다.
신물과 비급을 되찾아 준다.
천리형에게 진 빚을 갚기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서백의 말에 일행 셋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요?”
“저는 비급과 신물 찾는 것만 도울 생각입니다. 싫다면 한바탕 싸우시지요.”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서백의 말은 냉혹했다.
항복하고 신물과 비급을 넘기면 목숨은 살려 주마.
그게 싫으면 목을 베겠다는 선언!
“어차피 당신들은 더는 도망갈 수 없습니다. 신호탄을 봤으니 추격대가 오고 있을 겁니다. 부상자를 데리고 도망칠 만큼 그들이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
서백이 여인의 다친 발을 슬쩍 본 뒤 말했다.
“게다가 비급과 신물은 방의 물건이니 새 방주에게 넘기는 게 도리입니다.”
“절대 그럴 수 없소!”
뜻밖에도 손일서가 서백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천리형은 방주이자 그의 아버지가 내친 파락호요. 방주께서는 나를 새 방주로 임명할 생각이셨소. 비급과 신물의 주인은 천리형이 아니라 바로 나요!”
“…….”
열 살도 안 된 아이치고는 눈빛과 태도가 당당했다. 스스로 새 방주라고 말하는 게 허언은 아니리라.
그러나 풍진 강호에서 어린 아이는 아무도 방주로 추대하지 않을 터.
그때 양산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실은 석 달 전에 철장방에 큰 변고가 있었소.”
“무슨 변고입니까?”
“방주님과 부방주님이 모두 돌아가신 일이오.”
양산이 철장방의 현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십여 일 전. 중원을 떠돌던 망자 떼에 휩싸여서 방주와 부방주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변고를 수습한 철장방은 새 방주를 추대하기로 했다. 방주는 죽기 전부터 부방주의 아들인 손일서를 새 방주로 점찍어 두었다.
방주는 외아들인 천리형이 있었지만, 소문난 파락호인 그는 이유 없이 살겁을 벌여서 소문이 극도로 안 좋았다.
“방주님은 오래전부터 천리형과 부자의 연을 끊고 있었소.”
그런데 방주가 죽고 철장방이 혼란한 틈을 타서 천리형이 새 방주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
천리형은 방주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방도들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천리형의 속죄는 거짓 꾸밈이었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방도들을 하나씩 죽였다. 또한 방주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에게 뇌물을 뿌려서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무림 방파는 혈연보다는 실력, 강호의 정리보다는 금전을 좇기 쉽다. 때문에 천리형에게 사람이 붙는 것은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손일서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천리형이 권력을 틀어쥔 뒤였던 것이다.
손일서는 부방주의 충복이었던 양산과 그의 연인 축영과 함께 야밤을 틈타 철장산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가만 놔둘 천리형이 아니었다.
천리형은 추격대를 조직해서 손일서 일행을 뒤쫓았다.
이후는 서백도 아는 일이었다.
서백은 손일서 일행을 보며 생각했다.
무공이 일류에 못 미치는 청년.
도주하는 데 도움 되지 않는 여인.
심지가 굳지만 아직 너무 어린 아이.
추격대가 뒤쫓는 자들은 전형적인 약자였다.
하지만 서백은 약자를 동정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약자를 돕겠다고 나서지 마라.
스승의 말에 따르면 무림은 전쟁터였다.
전쟁터에서 강자가 약자를 포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
얘기가 끝났는데도 서백이 말없이 있자 손일서 일행은 서로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양산이 입을 열어 부탁했다.
“강호의 정리를 아는 자라면 부디 우리를 도와주시오.”
“그렇게 하죠.”
서백이 흔쾌히 승낙하자 손일서 일행은 기쁜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봤다.
그러나 서백의 생각은 달랐다.
‘강호의 정리 따위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
서백이 손일서 일행을 돕기로 결심한 것은 단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천리형이 나와 일행을 속이고 이용했으니 그 빚을 갚아 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