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협곡의 추격전(1)
철장방은 서백 일행에게 물품을 제공했다.
주먹밥, 말린 육포, 벽곡단 등 며칠간 먹을 식량.
차가운 우물물이 담긴 가죽 물통 세 개.
마지막으로 근방 수백 리의 산세와 물줄기가 상세히 그려진 지도까지.
특히 주먹밥은 만들어 둔 것을 몽땅 제공했다.
“많이 시장해 보이니 가져가서 드시오.”
천리형은 서백 일행이 길을 헤매느라 굶주린 걸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일부러 언급하지 않고 서백 일행의 자존심을 챙겨 줬다.
주먹밥 한 보따리를 얻자 왕이삼은 입이 찢어져라 싱글벙글했다.
“오늘은 점심 저녁까지 배부르게 먹겠군.”
“밥이 상하기 전에 처리해서 짐을 줄이려는 겁니다.”
“자기들이 먹어도 되는 걸 몽땅 줬는데 말을 그렇게 하냐? 후배는 너무 매정해.”
“어련하시겠습니까.”
좀 이상한 감이 있었지만 서백도 왕이삼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철장방의 호의는 확실히 통이 컸다.
“혹시 술은 없을까? 후배가 말 좀 해 보지 그래?”
“추격대가 술 취해서 잘도 추격하겠습니다.”
“쓰읍, 역시 없겠지?”
왕이삼은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입술을 핥았다.
서백 일행은 감사를 표한 뒤 물품을 챙겼다.
그동안 방도들은 천막을 접어서 등에 멜 수 있도록 봇짐을 만들며 이동 준비를 했다.
떠날 준비가 끝나자 천리형은 자신을 포함한 열두 명을 네 명씩 삼개조로 나누었다. 모두 서백의 예상대로였다.
“철장방은 삼개조로 나누어서 세 방향으로 배신자들을 추격할 것이오.”
“그럼 우리는 어떡할까요?”
“당신들은 별동대로 자유롭게 놈들을 추격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서백 일행을 별동대로 움직이는 작전.
그것 역시 서백이 예측한 대로였다.
“자충, 이들에게 그걸 줘라.”
“예.”
자충이란 방도가 나와서 서백 일행에게 가죽 꾸러미를 건넸다.
서백이 꾸러미를 펼치자 불꽃놀이에 쓸 법한 폭죽 한 묶음이 나왔다.
하지만 눈앞의 폭죽은 불꽃놀이에 쓰는 물건이 아니었다.
세 가지 색깔로 구분되어 있는 폭죽들.
바로 아군에게 신호를 보낼 때 쓰는 전쟁용 폭죽!
“놈들을 발견하면 신호탄을 쏘시오.”
“그렇게 하죠.”
“파란색은 놈들을 발견했을 때, 노란색은 놈들을 추격할 때, 빨간색은 놈들을 잡았을 때 쓰면 되오.”
“알겠습니다.”
얘기가 끝나자 천리형이 몸을 돌려서 방도들에게 명령했다.
“철장방의 배신자들을 잡으러 이동한다.”
“존명!”
고작 열두 명밖에 안 되는 인원.
하지만 모든 방도들이 천리형을 향해 일제히 포권지례를 올리는 모습이 무림의 정파답게 위엄이 서려 있었다.
철장방 추격대 삼개조는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대낮에도 어두울 만큼 울창한 숲속.
때문에 철장방의 모습은 서백 일행의 시야에서 금세 사라졌다.
“후배는 일복도 많군.”
철장방이 보이지 않자 왕이삼이 한 마디 했다.
“장강삼협수로채에 이어서 이번에는 철장방이라니. 소림사로 급히 가야 된다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족족 부탁을 들어 줘도 되나?”
“어차피 가는 길입니다. 더 느려질 것도 없죠.”
“그건 그렇지만…….”
“덕분에 음식과 지도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저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굶주리면서 길을 헤매다 더 늦어졌을 겁니다.”
“에휴, 후배는 사람이 너무 좋은 게 탈이야.”
“언제는 매정하다고 하시더니.”
서백은 궁시렁대는 왕이삼을 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서백이 철장방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단순히 남을 돕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무림에서 연줄은 은자보다 귀하다.
-연줄을 위해서 허리를 굽힐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만들 수 있는 연줄은 일단 만들어 둬라.
‘스승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갈 생각이지?”
“일단 지도를 보고 정하죠.”
서백은 나무 그루터기에 지도를 펼쳤다.
“철장산에서 아미파로 가려면 서쪽에 있는 촉도관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오려고 했던 방향이군.”
“네. 반대로 소림사로 가려면 험난한 땅을 피해 동쪽으로 돌아가는 게 좋군요.”
“그렇군.”
“철장방 추격대 삼개조 중에 두 조는 각각 아미파와 소림사 방향을 수색할 겁니다.”
“그럼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갈 건데? 서쪽이냐 동쪽이냐?”
성질 급한 왕이삼이 끼어들자 서백이 대답했다.
“천리형이 우리 보고 별동대를 맡으라고 했죠.”
“별동대? 말은 많이 들어 봤는데 뭔 소리지?”
“병법에서 별동대(別動隊)는 본대와 따로 움직이는 자유 부대를 말합니다.”
“쳇, 그래. 나는 까막눈이라서 병법은 모른다.”
왕이삼이 토라져서 고개를 돌렸다.
서백은 그를 무시하고 유심히 지도를 살폈다.
“우리가 여기서 길을 잃었군요.”
서백이 지도 위쪽에 그려진 협곡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마치 川자 모양을 그려 넣은 것처럼 세로로 난 협곡이 세 줄로 늘어서 있었다.
“도망자들 중에 현명한 자가 있다면 어려운 길로 도주할 겁니다.”
“이 협곡으로 갈 거란 소린가?”
“네.”
유소운이 묻자 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가 우리처럼 길을 잃으면?”
“우리는 협곡을 피하느라 억지로 우회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협곡을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간다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서백이 검지로 川자 모양의 협곡을 위쪽을 향해 죽 훑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협곡을 통과한 다음 동쪽으로 돌아가면.”
서백의 검지가 이번에는 작게 반원을 그렸다.
“융중이 나옵니다.”
융중. 제갈세가의 본관이 있는 곳.
“서백 말이 맞군. 협곡을 피하지 말고 북쪽으로 따라가면 융중이 나오는군.”
“쳇! 헤매기 전에 진작 알아차리지 그랬냐.”
유소운과 왕이삼이 눈빛을 교환하며 한 마디씩 했다.
“협곡을 통과하는 것은 힘들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추격대를 따돌리기 쉬워지는 거죠.”
“시간 싸움이 되겠군.”
“시간은 충분합니다. 도망자들의 수장이 실리적인 자가 아니라는 가정하에 말이죠.”
왕이삼이 서백의 말뜻을 몰라서 물었다.
“실리적인 자? 그게 무슨 소리냐?”
“수장이 실리적이라면 덫을 밟은 자를 버려두고 갈 겁니다. 일행에 부상자가 있으면 속도가 느려지니까요.”
“……!”
덫을 밟아서 중상을 입은 자를 버려두고 간다.
그럴 경우 확실히 도주 속도는 빨라지리라.
서백의 냉철한 말에 왕이삼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부상을 입어도 후배는 그냥 가지 않겠지?”
“은원보가 아까우니 그럴 리야 없죠.”
“…….”
“농담입니다.”
“농담 한번 섬뜩하구만.”
이번에는 유소운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의 수장이 어떤 자라고 생각하냐? 실리적인 자, 아니면 강호의 정리를 아는 자?”
“어떤 자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실리를 택하리라고 가정하고 추격하면 됩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면 후환이 없는 법이죠.”
“우문현답이군.”
유소운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씨익 웃었다.
“갑시다.”
일행은 서백을 선두로 해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서백이 발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철장방이 사라진 곳을 봤다.
서백은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왜 추격대를 삼개조로 나누었지?’
도주자들을 뒤쫓을 때 추격대를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川자 모양 협곡까지 온 이상 도주자들은 융중으로 향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지금으로서는 추격대를 나누지 말고 모두 川자 협곡을 뒤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협곡은 지도가 있어도 길을 찾기 힘들다.
열두 명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인원.
그런데 안 그래도 부족한 인원을 삼개조로 나눈다고?
‘천리형이 그걸 몰랐을까?’
줄곧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천리형.
하지만 서백은 그 눈빛 뒤에 숨겨진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몰랐을 리 없다.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맹금류 같은 자니까.’
망자 떼의 습격을 받아 방주를 잃고 조직을 개편 중인 철장방.
서백은 철장방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비밀이 무엇인지 추리하기 힘들었다.
-만약 명문정파와 만든 연줄이 썩은 동앗줄이라면 가차 없이 끊어 버려라.
‘그러겠습니다, 스승님.’
서백은 스승의 말을 떠올린 뒤 몸을 돌려서 유소운과 왕이삼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났을 때.
숲속에서 철장방도들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장방 추격대 삼개조 중 한 조.
그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서백 일행이 이동하자 나타난 것이었다.
조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방향을 살피며 말했다.
“제갈세가 쪽으로 가는 것 같군. 역시 방주 말대로다.”
그러자 방도 하나가 끼어들었다.
“당장 놈들 뒤를 따라잡자!”
“그새 명령을 잊어버렸냐? 방주가 밥 한 끼 먹을 시간 거리를 유지하라고 했잖아.”
“저런 꼬마가 수장인 놈들인데 별일 있겠어?”
“안 돼. 명령 엄수는 철장방 규칙이다.”
“쳇, 누가 들으면 벌써 부방주가 된 줄 알겠군.”
조장은 모삼국이란 사내였다.
그는 자충이란 방도와 천리형의 오른팔을 놓고 물밑에서 경쟁하는 중이었다.
“이번에 공을 세우면 내가 자충 놈을 꺾고 부방주에 오른다. 그러면 네놈들한테도 떡고물이 안 떨어지겠냐?”
“흐흐흐,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네 명의 방도들은 서백 일행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숲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추격전이 시작된 지 만 하루가 지났다.
먼저는 협곡에서 길을 잃었던 서백 일행.
그러나 지금은 협곡 지리가 상세히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덕분에 삼 일 동안 헤맸던 협곡에서 단 하루 만에 길을 찾는 데 성공했다.
이제 위로 북상하다가 협곡이 끝났을 때 오른쪽으로 돌면 융중으로 가는 길이 나오리라.
지난 밤 협곡에서 노숙한 일행은 추격 재개 전에 아침을 먹었다.
주먹밥은 어제 다 먹어치워서 벽곡단을 먹어야 했다.
“이놈의 벽곡단! 얼마나 딱딱한지 씹히지도 않네.”
“굶는 것보다야 낫습니다.”
“쳇, 주먹밥은 맛있었는데.”
“좀 아껴 드시지 그랬습니까.”
왕이삼은 투덜대면서도 열심히 벽곡단을 씹었다.
“그런데 신물과 비급을 훔쳐서 달아났다고? 무림은 무슨 놈의 신물 싸움이 이리 많냐? 장강삼협수로채 때도 신물이 문제더만.”
그 말에 유소운이 대답했다.
“중원 대륙은 평생 돌아다녀도 다 못 가본다는 말이 있지.”
“그래서?”
“만약 누가 무림맹을 찾아와서 자신이 철장방주라고 한다면? 그자가 정말 철장방주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하지?”
“그거야 뭐 방주라는 증거를 내놓으면…….”
“그게 바로 신물이 아닐까?”
“끄응…….”
“게다가 비급까지 훔쳤다잖아?”
유소운의 말이 일리 있자 왕이삼은 입을 다물었다.
비급 없이 장문인이 직접 말로 해서 무공을 전수하는 문파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장문인이 예상 못한 죽음을 당하면 비전 무공이 실전되고 만다.
때문에 무림 문파는 비전 무공을 기록해서 비급으로 남겨두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방파는 혈연이 중시되는 문파나 세가와 달리 실력을 최우선한다. 비급이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
즉 도망자들은 철장방의 최고 보물을 훔친 것!
“그래도 허구헌날 비급 타령이니 신물이 나는군.”
“이게 다 망자 창궐 때문이지.”
왕이삼과 유소운이 쓴웃음을 지을 때였다.
서백이 벽곡단을 씹던 입을 멈추고 어딘가를 뚫어지게 보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러나, 후배?”
“무언가 움직이는군요.”
서백이 검지로 멀리 보이는 산 중턱을 가리켰다.
“허, 저 먼 곳이 보인다고?”
왕이삼이 혀를 차자 유소운이 말했다.
“뭔가 어른거리고 있군.”
궁수인 유소운은 왕이삼보다 시력이 좋고 집중력이 뛰어났다.
서백은 심호흡을 하며 석가심결을 시전했다.
멀리 산 중턱을 올라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바로 세 명의 인영!
서백이 씹고 있던 벽곡단을 땅에 뱉으며 말했다.
“도망자들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