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유령선(1)
잠시 후 잠입조가 모두 갑판 밑으로 내려왔다.
갑판 밑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흑이었다.
횃불 앞만 간신히 사물의 윤곽을 구분할 수 있을 뿐, 횃불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 바로 새까만 어둠이 몰려왔다.
“배의 모든 열쇠는 지휘실에 보관되어 있소. 지휘실로 먼저 가야 하오.”
모혁광의 말에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갑판에선 지휘실이 잠겨 있지 않았소?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거기 열쇠가 있다고?”
“선실 바닥에 아래로 연결되는 구멍이 나 있소.”
양소소가 설명했다.
“배에 불이 나거나 난파되었을 때 몸을 피하기 위한 비상구요.”
“흐음, 편리하게 만들었군.”
왕이삼이 수긍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백이 반문했다.
“비상구도 문처럼 안에서 걸어 잠갔다면요?”
서백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모혁광과 양소소가 시선을 교환했다. 모혁광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때는 부숴야겠지.”
채도 둘이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섰다.
복도는 키가 큰 유소운이 머리가 닿을 만큼 천정이 낮았다. 또한 어른 네 명이 지나가면 어깨가 닿을 만큼 폭이 좁았다.
“밖에서 볼 땐 엄청 크더니만 안은 왜 이렇게 좁아터졌지?”
“배는 원래 그렇소. 공간을 쪼개 써야 하니까.”
왕이삼이 투덜거리자 유소운이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배는 겉은 커져도 내부는 그대로지. 선실과 선창을 늘려서 사람과 짐을 더 실어야 하니까. 아마 복도도 미로처럼 복잡할 거요.”
“자네는 뱃사람도 아닌데 아는 게 많군?”
“누가 중원을 떠돌아다닐 때 나는 강을 좀 건너서 말이오.”
“쳇, 어련하시겠냐.”
유소운의 말이 맞았다. 갑판 아래 복도는 몇 번씩 갈림길이 나오는 것도 모자라 밑창으로 내려가는 구멍과 사다리가 계속 나왔다.
“이거야 원, 대낮에 와도 길을 잃고 헤매겠군.”
“미로라고 하지 않았소.”
왕이삼과 유소운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서백은 복도의 갈림길 순서와 개수를 머릿속에 암기하고 있었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서 몰랐다는 말은 하지 마라. 죽은 다음 염라대왕 앞에서 변명한다고 들어 주지 않는다.
스승의 말은 항상 옳다. 죽은 자의 하소연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미리 대비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일 터.
앞장 선 채도들은 중간에 한 번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전진하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결국 직진하는 셈.
‘중앙 돛이 있는 곳이군.’
갑판 아래로 깊숙이 고정된 돛의 기둥 때문에 경로를 중간에서 비튼 것이리라.
잠시 후, 막다른 벽이 나오자 채도 둘이 발을 멈췄다.
“다 왔습니다.”
채도가 복도에 횃불을 갖다 대자 벽면에 나무토막이 나란히 줄을 이어 박혀 있었다. 붙박이 사다리였다.
채도가 사다리를 밟고 올라간 뒤 네모난 구멍의 판자 뚜껑을 밀었다. 뚜껑은 열리지 않았지만 잠긴 것은 아닌지 위아래로 덜컹거렸다.
“위에서 뭔가 걸린 것 같습니다.”
“경첩을 부수고 열어라.”
채도가 뚜껑 틈새에 쇳대를 끼워 넣은 뒤 잡아당겼다. 끝부분이 고리처럼 휘어진 쇳대가 비틀리자 경첩이 박살났다.
와지끈.
“그럼 열겠습니다.”
채도가 박살난 경첩 쪽으로 뚜껑을 밀어젖혔다. 선실의 바닥을 겸하고 있는 뚜껑이 위를 향해 벌컥 열렸다.
바로 그때, 뚜껑 위에 놓여 있던 무언가가 고개를 치켜든 채도의 이마 위에 정통으로 떨어졌다.
빡. 우당탕탕.
“크윽!”
이마를 세게 가격 당한 채도가 붙박이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바닥을 뒹굴었다.
정체불명의 물건은 채도의 이마와 충돌한 뒤 복도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둥그렇고 큼지막한 물건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뭐야?”
채도가 물건을 향해 횃불을 갖다 댔다. 순간 채도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복도를 뒹굴고 있는 물건은 사람의 잘린 목이었다.
목은 생전에 장강삼협수로채의 채도였던 것으로 보였다. 다른 채도들처럼 푸른 청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채도가 잘린 목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저건 채주선에 탔던 현승지입니다!”
“확실하냐?”
“네. 저랑 승지는 광동 출신이라서 친분이 있었습니다. 채주선에 타게 됐다며 기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혁광이 횃불을 들고 잘린 목을 유심히 살핀 뒤 양소소에게 보고했다.
“맞습니다. 저도 이자의 얼굴을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알았소. 근데 채도의 목이 왜 잘린 채로 지휘실 비상구를 막고 있는 것이지?”
“그건… 지휘실로 올라가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모혁광이 그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리자 왕이삼이 서백에게 귓속말을 했다.
“혹시 망자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죠.”
“그럼 빨리 목을 베어야… 아니, 목은 이미 잘렸잖아?”
왕이삼은 속삭인다는 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왕이삼을 쳐다봤다.
“아니, 난 그냥… 후배, 어떻게 하면 좋겠나?”
“목을 베어도 혈선충의 심맥을 가르지 않는 이상 망자는 죽지 않습니다.”
서백은 잘린 목의 단면을 살핀 뒤 인물들에게 말했다.
“잘린 지 오래돼서 살이 잔뜩 오그라들었군요. 척수에 혈선충이 박혀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 두고 보기로 하죠.”
“그러는 게 좋겠소.”
양소소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모혁광이 눈짓으로 신호하자 채도 둘은 침을 꿀꺽 삼킨 뒤 한 명씩 붙박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채도가 횃불을 들고 뚜껑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상 없습니다.”
채도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게 밑에까지 전해질 정도.
“올라가라.”
양소소가 명령하자 채도 둘과 모혁광이 차례로 지휘실로 올라갔다. 양소소와 서백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모든 잠입조가 뚜껑 위로 올라갔을 때였다.
번쩍.
바닥에 뒹굴고 있던 잘린 목이 두 눈을 떴다. 잘린 목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알을 빙글빙글 굴리면서 잠입조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 * *
지휘실에 올라간 잠입조는 구석구석 샅샅이 살폈다.
문에는 자물쇠를 잠그고 빗장을 지른 것도 모자라 탁자와 의자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갑판에서 문을 열 수 없던 것도 당연했다.
서백이 그걸 보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서 필사적으로 문을 막았군요. 밖에 있는 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역시 망자가 나온 걸까?”
“십중팔구 망자일 겁니다.”
“제길, 망자는 아니길 바랐는데.”
왕이삼은 소름이 돋는지 양손으로 팔뚝을 문질렀다.
지휘실에는 신분을 알 수 없는 해골이 한 구 있었다. 목이 잘리지 않고 몸통에 붙어 있는 해골이었다.
서백은 해골을 보면서 생각했다.
‘굶어 죽었군.’
그렇다면 얘기가 간단해진다.
‘이 해골이 아까 떨어진 잘린 목을 베었을 터. 그런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지휘실에 틀어박혔을 것이다. 만약 잘린 목이 망자가 아니라면? 망자인 줄로 착각하고 베었다는 뜻이다.’
그밖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상상해 봤지만 지금으로서는 명확한 해답을 찾기 힘들었다.
문제는 잘린 목의 정체가 망자인지 아닌지였다.
서백은 지휘실을 살폈지만 이렇다 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양소소가 해골의 신장과 골격 크기를 유심히 살피더니 안도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아니오.”
죽었을 확률이 높은 일대채주 양곡. 어쨌든 눈앞의 해골은 그가 아니니, 양소소로서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희망을 조금이라도 더 품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양소소가 한쪽에 놓인 탁자를 뒤지더니 열쇠 꾸러미를 찾아냈다.
“열쇠를 찾았소. 이거면 채주선에 있는 모든 선실의 문을 열 수 있소.”
“그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죠, 채주님.”
“그렇게 하시오.”
잠입조는 사다리를 타고 배 밑창으로 내려왔다.
양소소가 열쇠 꾸러미를 정리한 뒤 모혁광에게 절반을 건네며 말했다.
“부채주는 채도들과 기관실로 가서 키가 어떻게 된 건지 조사하고 보고하시오.”
“존명.”
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키는 갑판 위에 있다. 하지만 채주선이 장강 지류를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키는 고장 났을 게 뻔한 일.
양소소는 그렇게 생각하고 키가 연결된 기관실을 조사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만약 키를 고칠 수 있다면 채주선을 몰고 장강 지류를 벗어나는 것도 가능할 터!
“나는 무림인들과 함께 채주실로 가서 청룡환을 찾겠소.”
청룡환(靑龍環)은 용이 새겨져 있는 둥근 고리로, 양곡이 독립할 때 장강수로채에서 준 신물이었다. 장강삼협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신물.
무림 문파는 고유의 신물이 있어서 그것을 문파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삼는다. 즉 양곡이 없어도 청룡환은 갖고 있어야 이후 장강삼협수로채를 운영할 명분을 가지는 것이다.
양소소로서는 반드시 찾아야 되는 물건!
양소소는 잠입조를 둘로 나눠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 두 가지를 배정한 것이었다.
“일을 끝낸 뒤 다시 여기로 모이는 것으로 하겠소.”
“알겠습니다.”
잠입조는 두 패로 나뉘어서 각각 채주실과 기관실을 향해 이동했다.
그런데 인물들이 막 이동하려 하는데 서백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들을 불러 세웠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무엇이오?”
“잠시 머리를 굴려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됩니다.”
서백이 품에서 대나무통 두 개를 꺼내며 말했다.
“갑판에 난 지휘실은 안에서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또한 바닥에 난 비상구 뚜껑도 쇳대를 써서 경첩을 부숴야 간신히 열 수 있었습니다.”
“알고 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모혁광이 뜬금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서백은 대나무통 하나의 뚜껑을 열면서 대답했다.
“여기 바닥에 떨어진 목 말입니다. 비상구를 열었을 때 목이 떨어졌는데 지휘실에 몸통이 없습니다.”
“……!”
인물들이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봤다.
서백의 말이 사실이었다. 지휘실에는 해골 한 구가 있었을 뿐 목이 없는 시체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지 않았는가?
“모든 문이 잠긴 밀실. 그런데 잘린 목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
서백이 대나무통을 기울여서 잘린 목에 기름을 뿌렸다.
“이 목은 망자입니다.”
“이게 망자라고? 그냥 죽은 지 오래 된 것 같은데?”
모혁광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말처럼 잘린 목은 푸르뎅뎅하게 불어터진 두 눈을 꼭 감고 있어서 어딜 봐도 죽은 시체로 보였다.
“두고 보면 알겠죠.”
서백이 다른 대나무통, 화섭자를 잘린 목에 대고 훅 불었다. 불씨가 붙자 기름에 금세 불이 붙었다.
화르르륵.
순간 잘린 목이 두 눈을 번쩍 뜨고 괴성을 질렀다.
꾸웨에에엑!
망자는 목만 남아 있기 때문에 불에 타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잘린 목은 아래위로 쿵쿵 요동을 치다가 곧 혈선충 다발을 혀처럼 길게 빼물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인물들은 입을 딱 벌리고 경악했다.
서백이 채도한테 손도끼를 빌린 뒤 목을 향해 내리찍었다.
쩍. 꾸웨엑…….
후환을 남기지 않는 마무리. 확인사살.
“목 뒤쪽을 정확히 찍었으니 혈선충의 심맥은 죽었을 겁니다. 어딘가에 있을 몸통도 함께 죽을 터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서백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며 빌린 손도끼를 채도에게 건넸다. 채도는 얼떨떨한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도끼를 받았다.
서백은 어둠 속으로 몸을 돌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인물들이 발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 안 하고 뭣들 하십니까?”
“…….”
서백의 말에 인물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동을 시작했다.
양소소와 모혁광은 잠입조가 달라 서로 길이 갈렸지만 머릿속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무림인들의 수장이 약관도 안 된 소년으로 보여서 이상했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군.
모혁광과 채도들은 기관실로.
양소소와 서백 일행은 채주실로.
두 패로 나뉜 잠입조는 각각 복도 반대편으로 이동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