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장강삼협수로채(3)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양소소의 말에 왕이삼이 목소리를 높이며 반문했다.
“우릴 구해 줬으니까 목숨값을 치르라고?”
“그렇소.”
“아니, 구해준 건 고맙다만 억지로 돈을 내놓으라니 이게 수로채야 도적떼야? 내 평생 중원을 돌아다녔지만 이런 방파는 처음이다!”
서백이 조용히 팔을 들어 왕이삼의 말을 막았다.
“선배님, 제가 얘기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후배…….”
분통을 터뜨리던 왕이삼은 서백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서백은 일행 중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왕이삼과 유소운은 은연중에 일행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백이 왕이삼을 막은 것은 양소소의 눈빛 때문이었다.
오만한 말과는 달리 그녀의 두 눈에 담겨 있는 절박함.
잠시 양소소를 응시하던 서백이 입을 열었다.
“목숨값은 돈으로 치러야 합니까?”
“아니오. 꼭 돈이 아니더라도…….”
“수로채가 의뢰하는 일을 해결해 주면 된다는 겁니까?”
“……!”
양소소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백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뜻.
“우리가 아미파의 배를 타고 온 무림인이라서 일을 의뢰하는 것이군요?”
그 말에 양소소가 옆에 있는 중년인을 돌아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짐작이 맞았군.’
서백 일행이 배에 처음 올랐을 때부터 그들을 유심히 살피던 양소소.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서백의 추리는 정확했다.
“그렇소. 당신들에게 한 가지 일을 의뢰하고 싶소.”
양소소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 양소소의 아버지 양곡은 장강수로채에서 독립한 뒤 장강의 최상류와 사천을 잇는 지류에 따로 방파를 열었다.
그것이 바로 장강삼협수로채.
일대 채주 양곡은 보를 건설해서 협곡의 물살을 늦추고 통행세도 가볍게 받았다. 장강삼협수로채는 상인과 여행자들의 칭송을 들으며 번성했다.
그런데 망자가 창궐하자 모든 게 바뀌었다. 교역이 끊기자 수로채의 수입이 바닥을 쳤던 것이다.
그러던 중 채도 하나가 망자에 물렸다. 망자가 된 채도는 동료들을 물어뜯었고 배는 순식간에 망자로 가득 찼다.
양곡이 직접 타고 지휘하는 배인 채주선 역시 망자 창궐을 피할 수 없었다.
장강삼협수로채에서 가장 큰 채주선은 물살이 험한 상류 계곡과 수심이 깊은 장강을 동시에 오갈 수 있는 유일한 배였다.
그런 채주선마저 망자판이 되자 장강삼협수로채는 몰락했다. 게다가 채주선이 암초와 충돌하면서 보를 무너뜨리는 바람에 소용돌이까지 생겼다.
양소소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새 채주가 되었지만, 배 한 척과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채도들로는 방파를 다시 일으키기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주선이 장강의 지류에서 홀연히 나타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괴이한 것은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나타난다는 사실!
양소소는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왜 장강 지류를 떠돌아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채주선을 찾아 두 번 채도들을 보냈소. 그러나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었소.”
“…….”
“삼 일 뒤면 보름달이 뜨오.”
“채주선에 올라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라는 것이군요?”
“그렇소. 물론 아버지의 생사도 알아내야 하오.”
서백은 잠시 생각을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장강삼협수로채의 의뢰를 맡겠습니다.”
“그럼 삼 일 뒤에 시작할 테니 준비해 주시오.”
얘기가 끝나자 일행은 채주실을 나왔다.
셋이 선실로 돌아왔을 때, 왕이삼이 물었다.
“한시라도 급히 중원으로 나가야 된다고 하면서 의뢰를 승낙한 이유가 뭐냐?”
“간단합니다. 목숨값을 빚졌으니까요.”
“쳇, 그놈의 목숨값. 누가 구해 달라고 했나?”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장강삼협에서 중원으로 나가려면 어차피 배를 타야 합니다.”
“뭐, 그건 그렇지.”
“지금 배에서 내린다면 암벽을 타고 험지를 넘어야 합니다. 차라리 망자 떼를 피해서 촉도관 벌판을 통과하느니만 못한 셈이 되죠.”
“끄응…….”
서백의 말이 반박할 곳이 없자 왕이삼은 입을 다물었다.
유소운도 한 마디 했다.
“들어 보니 너무 당연하군.”
“간단한 이유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쨌든 이미 결정된 일. 왕이삼과 유소운은 서백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셋은 침상에 팔다리를 쭉 펴고 몸을 뉘여서 그간 쌓인 피로를 풀었다.
한편, 채주실에서는 양소소가 중년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부채주, 정말 저들에게 일을 맡겨도 좋겠소?”
“물론입니다.”
부채주라 불린 중년인의 이름은 모혁광.
사십대 중반의 모혁광은 얼굴 한 쪽에 기다란 검상이 난 것 치고는 온화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양소소의 아버지가 실종되자 채도들은 모혁광을 새 채주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모혁광은 채도들을 설득해서 양소소를 임시 채주로 올렸다.
그런 만큼 양소소에게 모혁광은 오른팔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서백 일행을 끌어들이자는 것도 모혁광이 계획한 것이었다. 양소소는 서백에게 승낙을 받아 냈지만 내심 모혁광의 계획에 반대하고 있었다.
“채주선 잠입을 다시 시도하는 건 찬성이오. 하지만 아버지는 수로채 일에 타 방파인을 끌어들인 적이 없소.”
양소소가 말했지만 모혁광은 그녀를 설득했다.
“이미 두 번이나 채도들을 보냈지만 모두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일 뿐 실패라고 하긴…….”
“안타깝지만 그들은 죽었을 겁니다. 아미파의 배를 타고 온 무림인들이니 무공 수위가 높을 겁니다. 저를 한 번 믿어 주십시오.”
이전 잠입 인원이 모두 죽었으리라는 말.
모혁광의 말은 언뜻 냉혹하기 들리지만 사실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채도들에게 미련을 갖고 있던 양소소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알겠소. 항상 고맙소, 부채주.”
“별말씀을.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모혁광은 양소소를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채주실을 나갔다.
양소소는 채주실에 혼자 남게 되자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제가 구하러 갈게요. 그때까지 몸 조심히 계세요.”
* * *
배는 물살이 급한 협곡을 지나며 장강의 하류로 나아갔다.
도중에 아미파의 배를 박살냈던 소용돌이보다 물살이 더욱 세찬 곳도 몇 번씩 지나쳤다.
왕이삼이 질린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서백 말대로 이 배를 타길 잘했군. 계속 아미파 배를 탔으면 물고기밥이 될 뻔했어.”
그러자 유소운이 그를 놀렸다.
“물고기도 은원보는 삼키지 못할 테니 다행이군.”
“물고기밥이 되기 전에 구해 주지 않을 셈이냐?”
“매번 목숨값을 못 받다 보니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말이지.”
“에라, 이 매정한 놈!”
일행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루함을 달랬다.
서백 일행이 배를 탄 지 삼 일이 지났다.
곧이어 해가 떨어졌다. 실종된 채주선을 찾아 나설 시간이 된 것이다.
채주선에 잠입할 인원이 정해졌다.
서백 일행이 세 명, 부채주 모혁광과 환도를 잘 다루는 채도가 두 명. 모두 합쳐서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양소소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도 함께 가겠소.”
“채주님, 위험한 일은 저희들에게 맡기시죠.”
“더 이상 뒷짐 지고 지켜볼 수 없소. 이번에는 채주선의 비밀을 반드시 밝혀낼 것이오.”
양소소가 고집을 부리자 모혁광도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잠입 인원은 모두 일곱이 되었다.
채도들이 잠입 장비들을 갑판에 내려놓았다.
기름을 먹인 천을 두른 횃불, 질긴 삼을 세 겹으로 꼰 밧줄, 못을 뺄 때 쓰는 쇳대, 나무 벽을 뚫는 손도끼 등등.
배가 난파하거나 좌초할 때 필요한 최적의 장비들.
그러는 사이 배는 장강의 지류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원 대륙의 동서를 관통할 만큼 길다고 해서 붙은 이름, 장강(長江).
장강의 지류는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기로 유명하다. 특히 홍수가 나면 지류가 크게 바뀌는 경우가 허다했다. 평생 장강에서 산 뱃사람도 길을 잃는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배가 물살이 빠른 지류로 이동했다.
그때 어디선가 자욱한 물안개가 몰려오더니 곧이어 일 장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거야 원, 귀신이라도 나오겠군.”
왕이삼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달밤에 술 마시는 이백도 아니고 웬 놈의 배가 보름달이 뜨면 나와? 평생 중원을 돌아다녔지만 이런 해괴한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군.”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우릴 속일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
그때였다.
안개가 스르르 걷히고 휘영청 뜬 달이 강을 비추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배를 가렸다.
곧이어 장강삼협수로채의 채주선이 물안개를 걷고 장엄한 자태를 드러냈다.
서백 일행은 배의 크기에 깜짝 놀랐다.
“……!”
지금 타고 있는 배도 아미파의 배보다 두 배는 컸다. 그런데 채주선은 지금 배보다 두 배 이상 더 큰 것이 아닌가?
“어마어마하군.”
왕이삼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무림에서는 문파의 위세를 알려면 사찰이나 장원의 크기를 보라는 말이 있다.
절세 고수는 오랜 세월 무공을 수련하거나 재능이 천부적이어야 탄생한다. 때문에 고수를 배출하는 것은 문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
반면 사찰이나 장원의 크기는 현재 문파가 얼마나 번성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척도였다.
가히 촉도관의 성채를 방불케 하는 채주선!
장강삼협수로채가 망자 창궐 이전에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모혁광이 채도들에게 명령했다.
“배를 대라.”
채도들이 노를 젓자 배가 천천히 움직여서 채주선의 옆에 나란히 붙었다.
“시작하라.”
채도들 네 명이 앞으로 나와서 끝에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빙빙 돌린 뒤 채주선으로 던졌다.
휘릭. 철그럭.
새의 발톱을 닮은 갈고리가 채주선 난간에 걸렸다.
채도들이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네 줄의 밧줄 사이사이에 거미줄처럼 이음매가 펼쳐졌다. 배에서 배로 건널 때 쓰는 사다리 밧줄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잠입조 일곱 명은 사다리 밧줄을 타고 채주선으로 넘어갔다.
잠입조가 모두 건너오자 채도 두 명이 갈고리를 들어서 다시 배로 던졌다. 배와 채주선을 잇는 다리가 사라진 것이다.
왕이삼이 그새를 못 참고 불평하자 유소운이 한 마디 했다.
“아니, 멀쩡한 사다리 밧줄을 왜 없애지?”
“물살이 빨라지면 채주선에 끌려와서 배가 뒤집어질 수 있어서 그렇소.”
“그런가?”
“평생 중원을 돌아다닌 사람 치고 아는 게 너무 없군.”
“너 잘났다! 난 육지만 다녀서 강은 모른다.”
둘의 대화는 여느 때처럼 정겨웠다.
모혁광이 배에 남은 채도들에게 명령했다.
“거리를 두고 채주선을 따라와라.”
“존명.”
배가 멀어지자 본격적으로 잠입을 준비했다.
채도 두 명이 화섭자를 불어 횃불을 밝히자 어두컴컴하던 갑판이 환하게 밝아졌다.
석가장의 앞마당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넓은 채주선의 갑판.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갑판이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돛이 제대로 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밧줄 매듭도 튼튼합니다. 이건 꼭 며칠 전에 묶은 것 같은데요?”
채도 둘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사람 없이 장강을 떠돌아다니는 배가 잘 관리되고 있다니? 게다가 갑판에는 사람 한 명 없지 않은가?
인물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동요하고 있을 때, 서백은 상황을 짐작하며 생각했다.
‘역시 망자였군.’
사람 없이 떠돌아다니는 채주선의 비밀.
이 배에는 망자가 창궐한 게 틀림없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망자가 되었으리라.
그렇다면 망자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이번 일의 관건이 될 터.
선미로 갔던 채도 한 명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지휘실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습니다.”
잠입조는 서로를 쳐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만약 망자 사태가 터졌으면 문을 열고 밖으로 탈출할 일이지, 안에서 문이 잠겨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보고를 들은 모혁광이 명령했다.
“짐을 내리는 곳을 통해 선창으로 내려간다.”
채도 둘이 배 중앙에 난 구멍으로 밧줄을 내렸다. 구멍 밑은 한 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채도 하나가 밧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바닥에 발이 닿자 재빨리 몸을 숙이고 환도를 치켜들었다. 이어서 횃불을 들고 몸을 돌리며 사방을 살폈다.
동, 남, 서, 북…….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 없습니다.”
채도가 보고하자 모혁광이 잠입조를 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속도가 관건이오. 모두 계획한 것을 재빨리 실행하시오.”
당연한 말이었다.
사람이 없는데 혼자 장강을 떠도는 배. 이곳에 한시라도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잠입조는 한 명씩 밧줄을 타고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