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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22화 (22/123)

22화 장강삼협수로채(2)

사공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보가 부서진 바람에 물살이 뒤엉켰소. 소용돌이 속에 배가 들어가면 끝장이오!”

사공의 말이 아니라도 한눈에 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흡사 태풍처럼 세차게 돌고 있는 소용돌이.

소용돌이는 강의 한복판에서 돌고 있기 때문에 가장자리로 비껴간다면 피할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문제는 배의 진로가 소용돌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것.

“저곳은 암초가 가득하오. 일단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소!”

사공이 노를 저어서 배의 진로를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진로는 조금도 틀어지지 않았다.

사공의 힘으로는 배의 방향을 바꾸기엔 역부족. 게다가 노는 한 자루밖에 없었으니…….

서백이 사공 옆에 붙으며 말했다.

“노를 이리 주십시오.”

“노는 아무나 젓는 게 아니오. 뱃일을 안 해 봤으면…….”

사공은 고집을 부리며 노를 놓지 않았다.

‘말다툼할 시간이 없다.’

퍽. 서백은 사공의 겨드랑이 밑을 팔꿈치로 쳤다.

“커헉…….”

사공이 노를 놓치며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공을 담아서 점혈한 건 아니지만 혈도를 정확히 쳤으니 순간적으로 호흡이 마비되었으리라.

서백은 재빨리 노를 받아들었다.

그런 다음 만 하루 동안 배를 타고 오면서 사공이 노를 젓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한 번 휘젓고 방향을 틀어서 돌린다.’

후으읍. 숨을 들이마신 뒤 노를 젓기 시작했다.

촤아악. 서백이 양팔을 잡아당기자 노가 물을 세차게 휘저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서백은 이번에는 양팔을 뻗었다. 하지만 무작정 젓지 않고 노를 비틀어서 물살에 미끄러지도록 했다.

‘물살과 정면으로 맞서려 하면 노가 부러진다.’

노는 길쭉한 부채와 닮았다. 바람이 거셀 때 부채를 억지로 부치려고 했다간 부채대가 부러질 터.

물살을 비껴서 노를 되돌린 서백은 소용돌이의 방향에 맞게 노가 돌아왔을 때 재차 물살에 맞춰서 휘저었다.

촤아아악.

마침내 배의 진로가 바뀌었다.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향하던 배가 이제 가장자리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이대로 계속 노를 저으면 배는 소용돌이를 피해서 강 하류로 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예상 못한 난관이 터졌다.

쿵. 배가 크게 흔들리며 요동쳤다.

“암초밭이다!”

사공이 외쳤다.

뱃전으로 고개를 내민 서백은 눈썹을 찡그렸다.

물살이 거세서 흙탕물이 다 된 물속 아래로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암초들이 뾰족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막 배의 진로를 바꾼 찰나.

‘암초를 피할 방법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굉음이 터지면서 배 앞의 선수가 붕 뜨더니 아래로 가라앉았다.

쿠우우웅.

배 밑창이 큰 암초와 충돌한 것이었다.

“밑창에 구멍이 뚫렸소!”

곧이어 바닥에서 물이 콸콸콸 새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유소운이 서백을 보며 말했다.

“뭍으로 가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를 저으려 해도 배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밑창에 큰 구멍이 뚫리자 마찰력이 강해져서 배가 물살과 미끄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노는 틀렸다.’

서백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때 무너진 보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다.’

서백은 배 밑창에 놓인 닻을 잡은 뒤 보의 잔해를 향해 던졌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만든 묵직한 닻이 돌팔매질한 것처럼 날아갔다.

콰창. 닻이 보에 명중하면서 쐐기처럼 생긴 날개가 잔해에 걸렸다.

이윽고 닻에 연결된 사슬이 팽팽해졌다.

“모두 이쪽으로!”

서백이 몸을 날리자 이어서 유소운도 뒤를 따랐다.

곡예 하는 것처럼 사슬을 밟고 선 두 인영!

그러나 배에 남은 두 명은 경공이 그에 못 미쳤다.

쿠웅. 배가 재차 암초와 충돌하자 사공이 균형을 잃고 물속에 빠졌다.

“으아아악!”

평생을 장강에서 배를 몰며 먹고산 사공.

그러나 거센 소용돌이의 물살에서는 물고기 뺨치는 헤엄 솜씨도 소용없었다.

물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허우적거리던 사공은 어느새 밑으로 가라앉아서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왕이삼은 배가 요동치는 순간 몸을 날려서 두 손으로 사슬을 잡았다.

그런데 그가 잡은 부분이 하필 배가 선착장에 머물 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곳이었다.

오랜 시간 물속에 있어서 미끄러운 이끼가 자란 사슬. 그 바람에 왕이삼은 사슬을 놓치고 말았다.

“어어어……!”

풍덩.

왕이삼은 두 팔을 허우적대다가 물속에 빠졌다.

그걸 본 유소운이 혁낭을 뒤집은 뒤 밧줄을 꺼내 던졌다.

“저 양반은 떨어지는 게 전문이군.”

잔도 절벽에서 떨어질 때는 빗나갔지만, 왕이삼은 이번에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면서도 정확히 밧줄을 붙잡았다.

밧줄에 왕이삼의 무게가 실리자 더는 사슬 위에 서 있을 수 없게 된 유소운은 몸을 뒤집어서 두 발을 사슬에 감은 뒤 밧줄을 끌어당겼다.

물살은 세찼지만 왕이삼은 조금씩 끌려왔고 마침내 두 손으로 사슬을 잡았다.

“고, 고맙다.”

“은원보 여덟 개가 물속에 가라앉을까 봐 구한 거요.”

“쳇, 그냥 물귀신이 될 걸 그랬군.”

방금 목숨을 잃을 뻔한 왕이삼은 유소운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만큼 서백과 유소운의 존재가 든든했던 것이다.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서백의 냉정한 목소리가 둘을 정신 차리게 했다.

닻이 걸려 있는 보의 잔해가 급속히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배가 물에 잠기면서 사슬과 닻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서백 일행 세 명의 무게마저 사슬이 지탱하고 있었으니…….

콰창.

결국 보의 잔해가 박살나면서 닻이 허공에 떴다.

팽팽하던 사슬이 축 늘어지자 셋은 물속으로 떨어졌다.

“꽉 잡으십시오!”

풍덩.

물에 빠졌지만 셋은 사슬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

서백은 냉정하게 상황을 계산했다.

‘석가심결로 숨을 참고 유속이 낮은 물밑으로 잠수하면 뭍까지 나갈 수 있다.’

유소운도 지금까지 봐온 무공 수위로 볼 때 살아남는 데 지장은 없으리라.

‘문제는 왕 선배다.’

왕이삼은 썩 괜찮은 도검수지만 외공 말고 내공과 경공은 무림의 이류 수준 정도. 서백의 도움이 없으면 그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왕이삼과 알게 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왕이삼은 서백이 석가장을 떠나서 처음 알게 된 인물이었다.

‘왕 선배를 포기할 순 없다.’

그러나 그를 데리고 물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바로 그때, 짙은 물안개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

서백은 계산을 멈추고 물속으로 발을 뻗어 사슬을 밟았다. 이어서 사슬을 차면서 물 위로 몸을 날렸다.

휙.

본능적으로 행한 서백의 도박.

도박은 성공했다. 물안개가 걷히면서 나타난 것은 큼지막한 돛단배였다. 아미파의 배와 비교하면 집과 장원 정도의 크기.

서백은 등에 멘 검을 잡고 배의 옆면에 박았다.

콰직. 세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배의 손상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밧줄!”

서백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유소운이 밧줄을 던졌다.

탁. 휘리릭.

서백은 배에 박힌 검에 몸을 의지한 채 밧줄을 손목에 칭칭 감았다. 그리고 유소운과 왕이삼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서백 일행은 배에 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배 위로 올라갔다.

“구해 줘서 감사합니다.”

서백 일행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배에는 중년인부터 젊은이까지 나이가 제각각 다른 사내들이 서른 명 남짓 타고 있었다. 얼굴과 몸이 구릿빛으로 탄 사내들. 나이는 달라도 뱃일을 하며 평생을 보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내들의 우두머리가 뜻밖에도 이십대 초반의 젊은 여인이었다.

여인 역시 입매와 눈빛이 날카로운 것으로 보아 사내들처럼 뱃사람 같아 보였다.

“당신들은 누구요?”

“중원으로 나가려고 아미파의 배를 타고 장강삼협을 지나던 중입니다. 그런데 소용돌이를 만나 배가 난파되었습니다.”

“작은 배로는 지금 장강삼협을 통과할 수 없소. 망자가 창궐해서 보가 무너졌고 온전한 선착장도 남아난 게 없소.”

“그렇군요.”

그런데 여인의 눈빛이 이상했다. 서백, 왕이삼, 유소운을 번갈아서 유심히 살피는 눈치였다.

서백은 여인의 눈빛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아차렸다.

‘내 검과 왕 선배의 박도를 보고 있군.’

서백의 검이 보기 드문 대검이기는 했다. 하지만 무림인이 검을 지니는 것은 당연한 일. 일부러 살펴볼 이유는 딱히 없지 않은가?

이윽고 여인은 시선을 돌리더니 옆에 있는 중년인에게 명령했다.

“이들에게 물과 음식을 주고 옷을 말리게 해 줘라.”

“예, 채주님.”

여인은 명령을 한 뒤 몸을 돌려서 가버렸다.

“따라오시오.”

중년인이 서백 일행을 갑판 아래에 있는 선실로 안내했다.

선실은 비좁고 공기가 습했다. 침상은 몸을 쭉 펴면 발이 벽에 닿을 정도였다. 좋게 말해도 고급이라곤 할 수 없는 선실.

하지만 물에 빠져서 죽다 살아난 서백 일행에게는 최고급 객잔처럼 느껴졌다.

셋은 젖은 옷을 벗고 침상에 누워 몸을 말렸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마침 배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헹,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냐.”

“네. 이번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죽을 뻔하셨습니다.”

“은원보 여덟 개가 내 수중에 있으니 내가 죽도록 놔둘 리가 없지. 안 그렇냐?”

왕이삼이 허세를 부리자 유소운이 맞받아쳤다.

“그 은원보 내놓지? 다음에는 죽든 말든 그냥 놔두게.”

“그렇게는 안 되지. 은원보가 갖고 싶으면 날 구하라고!”

그때 왕이삼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아까 그 여인 말이다. 채주라고 부르던 걸 보면 수로채 두목인 것 같은데. 젊은 여인의 몸으로 수로채 두목이라니 대단한데?”

“아미파 정수사태도 여인이십니다.”

서백이 어이가 없어서 말했지만 왕이삼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미파야 원래 비구니들 문파니까 그런 거지. 수로채는 거친 뱃일을 하는 놈들 방파다. 그런데 달랑 하나 있는 여자가 채주라고?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야…….”

“별 게 다 이상하군.”

유소운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때 선실 문이 열리더니 아까 일행을 안내했던 중년인이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채주님께서 세 분을 뵙자고 하시오.”

일행은 서로를 쳐다봤다. 방금 왕이삼이 여인 얘기를 한 참인데 바로 여인이 일행을 부른다고 하니 기묘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행은 사내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옷을 챙겨 입었다.

서백이 다 마른 상의를 걸치는데 왕이삼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야심한 밤에 젊은 여인이 따로 부른다고? 우리 후배가 드디어 진짜 남자가 되겠구나!”

“농담은 그만두시죠.”

“검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부끄럼도 잘 타는군, 흐흐흐.”

서백은 한숨을 쉬며 왕이삼의 말을 반박했다.

“야심한 밤에 여인이 남자를 불렀다고 칩시다. 그럼 저 혼자만 부를 일이지, 미쳤다고 우리 셋을 함께 부릅니까?”

“그, 그런가……. 아냐, 누가 알아? 어쩌면 그 여자 취향이 독특할지…….”

서백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선실을 나갔다. 유소운도 왕이삼을 무시하고 뒤따랐다.

“야, 너희들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그런 거야?”

사내가 서백 일행을 안내한 곳은 배 선미에 있는 채주실이었다.

“채주님, 세 분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문이 열리자 셋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채주실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실실 웃던 왕이삼마저 침을 꿀꺽 삼키며 웃음을 지웠다.

탁자 너머에 앉아 있는 여인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웠던 것이다.

“나는 장강삼협수로채의 채주 양소소요.”

자신을 채주 양소소라고 밝힌 여인이 말했다.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면 목숨값을 받소. 오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당신들이 목숨값을 치를 차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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