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장강삼협수로채(1)
모든 일을 끝낸 서백은 머릿속에 지도를 떠올렸다.
‘암자로 가려면 이쪽이 빠르겠군.’
서백은 왔던 길 말고 숲속으로 몸을 돌렸다.
숲을 대각선으로 통과해서 빠져나가면 지도에 표시된 암자로 곧장 향하게 된다.
시간을 아끼는 지름길인 셈.
그런데 막 발을 떼던 서백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잠깐. 이대로 그냥 가면 안 된다.’
이 근방의 숲은 사천당문 당홍이 뿌린 무색무취의 독이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곧 있으면 촉도관을 떠난 아미파 정수사태의 행렬이 숲길을 지나가리라.
‘이대로라면 무색무취의 독에 사람들이 중독된다.’
내공이 깊은 정수사태는 체내의 독을 감지하는 순간 바로 몸을 피해서 치명상은 입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리였다.
아미파 제자들은 젊은 비구니들이 대다수였고, 무림인이 아닌 병사들은 내공심법을 익힌 적이 없는 평범한 일반인이니까.
‘어떡하지?’
서백은 잠시 멈춰선 채 고민했다.
‘길을 되돌아가서 정수사태한테 얘기할까?’
그러자니 시간이 너무 소모되는 게 싫었다.
그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서백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것들을 쓰면 되겠군.’
그것은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사천당문 당홍의 사체였다.
* * *
그로부터 대략 반 시진 후.
아미파 정수사태가 행렬을 이끌고 숲길에 나타났다.
수백이 넘는 아미파 제자들과 병사들이 지친 기색으로 정수사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천의 유일한 보루였던 촉도관이 망자 떼에게 무너졌다.
정수사태로서는 뼈아픈 실패.
그러나 정수사태는 포기하지 않고 결심했다.
‘아미산에 있는 본진과 합류해서 전열을 가다듬는다. 그런 다음 흩어진 망자 떼를 하나씩 척결하자.’
그때 정수사태는 숲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외쳤다.
“정지하라!”
그녀의 명령에 수백 명이 일제히 발을 멈췄다.
‘저게 뭐지?’
뒤에서 따라오던 제자 하나가 물었다.
“장문인님, 무슨 일인지요?”
“모두 여기 있어라. 내가 살펴보마.”
정수사태는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이건…….’
숲길에 놓인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 그녀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흑의를 걸친 무림인의 토막난 사체들이었다!
그런데 사체 토막들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 매우 괴이했다.
토막난 부분들이 아무렇게 바닥을 뒹구는 게 아니라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일부러 이렇게 해놓은 건가?’
정수사태는 사체 토막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살필 필요도 없었다. 토막들은 한눈에 알아보기 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팔 두 개와 몸통과 하체가 옆으로 둥근 곡선을 그리며 일렬로 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줄은 비스듬히 왼쪽을 향하고 있었다.
무공 수위만큼 머리도 비상한 정수사태는 금방 뜻을 알아차렸다.
‘길을 돌아가라는 소리?’
정수사태는 조심해서 사체 토막들을 지나쳤다. 순간 무림 고수의 본능이 발을 붙들었다.
‘독이군.’
육안으로 봐서는 지금까지 걸어온 숲길과 아무 차이가 없었다. 조심해서 숨을 들이마셔 봤지만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피부에 닿는 공기의 무게가 달랐다. 무언가가 공기 중에 가득 흩뿌려져 있는 듯한 느낌…….
‘무색무취의 독.’
정수사태는 숨을 참은 채 뒷걸음질 쳐서 사체 토막들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독의 기운이 희미해졌다.
토막들 뒤에 떨어져 있으면 안전하다는 의미.
이제 괴이하게 놓인 사체 토막들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가면 독이 있다고 말해 주는 경고!
정수사태는 제법 나이가 있는 제자 하나를 불러서 물었다.
“이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느냐?”
그녀는 제자에게 사체 토막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여 주며 물었다.
“이쪽은 숲이 끝나고 벼랑이 나옵니다. 그런데 벼랑에 오래된 잔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잔도라…….”
그때 사체 토막 중 잘린 팔의 손바닥에서 무언가가 반짝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닌가?
‘뭐지?’
고개를 내려서 살피던 정수사태는 깜짝 놀랐다.
사체 손바닥에 놓인 것은 바로 촉도관의 옥건이 아닌가?
정수사태는 옥건을 집어들었다. 그러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한번 놀랐는데, 사체 토막의 단면이 자를 대고 종이를 자른 것처럼 반듯하게 절단되어 있어서였다.
아미파 검법에 있어 경지를 이룬 정수사태 본인도 이처럼 검을 쓰는 것은 힘들었다.
무공 수위를 가늠하기 힘든 엄청난 고수!
정수사태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고수가 독을 경계해서 다른 길로 가라고 충고하고 있다. 지금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기 소신이 있는 게 아니라 멍청한 것일 뿐.
정수사태가 제자에게 말했다.
“나와 나란히 가면서 잔도로 길을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길을 돌아서 잔도로 가겠다. 모두 길을 잃지 않게 앞 사람을 잘 보고 따라와라.”
정수사태는 내공을 돋워서 수백 명의 행렬에게 외친 뒤 앞장을 섰다. 이제 행렬은 둥글게 호선을 그리며 잔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정수사태는 촉도관의 옥건을 품에 넣으며 생각했다.
‘실로 천운이다. 이름 없는 고수가 아미파를 돕는구나.’
그런데 그 고수가 누구일지 짐작이 안 됐다.
‘청성파 무허자? 그는 촉도관이 함락될 때 죽지 않았나? 게다가 그의 무공은 나보다 못하다.’
정수사태는 숨은 고수가 누구일지 생각했다.
마차를 끌고 온 무림인 중에 고수로 보이는 흑의인이 있었지만, 그자 역시 정수사태 본인을 뛰어넘는 고수는 아니었다.
‘혹시…….’
문득 떠오른 생각.
성벽 위를 바람처럼 달리며 망자 떼를 추풍낙엽처럼 베어넘기던 그 소년이?
자기 몸집만큼 큰 대검을 전광석화처럼 휘둘러서 아미파 제자 하나가 무심코 ‘검귀’라고 불렀던 소년.
약관도 안 된 소년이 검법과 경공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무공 수위가 이 정도일 줄이야.
‘아미파를 도운 자가 정말 그 소년이라면…….’
중원 무림의 판도를 바꿀 엄청난 신진 고수가 강호에 출행한 것이 틀림없었다.
* * *
왕이삼과 유소운은 숲길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서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안 오지?”
“조금 있으면 대략 한 시진이 지나겠군.”
유소운이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 떼를 보며 말했다.
“서백이 한 시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먼저 가라고 하지 않았소?”
“그러긴 했지.”
“어떡할 거요? 계속 기다릴 생각이오?”
유소운의 말에 왕이삼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럼 기다려야지! 설마 그냥 가자는 소리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요. 어차피 은원보 여덟 개는 당신이 갖고 있지 않소? 그냥 가도 손해 볼 건 없는 셈이지.”
“그렇긴 하지만…….”
당황하던 왕이삼은 재차 버럭 소리쳤다.
“나는 셈이 정확한 사람이다. 은원보 여덟 개를 나눠서 서백한테 백삼십삼 냥을 줘야 되니까 기다리겠다. 정 가겠다면 너 혼자 가라!”
“나도 백삼십삼 냥을 거슬러 받아야 되니 혼자서 갈 수는 없지.”
유소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어차피 한 시진이 지나도 기다릴 수밖에 없소.”
“왜냐?”
“배 열쇠를 서백이 갖고 있지 않소?”
“아…….”
왕이삼은 그제야 유소운이 일부러 자기를 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왕이삼이 재차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숲길이 아닌 전혀 엉뚱한 수풀에서 서백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너, 왜 거기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늦어서 지름길로 돌아왔습니다.”
서백은 가파른 숲길을 뛰어올라왔지만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말했다.
왕이삼이 멍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서백이 물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그게 아니라… 왜 이제야 오는 거냐?”
“일을 몇 가지 마무리하느라 늦었습니다.”
“이렇게 늦을 거면 아예 오질 말지 그랬냐!”
그는 버럭 소리친 뒤 횅하니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계속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가 버릴걸. 공짜 은자 좀 챙기는가 했더니 다 망쳤군.”
서백은 슬쩍 유소운에게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나도 모르겠다. 구름을 보니 비가 올 것 같군. 날씨가 안 좋으면 기분이 가라앉는 사람이 종종 있지.”
“그렇군요.”
“뭣들 하고 있냐?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얼른 가자!”
“네, 네.”
서백과 유소운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은 뒤 왕이삼의 뒤를 따라갔다.
암자를 떠난 서백 일행은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았다.
아미파의 배가 있는 선착장은 지도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실제 길은 지도와 달랐다.
하늘을 찌르는 산봉우리와 천 길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늘어선 사천의 지형!
그 때문에 일직선으로 가지 못하고 한참을 빙 돌아가야 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일행은 두 밤을 산에서 노숙했다.
험한 지역이라 중원에서 넘어온 망자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
그렇게 삼 일을 헤맨 뒤에야 일행은 선착장을 발견했다.
왕이삼이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휘유, 무릉도원이 따로 없군.”
높은 산봉우리가 겹겹이 쌓인 틈새로 한 줄기 강이 흐르고 있는 계곡. 우화등선을 꿈꾸는 신선이 도를 닦고 있을 듯한 풍경에 일행은 가슴이 확 트였다.
일행은 암벽을 내려가서 선착장으로 갔다.
말이 선착장이지 작은 나루터였다. 그곳에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배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오래되어 보였다.
하지만 유소운이 배를 살피며 하는 말을 듣자 안심이 되었다.
“만든 지 오래됐지만 아직 물 위에 뜨는 건 끄떡없겠군. 솜씨 있는 장인이 제대로 만든 배다.”
배는 돛대가 쭉 뻗어 있으며 나무짝의 이음새가 튼튼했다.
평생을 산중턱에 위치한 석가장에서 지낸 서백은 배를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 서백이 보기에도 튼튼한 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룻터 옆에는 작은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곧이어 오두막에서 봉두난발을 한 노인이 나왔다.
서백이 노인에게 열쇠를 건넸다.
“아미파 정수사태께 배를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미파의 열쇠가 맞군.”
노인은 아미파가 고용한 사공이었다. 급한 일이 있을 때 언제든지 배를 타고 중원으로 나갈 수 있도록 오두막에서 배를 관리하며 숙식하는 자였다.
“어디까지 갈 거요.”
“가능하면 중원에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배를 타고 장강삼협을 내려간 적이 있소?”
“없습니다.”
“장강삼협은 물길이 세고 곳곳에 암초가 있어서 위험하오.”
“상관없으니 가 주십시오.”
서백 일행은 사공을 따라 배에 올랐다.
닻줄이 묶인 곳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사공이 열쇠를 끼우고 자물쇠를 푼 다음 닻줄이 연결된 사슬을 끌어올렸다.
이윽고 쇠로 된 묵직한 닻이 물속에서 올라왔다.
강 밑바닥에 고정되었던 닻이 사라지자 배가 물살을 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배를 탄 지 만 하루가 지났다.
서백 일행은 오래간만에 푹 잠을 잤다.
급물살 때문에 배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돌부리가 있는 땅 말고 평평한 바닥에서 자는 것만 해도 고마울 판.
일행은 해가 중천이 떠서야 일어났다. 사공이 낚시로 물고기 몇 마리를 낚아 올리자 일행은 불을 피운 뒤 물고기를 구워서 아침으로 먹었다.
“이대로라면 일 년 내내 배를 타도 좋겠군.”
“그럴 수는 없죠. 한시라도 빨리 중원으로 가야 됩니다.”
“어허, 나이도 젊은데 뭐 그리 바쁘냐?”
왕이삼이 이를 쑤시며 농담을 할 때였다.
쿵. 갑자기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뭐야?”
서백 일행은 뱃전으로 고개를 내밀고 물살을 살폈다.
선미에 있는 사공이 걱정 말라며 말했다.
“장강삼협의 첫번째 협곡인 구당협이 가까워져서 물살이 빨라졌소. 하지만 걱정 마시오. 이 근처는 보가 있어서 물살을 잡고 있으니까.”
“확실합니까?”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요? 육십 평생을 장강삼협을 오르락내리락했는데…….”
그때 사공이 어딘가를 돌아보다가 침을 삼키며 말을 멈췄다.
일행은 사공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물살을 막기 위해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보가 흔적만 남은 채 박살나 있지 않은가?
갑자기 세찬 소리가 들리며 물살이 급해졌다.
쿠르르르.
사공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외쳤다.
“소용돌이다!”
강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고 있었다.
서백 일행이 탄 배가 급격하게 속도를 높이며 소용돌이를 향해 빨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