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질풍무사-20화 (20/123)

20화 촉도관의 풍파(6)

흑의인이 멍하니 서백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내 목을 베겠다고? 지금 여기서?”

“네.”

“하하… 하하하하하!”

흑의인이 천막이 떠나가라 광소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무림의 피라미가 섣부른 공명심을 내세우는구나. 나이도 어린 게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다니.”

흑의인은 호기롭게 서백을 비웃었지만 본전도 찾지 못했다.

“도둑놈이 할 말은 아니군요.”

“도둑놈?”

흑의인의 망사모 속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옥건은 망자 떼로부터 촉도관을 지키던 아미파의 것입니다. 아미파의 물건을 몰래 훔치고 있으니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네놈…….”

흑의인은 서백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처럼 위아래를 스윽 훑어 봤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약관을 못 넘은 소년. 그런데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 것이지?

“네놈은 누구냐? 어느 문파 소속이지?”

“석가장 출신입니다.”

“석가장?”

흑의인은 머리를 굴렸지만 유명세가 중에서 석가장이란 이름은 들어 본 적 없었다.

“이름도 못 들어 봤으니 분명 무명소졸 같은 하찮은 곳이겠군.”

“석가장은 촉도관 옥건 도둑질처럼 큰일을 벌인 적이 없으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당연하죠.”

“그리 자신만만한 걸 보니 실력이 대단한가 보군?”

“도둑놈을 징벌할 정도는 됩니다.”

“좋다. 말싸움은 여기까지 하자.”

흑의인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더 이상 방해하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할 테니 서로 갈 길을 가는 게 어떠냐?”

“여전히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서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살려 둘 생각은 없었지 않습니까? 도둑질하는 걸 들켰으니 살인멸구를 할 수밖에요.”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군. 어린놈이라 좀 더 살려두고 싶었건만…….”

순간 흑의인이 몸을 낮추며 두 팔을 앞으로 휘둘렀다. 그의 소매에서 두 개의 비검이 튀어나와 서백을 향해 날아갔다.

쉬쉭.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할 수 없지!”

까깡.

서백이 검을 들어서 비검을 가볍게 튕겨냈다.

“충고 하나 하죠.”

“뭐냐?”

“상대를 속이고 싶다면 말이 아니라 눈빛으로 하십시오. 눈빛은 살기를 뿜어내면서 세 치 혀만 놀리면 누가 속아 준답니까?”

“후후후, 들켰군. 하지만 네놈도 놓친 것이 있다.”

“뭐죠?”

“이번 것은 허초다. 눈빛이 아니라 초식을 봤어야지.”

흑의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양손을 기이하게 비틀었다.

그러자 두 개의 비검이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서백의 뒤통수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쉬이이익.

검잡이에 가는 줄을 달아 손목으로 조종하는 비검술!

흑의인의 비검술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양팔을 앞으로 뻗자 소매에서 재차 두 개의 비검이 쏘아져서 각각 서백의 인중과 명치를 노렸다.

앞뒤에서 두 개씩 급소로 날아드는 비검.

그중 하나만 적중해도 살아남기 힘든 암습!

“죽어라, 크하하하!”

순간 서백의 두 눈이 번쩍 안광을 발했다.

휘이이잉.

갑자기 천막 안에 엄청난 질풍이 불어닥쳐서 흑의인의 옷자락과 머리칼을 날렸다.

“뭐야?”

흑의인이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네 줄기의 섬광이 연속으로 그의 눈앞에 번쩍였다.

파파파팟.

흑의인은 자신의 목과 양팔 그리고 몸통에 뜨끔하면서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

스르르 암흑이 찾아왔다.

흑의인의 기억은 거기에서 끝났다.

* * *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한 숲속. 그곳에서 한 명의 흑의인이 동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숲길에서 동료의 모습이 나타났다.

“늦었구나.”

그런데 다시 보자 숲길에서 나타난 자는 동료가 아니었다.

“누구냐?”

말없이 눈앞에 도착한 상대가 흑의인의 발밑에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털퍽.

시선을 내리던 흑의인은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은 흑의인의 동료, 아니, 그의 조카인 당조정의 잘린 목이었다.

[조카분이 늦었군요. 보시다시피 꼴이 그래서 말입니다.]

상대는 전음(傳音)으로 대답했다.

은밀하게 목소리를 전달하는 음공의 일종.

[목만 들고 온 건 눈감아 주시죠. 몸까지 들고 뛰기는 아무래도 무리더군요.]

“너는 누구지?”

[석가장 출신의 서백입니다.]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무명소졸 같은 세가로군.]

서백이 계속 전음으로 말하자 흑의인도 무심코 따라서 전음을 쓰기 시작했다.

[조카분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사천당문 같은 중원 무림의 유명세가에 감히 비할 곳은 못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구나.]

[아쉽게도 존성대명은 모릅니다.]

그러자 흑의인이 망사모를 벗어서 집어던졌다.

사십대 중반 여인의 얼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녀는 조카 당조정과 함께 사천당문의 비무장을 지켜보던 여인 당홍이었다.

당홍의 눈썹은 잔뜩 일그러졌고 눈빛은 서백을 씹어 먹을 것처럼 살기를 뿜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던 조카가 목이 잘린 채 돌아왔으니…….

[나는 사천당문의 당홍이다.]

[처음 뵙겠다는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비무장에서 안면이 있으니까요.]

[이미 눈치채고 있었군. 그럼 검법을 숨긴 것도…….]

[훔쳐보는 도둑놈들에게 비전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

당홍의 얼굴은 점점 표독스럽게 바뀌었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해졌다.

[내 조카를 죽인 이유가 무엇이냐? 아니, 감히 사천당문의 일에 끼어든 이유가 무엇이지?]

[조카분이 이걸 훔치시길래 목을 베었습니다.]

서백이 품에서 촉도관의 옥건을 꺼냈다.

[촉도관의 옥건이군. 아미파가 보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홍이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시치미를 떼시는군요.]

[무슨 시치미?]

[당신은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촉도관이 망자 떼에게 함락되면 추후 무림맹이 책임을 묻게 되겠죠.]

당홍을 추궁하는 서백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바뀌었다.

[사천의 명문정파는 세 곳. 아미파, 청성파, 사천당문. 당신은 훔친 옥건을 무림맹에게 내밀면서 사천당문은 촉도관이 무너질 때 끝까지 싸웠다고 변명할 속셈이었을 겁니다. 촉도관 함락의 책임은 아미파에게 떠넘기고 말입니다.]

[눈치가 빠른 놈이군.]

[아미파와 사천당문이 개와 고양이 사이라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는 사실 아닙니까?]

[…….]

[하지만 당신은 더 큰 죄를 범했습니다. 당신은 조카분과 짜고 벽력당의 폭약으로 촉도관을 무너뜨렸습니다.]

[내가? 어떻게?]

[마차를 끌고 가장 먼저 촉도관에 도착한 흑의인 두 명은 당신과 조카였습니다.]

그 말에 당홍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솟았다.

[제 추리는 이렇습니다.]

서백이 무표정한 눈빛으로 추리를 설명했다.

당홍과 당조정은 사천당문의 인물임을 숨긴 채 촉도관에 입성했다. 흑의를 걸친 것과 얼굴을 가리는 망사모를 쓴 것은 그 때문.

정수사태가 작전을 실행하기 전, 둘은 몰래 잠입해서 도화선을 자르고 중간에 불을 붙였다.

작전이 실행되자 당홍과 당조정은 지하통로에서 다른 무림인들을 죽였다.

서백 일행은 맨 처음 출발했기 때문에 당홍과 당조정은 그 뒤의 무림인들만 죽이고 마차를 강탈했다.

무허자와 청성파 인물들을 죽인 것도 물론 그들이었다.

그런 다음 지하통로가 폭발하도록 갈림길에 마차를 흩어 놓은 뒤 빠져나왔던 것이다.

서백의 추리를 모두 들은 당홍이 반문했다.

[그럴싸한 얘기로군. 한데 증거가 있느냐?]

당홍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었지만 서백의 대답에 바로 미소가 지워졌다.

[있습니다.]

[거짓말! 사천당문이 그랬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

[당신은 시험에 뽑힌 무림인으로 변장해서 사천당문을 떠났습니다. 스무 명의 무림인 중 마침 흑의를 걸친 자를 골라서 죽이고 자신과 바꿔치기한 겁니다.]

[…….]

[이후 조카분은 말을 달려서 길을 앞지른 뒤 당신과 합류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

[무엇이냐?]

[조카분이 합류하면서 바꿔치기한 무림인의 시체를 숲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시체가 증거입니다.]

당홍이 이를 부드득 갈더니 말했다.

[숲속에 잘 숨겨 놓은 줄 알았더니.]

[망자만 피 냄새를 맡는 게 아니죠.]

폭약을 터뜨려서 촉도관을 무너뜨리고 아미파를 몰살시키려던 흉계.

사천당문 당홍의 교활한 술책이 서백의 명쾌한 추리에 낱낱이 밝혀진 것이었다.

[좋다. 그럼 뭐 하나만 묻자.]

[말씀하시죠.]

[굳이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

[죽어 마땅한 자를 죽이러 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 말에 당홍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럼 당문인이 당문을 위해 행동하는데 뭐가 잘못됐다는 말이냐?]

[중원에 사천당문만 살아남고 모두 망자가 되면 노예로 부릴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겁니까?]

[당문이 지존의 자리에 오른다면야 세상이 망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잘 알겠습니다.]

스윽. 서백이 등에 멘 검을 손에 쥐었다.

[전 세상이 망하는 걸 두고 보지 않겠습니다. 해서 당신의 목을 베겠습니다.]

당홍이 재차 광소를 터뜨렸다.

[대단한 협객이 납시었군, 아하하하하!]

[뭐가 그리 웃기죠?]

[추리를 한답시고 주절주절 떠들어서 고맙구나. 내가 지금까지 네 얘기를 들은 이유는…….]

그때 서백의 말 한 마디에 당홍의 웃음이 쑥 들어갔다.

[독 말입니까? 무색무취의 독에 제가 중독되길 기다리고 계셨겠죠.]

[…….]

[촉도관에서는 푸른색 독을 쓰고, 추격하는 자가 있을 경우 무색무취의 독을 써서 이중으로 상대를 속이자. 혹시 조카분과 이렇게 입을 맞추신 건 아닌지요?]

[……!]

[표정을 보아하니, 맞군요.]

[네놈… 중독된 게 아니냐?]

이번에는 서백이 차갑게 냉소했다.

[사천당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멍청합니까?]

[뭐라고?]

[지금까지 줄곧 전음으로 얘기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줄곧 위풍당당하던 당홍의 얼굴이 그 말을 듣고 하얗게 질렸다.

서백은 당홍을 발견한 순간부터 석가심결을 시전해서 입을 다문 채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래서 전음으로 대화했던 것.

그 사실을 당홍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네놈… 죽어라!”

당홍이 두 팔을 활처럼 뒤로 젖힌 뒤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양쪽 소매에서 열두 개의 비검이 튀어나와 서백에게 날아갔다.

쉬이이이익.

당조정의 비검은 양쪽 손목에만 줄을 매지만, 당홍은 손목은 물론 손가락 열 개까지, 도합 열두 개의 비검을 조종할 수 있었다.

사천당문의 비전 암기술인 만천화우를 응용해서 당홍이 직접 개발한 독문무공.

지상만뢰(地上滿雷).

촤라라라락.

열두 개의 비검이 뱀처럼 꿈틀대며 서백의 전후좌우상하를 파고들었다.

순간, 당홍의 눈앞에서 서백의 신형이 사라졌다.

휙.

“뭐…….”

당홍이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사라진 서백이 그녀의 코앞에 나타났다.

서백이 연속으로 두 번 몸을 회전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회전 중간에 다른 손으로 검을 바꿔 잡으면서 반박자 빠르게 총 네 번 검을 베었다.

휘이이잉.

질풍이 당홍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찰나.

파파파팟.

그녀의 몸에 네 줄의 검광이 박혔다.

석가검법 제일로(第一路) 상전명월광(床前明月光).

털퍽. 처음에는 당홍의 양팔이 땅에 떨어졌다.

“네놈… 그 검법은…….”

[조카분의 목을 베었던 석가검법의 초식을 한 번 더 썼습니다.]

피슉. 다음으로 당홍의 목에 붉은 금이 그어지며 핏물이 새어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당문에 무슨 원한이라도…….”

[죽어 마땅한 자를 징벌한 것뿐입니다.]

철퍼덕. 마지막으로 당홍의 상체가 비스듬히 미끄러지며 기울더니 하체와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그 바람에 간신히 붙어 있던 목도 떨어져서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당홍의 잘린 목이 아직 숨이 붙은 채 서백을 노려보며 말했다.

“쿨럭… 사천당문이 이 원한을 반드시 복수…….”

그 말에 서백이 피식 냉소했다.

[누가 봤다고 복수를 합니까?]

콱. 서백이 당홍의 입에 수직으로 검을 박았다.

“끄어어억…….”

[악인답지 않으니 엄살은 그만두시죠.]

당홍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졌다.

서백은 다섯 토막으로 분리된 시체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피가 숲에 흩뿌려졌으니 혹시 어딘가 있을 망자의 몸에 튀었을지 모른다.

만약 망자가 살아나서 당홍을 물어뜯을 경우, 신체가 다섯 토막으로 나뉘어졌는데도 망자가 되는 걸까?

한참을 고민하던 서백은 아무도 듣지 않는 전음을 중얼거렸다.

[그냥 때려죽일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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