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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9화 (19/123)

19화 촉도관의 풍파(5)

중원 무림에서 아미파를 이끌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문인 정수사태.

그런 그녀마저 서백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놀랐다.

“작전이 실패한 것이오?”

“네. 지하통로에서 폭약이 폭발했습니다.”

“그렇군…….”

잠시 침묵하던 정수사태는 한 문파의 장문인답게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모두 성벽에서 물러서라!”

정수사태가 망자 떼를 막기 위해 성벽에서 대기하는 아미파 제자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네 대의 마차에 각각 궤짝 여덟 개씩이 실려 있었으니 폭약은 총 서른두 궤짝의 분량.

그 엄청난 양의 폭약이 폭발하자 촉도관 밑의 지하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쿠구구구구.

성채 전역이 대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무공 수위가 낮은 병사들은 병장기를 놓치고 땅에 뒹굴었고, 간신히 서 있던 아미파 제자들마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서백은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박았다.

주위 사람들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쓰러질 때 오직 서백만이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갑자기 마당 한 쪽이 꺼지면서 깊은 구덩이가 푹 파였다.

“으아아악!”

바로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한 번 구덩이가 파이자 성채가 연쇄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구덩이가 파이며 바닥이 꺼졌고, 지탱할 힘을 잃은 성벽은 벽돌이 떨어지며 무너졌다.

우르르르. 쿠쿠쿠쿵.

뿌리 깊은 나무는 폭풍우에도 끄덕하지 않지만, 뿌리가 힘을 잃으면 통째로 뽑히고 만다.

지금 촉도관이 그랬다.

지하에서 거대한 폭발이 터지자 땅이 꺼지며 성채와 성벽 모든 것이 차례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서백은 싸늘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이제 촉도관을 구할 방법은 없다.’

그때 성벽에 있던 아미파 제자 두 명이 균형을 잃고 벌판 쪽으로 떨어졌다.

“아아아악!”

정수사태가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휙. 타타타탓.

정수사태는 수직으로 선 성벽을 평지처럼 달렸다.

그녀가 제자 한 명의 허리를 잡았을 때, 성벽 위에서 서백이 외쳤다.

“이쪽입니다!”

정수사태가 내공을 돋우며 제자를 집어던졌다.

방년의 젊은 여제자라고 해도 사람 몸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정수사태가 팔을 휘두르자 제자의 몸이 깃털처럼 붕 떠서 서백에게 날아갔다.

서백이 제자의 손을 낚아챈 뒤 성벽에 내려놨다.

정수사태는 이미 다른 제자에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제자는 운이 나빴다. 떨어진 장소가 하필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망자 떼가 몰려 있는 곳이었다.

망자들이 사방팔방에서 손을 뻗어 제자를 붙잡았다.

“장문인님!”

정수사태가 장삼을 펄럭이며 날아와 제자의 손을 잡았다. 그런 다음 제자를 붙들고 무너지는 성벽을 거꾸로 달려서 성채 위에 착지했다.

“괜찮느냐?”

“장문인님…….”

아미파 제자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말을 못 이었다.

“……!”

그녀를 본 정수사태의 표정이 바뀌었다.

제자의 목이 망자에게 물어뜯겨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목뿐만 아니라 팔에도 망자들의 잇자국이 수없이 박혀 있었다.

정수사태는 처연한 눈빛으로 잠시 제자를 바라보다가 검을 뽑아서 일검에 목을 베었다.

촤아악.

아미파 제자의 잘린 목과 몸통이 성벽 아래로 떨어지자 망자들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괴성을 토했다.

키에에에엑.

성벽에서 핏물을 찾아 배회하던 망자들이 일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성벽이 무너지면서 떨어진 돌무더기에 깔린 망자들은 근골이 부서졌지만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미 죽은 시체가 고통을 느낄 리 없으니까.

어느새 무너진 성벽은 망자들이 파리 떼처럼 새까맣게 들러붙었다.

그야말로 시체탑!

폭발로 약해진 성벽은 수만 구의 망자 떼가 몰려들자 모래성처럼 차례로 무너졌다.

쿠쿠쿠쿠쿵.

망자들이 성벽을 기어올라 안으로 들어왔다.

“으아아악!”

망자들에게 공격받은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정수사태가 명령했다.

“불화살을 쏴라!”

병사들이 펄펄 끓는 기름이 담긴 솥을 성벽 너머 기울여서 기름을 쏟았다. 이어서 궁수들이 기름 먹인 천을 묶은 화살에 불을 붙인 뒤 발사했다.

솨아아아아.

수백 발의 불화살이 어두운 밤하늘에 길게 붉은 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이윽고 성벽 밑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퍼퍼퍼펑. 꾸웨에엑.

기름을 뒤집어쓴 망자들이 불화살에 맞아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정수사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무너진 성벽으로 망자 떼가 들어오는 바람에 기름 솥의 절반 이상이 반대로 뒤집어진 것이다.

그 바람에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불길에 휘말렸다.

“아아아악!”

화공이 지옥의 모습을 그린다면 지금의 촉도관일 터.

문제는 산 사람과 망자의 차이였다.

망자들은 몸에 불이 붙어도 사지가 달려 있는 이상 꾸역꾸역 성벽을 기어올랐다.

썩은 시체들이 불길에 휩싸인 채 성벽을 올라오자 나이가 어린 아미파 제자들은 검을 든 채 얼어붙었다.

순간 아미파 제자들의 머리칼이 질풍에 휘날렸다.

팟. 휘이이잉.

서백이 달려들어서 검으로 망자들을 베어 버렸다.

계속해서 서백은 무너진 성벽 위를 징검다리처럼 뛰어다녔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망자 서넛의 목이 떨어졌다. 서백이 마구 검을 휘둘렀기 때문에 목이 아니라 몸통이 대각선으로 갈라져서 쓰러지는 망자도 나왔다.

아미파 제자들은 그 광경에 몸이 굳었다.

제자 하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검귀(劍鬼)……!”

망자 수십여 구가 순식간에 서백의 검에 두 동강났다.

하지만 서백의 표정은 냉랭했다.

‘촉도관은 끝났다.’

서백이 정수사태를 향해 외쳤다.

“더 이상 지체하실 겁니까?”

퇴각 명령을 재촉하는 말.

“촉도관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결정을 내릴 때입니다.”

“…….”

정수사태는 말없이 사방을 돌아봤다.

야심차게 준비했던 화공은 철저히 실패로 돌아갔다.

천혜의 요새를 자랑하던 성채는 무너져 내렸고 주위는 곳곳이 불길에 휘말려 있었다.

특히 무너진 성벽을 꾸역꾸역 기어오르는 수만 구의 망자 떼!

아미파 제자들이 그나마 망자 떼를 막고 있을 뿐, 병사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도망칠 기회만 노리는 눈빛. 촉도관의 관리와 장수들이 모두 도망쳤으니 병사들만 탓할 수도 없는 일.

‘이걸로 끝인가?’

정수사태는 허망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촉도관 함락은 내 책임…….’

그녀는 성벽 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래로 뛰어 내려서 망자를 베다가 자결할 결심을 한 것이다.

바로 그때, 한 자루의 대검이 앞을 막았다.

“중원도 망자가 창궐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서백이었다.

“촉도관이 무너져도 사태의 의지까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고맙소.”

정수사태의 눈빛이 독기를 품었다.

“모두 퇴각하라! 촉도관을 버리고 아미산으로 후퇴한다!”

“존명!”

아미파 제자들이 장문인의 명령을 받들었다.

“항마복룡진(降魔伏龍陳)을 펼쳐라!”

정수사태의 명령에 아미파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곧이어 아미파 제자들이 망자 떼에게 대항해 진법을 완성했다.

“진을 펼친 채 퇴각한다!”

방금 전까지 성벽을 기어오르는 망자 떼에게 속수무책이던 아미파 제자들.

그러나 항마복룡진을 펼치자 손발이 척척 맞았다. 합격진에 달려드는 망자들이 검망을 피하지 못하고 도륙되었다.

꾸웨에에엑.

서백은 아미파의 진법을 보고 새삼 감탄했다.

‘하나하나가 고수는 아니지만 서로 힘을 합치니 달라지는군.’

이 또한 명문정파의 위력!

정수사태가 진법을 지휘하며 서백에게 말했다.

“고맙소. 시주들도 함께 퇴각하겠소? 아니면 선착장으로 갈 것이오?”

“저희는 선착장으로 가겠습니다.”

“아미타불. 무운을 빌겠소.”

정수사태는 아미파 제자들을 이끌고 망자들을 도륙했다. 아미파 제자들의 합격진에 망자들의 기세가 한 풀 꺾이자 병사들도 사기가 올라서 합세했다.

병사 한 명까지 챙겨서 후퇴하려는 정수사태의 선택.

서백은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사태가 있는 한 아미파는 걱정 없다.’

그럼 남은 것은 일행의 도주.

서백은 지하통로로 내려가는 길로 달려갔다.

왕이삼과 유소운도 박도를 휘두르고 활을 쏘며 망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선배님!”

“거기 있었냐? 아미파는 퇴각하던데?”

“사태한테 우리는 선착장으로 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좋다. 길을 뚫자!”

“선착장은 이쪽입니다.”

왕이삼은 박도를 휘두르고 유소운은 망자의 목에 화살을 박아 넣었다.

그때 서백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지도에 보면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건 왜?”

“두 분 먼저 암자에 가 계십시오. 저는 할 일을 끝낸 다음 따라가겠습니다.”

“뭐라고? 할 일이라니?”

“한 시진까지 기다리시다 제가 안 오면 떠나십시오.”

왕이삼과 유소운이 영문을 몰라서 서로 쳐다봤다.

“이 아수라장에서 뭘 하고 오겠다는 거냐? 그냥 우리랑 함께 도망치자.”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합류할 테니까.”

서백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망자를 베어 넘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일단 우리나 걱정하는 게 어떻소? 꼭 돌아올 녀석이니 말이오.”

“그건 그렇지.”

왕이삼과 유소운은 망자를 처치하며 길을 뚫었다.

한편, 둘을 뒤로 하고 몸을 날린 서백은 정신없이 성채를 뒤지고 다녔다.

곧이어 서백은 찾는 장소에 도착했다.

바로 촉도관의 마구간이었다.

‘말만 있으면 아미파의 퇴각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마구간에 도착한 순간, 서백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늦었군.’

마구간을 지키던 아미파 제자 둘이 숨이 끊어진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말은?’

서백은 말들이 안전한지 살피려고 했다.

그런데 막 안에 들어가려던 찰나,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발을 멈췄다.

마구간 안의 공기에 희미하게 푸른색이 감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독!’

서백은 숨을 멈추며 뒤로 물러섰다.

안광을 돋우며 마구간을 살핀 서백은 재차 입술을 깨물었다.

말들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공기 중에 퍼진 독 때문에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두 죽은 것이었다.

정수사태의 작전을 방해하고 촉도관을 무너뜨린 범인.

그는 서백보다 한 발 앞서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흉계는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자 소용없을 터.

‘범인보다 한발 먼저 움직여야 한다.’

서백은 이번 사태로 범인이 얻을 이득을 따져 봤다.

이제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무엇을 노리는지 목표도 알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범인이 얻을 이득.

그 이득이 있는 곳에 놈이 나타날 게 틀림없는데…….

순간 어떤 생각이 서백의 머리를 스쳤다.

‘그렇군.’

서백은 그답지 않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 * *

정체불명의 인영이 정수사태의 천막에 접근했다.

정수사태가 퇴각을 명령했기 때문에 천막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인영은 손쉽게 천막으로 들어갔다.

인영은 벽면에 걸린 촉도관의 옥건을 보고 씨익 웃었다.

“병신 같은 아미파 놈들.”

내부에 있는 횃불 때문에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사천당문의 마차를 끌고 촉도관에 맨 처음 도착한 두 명의 흑의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흑의인이 옥건을 챙길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는 짐짓 태연함을 가장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웬 놈이냐? 못 본 척하고 그냥 나가면 목숨은 살려 주마.”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뭐라고? 네놈이…….”

흑의인은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그는 천막에 들어온 자가 아미파 제자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흑의인의 범행을 예측하고 천막에 들이닥친 자는 바로 서백이었다.

“촉도관을 무너뜨린 범인을 잡았으니 징벌하겠습니다. 원래 전 무림에 죄를 밝히고 처벌해야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당장 목을 베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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