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촉도관의 풍파(4)
관제묘는 벌판 가장자리의 암벽 옆에 붙어 있었다.
이런 곳에 관제묘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촉도관이 건설될 때 근처 주민들을 이주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비밀통로의 출입구인 관제묘는 허물지 않고 그대로 놔둔 것이리라.
그 결과 관제묘는 촉도관을 바라보는 곳에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멀리 어둠 속으로 망자 떼가 보였다. 망자들은 촉도관 쪽으로 비틀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고 사어처럼 몰려가는 것!
서백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세 가지를 지키면 망자를 피할 수 있습니다. 선배님은 아실 테고…….”
뜻밖에도 서백이 말하기 전에 유소운이 대답했다.
“호흡을 없애고 피를 흘리지 말며 얼굴에서 희로애락의 표정을 없애라. 아닌가?”
“맞습니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자 왕이삼이 놀리는 투로 끼어들었다.
“이 녀석, 중원은 넓다. 너만 망자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게 아닐걸?”
“그렇겠죠.”
유소운이 손가락으로 볼 옆을 긁으며 말했다.
“나도 직접 알아 낸 게 아니라 배운 거다.”
“저번에 말씀하신 분께 말입니까? 운남에 계셔서 찾아갔다는.”
“기억하고 있군. 그나저나 어디쯤 가시고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으니.”
그 말을 들은 왕이삼이 서백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길치가 오죽하겠냐는 눈빛.
서백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바로 웃음을 지웠다. 이제 작전을 수행할 시간이었다.
서백은 정수사태가 지도에 표시한 곳을 찾았다.
서백 일행이 마차를 둘 곳은 촉도관에서 봤을 때 길 왼쪽의 암벽 부근.
병풍처럼 길 왼쪽을 막고 있는 암벽을 유심히 살피던 서백은 곧 장소를 찾아냈다.
‘저기군.’
커다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고 바로 밑에 동굴은 아니지만 푹 꺼진 공간이 자리한 곳.
정수사태가 설명한 위치가 틀림없었다.
서백이 검지로 장소를 가리켰다.
“폭파 장소를 찾았습니다.”
“잘 안 보이는데?”
왕이삼이 눈이 침침한지 말하자 유소운이 설명을 덧붙였다.
“커다란 바위 밑에 공간이 있는 곳이오.”
“그래, 나는 나이 들어서 까막눈이다.”
“갑시다.”
셋은 마차를 끌고 폭파 위치로 올라갔다.
암벽은 경사가 가파르고 바닥이 거칠었다.
서백과 유소운은 바퀴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좌우에서 마차를 잡고 들어 올렸다. 자연히 올라가는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별빛을 받은 촉도관의 장엄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대로 수만 구의 망자 떼가 촉도관의 성벽 밑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오싹했다.
어느새 촉도관 성벽까지 다가간 망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입에서 나온 혈선충으로 핏물을 핥으며 성벽을 기어오르려고 했다.
마치 지옥에서 시체가 쌓인 탑을 보는 듯한 광경.
셋은 마침내 폭파 위치에 도착했다.
서백은 유소운과 함께 마차를 바위 밑의 공간에 밀어 넣었다.
“여기 두면 바위가 무너질 겁니다.”
절묘한 위치였다. 마차가 폭발하면서 바위가 무너지면 그 여파로 주위의 암벽이 통째로 내려앉을 것이다.
그야말로 정수사태의 계획대로 되는 셈!
“그럼 촉도관으로 복귀하죠.”
서백은 당나귀들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당나귀나 말도 망자에게 물리면 짐승 망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주위에 산 사람이 있으면 망자는 사람에게 먼저 달려든다는 것.
즉 당나귀 때문에 망자에게 들키면 사람만 위험해지는 꼴이 된다.
사천당문의 마차를 운송할 때야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당나귀는 여기서 놔주죠.”
“괜찮을까?”
“가축으로 길러지나 자연에서 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서백은 검으로 고삐와 밧줄을 끊었다.
걱정은 기우였다. 잠시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고 서 있던 당나귀들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당나귀가 마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궤짝 위에 고정돼 있는 도화선 장치가 흔들렸다.
덜그럭.
순간 몸을 돌리던 서백은 발을 멈췄다.
‘이상하군.’
도화선 장치는 아미파 제자들이 밧줄로 궤짝 위에 단단히 묶어 두었다. 장치의 내부 역시 도화선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남는 공간이 없었다.
그런데 덜그럭 소리가 난다고?
서백이 따라오지 않자 왕이삼이 물었다.
“왜 그러냐?”
“방금 소리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리?”
왕이삼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유소운은 소리를 들었는지 대답했다.
“들었다. 장치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던데?”
“도화선은 꽉 고정되어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망자 떼가 오기 전에 빨리 돌아가자.”
왕이삼이 재촉했지만 서백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서백은 궤짝에 묶인 장치를 옆으로 뺀 다음 뚜껑을 열었다.
왕이삼과 유소운도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 천막에서 본 거랑 똑같…….”
왕이삼이 도중에 말을 멈췄다.
서백이 끝을 잡고 들어 올리자 도화선이 쭉 딸려 나왔던 것이다.
대신 장치 중앙에 둥글게 말려 있는 도화선은 불이 붙은 채 타들어가고 있었다. 즉 도화선은 중간이 잘려나간 것이었다.
잘린 부분은 전체의 삼분지 이에 해당했다.
그렇다면 폭발 예상 시간이 삼분지 일로 줄어든 셈!
“누군가 도화선을 잘랐군요.”
“당장 터지진 않겠군. 복귀할 시간은 충분하다.”
유소운이 침착하게 말했다. 서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돌아가죠.”
셋은 몸을 돌려서 황급히 암벽을 내려갔다.
“어차피 암벽은 폭발할 텐데 굳이 도화선을 잘라 짧게 만든 이유가 뭘까?”
“뭐긴 뭐겠어? 어떤 놈이 암벽이랑 우리를 함께 날려 버리려던 거겠지!”
유소운과 왕이삼의 대화에 서백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뭔데?”
“망자 떼가 앞을 막지 않는 이상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촉도관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를 죽이려면 더 짧게 만들었어야죠.”
“그럼?”
“이번 작전을 망치기 위해서일 겁니다.”
“하지만 마차는 바위 밑에 잘 두고 왔잖아?”
“…….”
서백도 그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왕 선배 말이 맞다.’
범행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범행으로 노리는 목표. 범행으로 얻는 이득.
그러나 이번 범행은 왕이삼 말대로 목표와 이득이 불분명했다. 겨우 도화선 삼분지 이를 자른 것으로는 서백 일행을 제거하지도 못하고 암벽 폭파 작전을 방해하지도 못하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 요소 중 남은 것은 하나.
범행을 꾸민 범인.
서백은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중원은 흉계를 꾸며서 서로 속고 속이는 곳이다.
-명심해라. 속이는 자가 나쁜 게 아니라 속는 자가 멍청한 것! 그게 중원 무림의 법도다.
만약 흉계를 꾸민 범인이 어떤 속임수를 썼다면…….
순간 서백은 모든 진상을 깨달았다.
‘그랬었군!’
서백은 천둥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신에 전기가 올랐다.
‘그때 그게 그래서…….’
서백은 자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정답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눈앞의 진상을 무심코 넘겨 버렸던 것이다.
‘내 짐작이 맞다면 더 이상 마차는 오지 않는다.’
서백은 맞은편 암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촉도관에서 볼 때 길 오른쪽에 있는 암벽.
무림인 여섯 명이 마차 두 대를 갖다놓을 장소.
그러나 암벽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관제묘를 봤지만 입구에서 나오고 있는 마차는 없었다.
지금이라면 무림인들과 청성파가 마차를 끌고 나왔어야 할 시간.
‘짐작이 맞았군.’
서백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왕이삼이 물었다.
“왜 그러냐? 무슨 일이라도…….”
“모두 촉도관으로 달립니다. 지금 당장.”
서백은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뒤 아래로 몸을 날렸다.
“후배, 왜 그래?”
왕이삼이 어리둥절해서 물었지만 서백은 이미 바람처럼 달려가 버린 뒤였다.
유소운도 재빨리 서백의 뒤를 따랐다. 왕이삼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정신없이 둘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왕이삼이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이러다 망자에게 들키면 어쩔 거냐?”
“상관없습니다.”
반면 서백은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제 망자에게 들키는 건 문제도 아니다.’
곧이어 진짜 문제가 터질 테니까.
바람처럼 암벽을 달려 내려온 서백은 그대로 관제묘로 뛰어 들어갔다. 유소운과 왕이삼은 서백의 경공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에 처졌다.
관제묘로 들어온 서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마차는 아직 한 대도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 서백의 예상대로라면 영원히 오지 않을 터.
서백은 제단을 돌아서 지하통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석가심결을 시전한 뒤 화살처럼 달렸다.
서백의 두 눈에 어두운 지하통로 구석구석이 똑똑히 들어왔다.
그러나 한참을 달려도 마차 바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서백이 달리는 소리뿐.
‘마차는 어디 있지?’
바람처럼 질주하던 서백은 갑자기 발을 멈췄다. 설명 못할 본능이 서백의 발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서백은 멈춘 자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길 옆에 난 갈림길의 어둠 속으로 마차가 보였다.
‘그랬군.’
서백은 마차로 달려간 뒤 궤짝 위에 놓인 도화선 장치의 뚜껑을 열었다.
짐작한 대로였다. 도화선은 삼분지이 가 잘려나간 채 삼분지 일 부분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삼분지 일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짧았다.
도화선은 거의 다 타서 끄트머리만 남아 있었다!
그때 왕이삼과 유소운이 뒤늦게 서백을 따라왔다.
“그것도 잘라졌잖아? 빨리 불을 꺼야…….”
왕이삼이 깜짝 놀라서 말하자 유소운이 단검을 들고 재빨리 도화선의 끝을 잘랐다.
싹뚝.
그러나 서백은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닙니다. 도망쳐야 됩니다.”
“왜? 다른 마차들도 도화선을 자르면…….”
“지하통로에 갈림길이 수없이 뻗어 있습니다. 남은 마차 네 대를 거기에 흩어 놨을 텐데 언제 다 찾습니까?”
“……!”
왕이삼과 유소운은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마차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 방금 잘라 낸 도화선은 거의 다 타 버린 상태였으니…….
다른 마차들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
셋은 갈림길에서 나와 미친 듯이 지하통로를 달렸다.
그러다가 일행은 통로 중간에 쓰러져 있는 녹의인을 발견했다.
오만하게 콧대를 높이던 중년인.
바로 청성파의 부장문인인 무허자였다.
“이건 무허자잖아?”
“왜 아니겠습니까.”
“청성파 부장문인을 죽였다고? 설마 아미파가…….”
현재 촉도관에서 무허자와 무공을 겨룰 상대는 몇 명 안 된다. 왕이삼은 아미파 장문인 정수사태가 무허자를 죽인 거라고 추측한 것이었다.
서백은 그의 추측을 부정했다.
“정수사태가 죽인 게 아닙니다.”
“뭐라고? 그럼 누가…….”
“설명은 나가서 하겠습니다.”
셋은 다시 지하통로를 달렸다.
달리는 중에 무허자 말고 다른 청성파 제자들과 무림인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셋은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얼마나 정신없이 달렸을까, 드디어 지하통로가 끝이 났다.
그러나 살겁은 끝나지 않았다.
지하통로의 입구를 지키던 아미파 제자 두 명도 무림인들처럼 숨이 끊어진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아미파 제자들까지……!”
왕이삼과 유소운은 놀라서 입을 벌릴 때, 서백은 반대로 눈빛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모든 게 짐작한 대로군.’
서백 일행은 빙글빙글 도는 비탈길을 올라갔다.
곧이어 촉도관 성채의 마당이 나왔다.
‘정수사태는…….’
다행이 정수사태는 아미파 제자들을 이끌고 성벽에서 작전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백은 한달음에 정수사태 앞으로 달려갔다.
“정수사태, 큰일입니다.”
고개를 돌리던 정수사태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상황 판단이 따른 그녀는 서백의 표정을 보고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빨리 대피해야 합니다. 촉도관은 이제…….”
서백이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을 때.
갑자기 발밑이 붕 뜨는가 싶더니 지축이 뒤집혔다.
쿠우우우우.
“대체 무슨 일이오?”
정수사태가 깜짝 놀라 묻자 서백이 대답했다.
“촉도관은 이제 폭발해서 무너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