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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7화 (17/123)

17화 촉도관의 풍파(3)

정수사태의 말에 무림인들의 두 눈이 번쩍 안광을 뿜어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시간제한이 있다는 얘기는 없지 않았소?”

무허자가 큰 목소리로 항의했다.

그때 누군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를 정해진 시간에 폭파하려는 것이군요.”

나지막한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천막 안에 똑똑히 울려 퍼져서 무허자의 목소리를 덮어 버렸다.

천막 안의 인물들이 고개를 돌려 입을 연 자를 쳐다봤다.

바로 서백이었다.

“그 시간까지 촉도관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서백의 물음에 정수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물건을 폭약 옆에 설치해서 일곱 대의 마차를 동시에 폭파할 것이오. 이는 망자 척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요.”

그러자 무허자가 재차 항의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는 경우는? 우리 안전은 누가 책임질 건가? 아미파가?”

“그럼 청성파에겐 따로 폭파 시간을 알려 주겠소. 대신 직접 폭약에 불을 붙인 뒤 복귀하시오.”

“…….”

정수사태가 일침을 가하자 무허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무림인들은 이번 작전의 의미를 깨달았다.

작전은 비밀통로로 폭약을 옮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폭약은 폭발해야 의미가 있는 것. 즉 정수사태는 무림인을 배려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치밀한 작전을 준비한 것!

“촉도관으로 복귀할 시간이 충분하도록 폭파 시간을 계산해 두었소. 가져오너라.”

아미파 제자 둘이 물건을 들어서 탁자 위에 놓았다.

다른 무림인들이 무엇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릴 때, 서백은 한눈에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도화선이군.’

각각 다른 곳에 놔둔 마차를 동시에 폭발시키는 방법.

바로 도화선의 길이를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은 둥근 탁자에서 다리를 없앤 것 같은 모양이었다. 반면 탁자보다 두께는 조금 더 두꺼웠다.

제자가 물건을 잡고 뚜껑을 열었다.

서백의 짐작이 맞았다. 둥근 탁자 모양의 물건은 내부에 도화선을 배치해 둔 장치였다.

하지만 서백도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것은 장치의 구조였다.

장치 내부에는 달팽이처럼 소용돌이 모양의 칸막이가 박혀 있었고, 그 칸막이를 따라 도화선이 끼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원통의 중앙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도화선이 다 타면 불씨가 밖으로 나오는 구멍이군.’

장치의 구조를 깨달은 서백은 내심 감탄했다.

끝에 불을 붙이면 도화선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빙글빙글 타들어 갈 것이다. 그러다 중앙까지 타는 순간 불씨가 뿜어져서 폭약에 불을 붙이리라.

특히 어느 시점에 불씨가 나올지 도화선의 길이로 조정할 수 있었다. 게다가 뚜껑을 덮을 테니 불씨가 중간에서 꺼질 염려도 없다.

‘잘 만든 발명품이군.’

“이건 도화선 장치요.”

정수사태가 도화선 장치를 설명했다.

“도화선의 길이는 두 시진에 맞춰 놓았소.”

서백은 주의 깊게 설명을 들었지만 사실 듣지 않아도 무방했다. 서백이 예상한 것과 사용법이 일치했던 것이다.

“비밀통로를 이동해서 밖으로 나간 뒤 마차를 두고 복귀하는 데 최대 한 시진이 걸리리라 예상하오. 폭발까지는 한 시진의 여유가 더 있으니 충분하지 않겠소?”

설명을 끝낸 정수사태가 무허자를 돌아봤다.

“그렇군…….”

무허자가 시선을 피하며 동의했다. 정수사태의 말이 논리정연해서 반박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서백은 무허자가 꼬리를 마는 것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미끼였군.’

정수사태는 일부러 시간제한을 언급해서 무허자의 반박을 끌어낸 뒤 논리적인 설명으로 그의 입을 막은 것이었다.

드디어 자시가 되었다.

정수사태와 무림인들은 천막을 나섰다.

“시작해라.”

정수사태가 명령하자 아미파 제자들이 고개를 조아린 뒤 병사들과 함께 성벽으로 갔다.

성벽에는 이미 병사들이 준비해 둔 커다란 솥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미파 제자가 신호하자 병사들이 일제히 솥들을 성벽 밖을 향해 기울였다.

촤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검붉은 액체가 촉도관 너머로 쏟아졌다.

무림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경악했다.

“……!”

검붉은 액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람의 피였다.

사람의 피를 모아 두었다가 망자 유인책으로 쓴다고?

망자 창궐이 아니었다면 인륜을 저버린 악행으로 찍혀서 멸문지화를 당하고도 남을 일!

“그동안 망자에게 목숨을 잃은 아미파 제자와 병사들의 피요.”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피를 받아 놓았소?”

“그렇소.”

무허자의 물음에 정수사태가 대답했다.

그러자 무허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불문의 제자가 시체의 피를 모았다고? 부처가 살아나면 깜짝 놀랄 일이군.”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내공이 심후한 정수사태가 못 들었을 리 없었다.

“망자가 창궐한 판이오. 계율보다 중생의 생명을 돌보라는 게 부처의 뜻일 것이오.”

“…….”

얼음장처럼 차가운 정수사태의 한 마디에 무허자는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피했다.

왕이삼이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대단한 여인이군. 망자 떼가 들이닥칠 촉도관에 저런 여걸이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

그 말에 서백은 어딘가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여인은 저기 한 명 더 있지.’

서백의 시선은 일행보다 먼저 촉도관에 도착한 무림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사천당문에서 가장 먼저 출발한 무림인 여섯 명.

그중 두 명은 전신에 시커먼 흑의를 걸친 것도 모자라 검은 망이 쳐진 망사모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서백이 보기에 흑의인 중 한 명은 여인이었다.

‘키가 조금 작고 몸매가 부드럽다.’

서백이 흑의인을 여인이라고 짐작한 결정적인 이유는 걸음걸이 때문이었다.

‘걸음걸이가 사내와 다르다.’

사내는 다리 사이에 양물이 있어서 걸을 때 살짝 팔자걸음이 된다. 하지만 흑의인은 두 발을 일자로 곧게 뻗으며 걸었다.

서백은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양물 때문에 여인인 걸 알았다고 하면 왕이삼은 어이가 없다며 웃어넘길 게 뻔하니까.

그때 서백의 잡념을 지우는 일이 터졌다.

성벽 아래에서 망자가 괴성을 질렀던 것이다.

키에에에엑.

피 냄새를 맡은 것!

망자 하나가 피 냄새를 맡자 다른 망자들이 연쇄적으로 반응했다.

목마른 낙타들이 사막에서 물을 발견한 것처럼 망자들은 성벽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망자들이 촉도관을 향해 꾸역꾸역 몰려왔다.

인륜을 저버리면서 독하게 준비한 정수사태의 작전이 일단은 성공한 것이었다.

“그럼 비밀통로로 안내하겠소.”

정수사태는 무림인들을 이끌고 성채의 지하로 갔다.

무림인들은 나사처럼 빙글빙글 도는 비탈길을 내려갔다. 마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폭.

얼마나 내려갔을까, 드디어 지하 바닥에 도착했다.

마차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아미파 제자들이 궤짝 위에 놓은 도화선 장치에 불을 붙인 뒤 마차에 묶어서 고정시켰다.

정수사태는 무림인들을 세 조로 나누었다.

서백 일행과 사천당문에서 출발한 무림인 여섯 명이 각각 마차 두 대씩을 맡아서 촉도관 좌우의 암벽으로 옮긴다. 청성파는 마차 세 대를 중앙으로 옮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정수사태가 지하 구석으로 갔다.

횃불을 비추자 돌벽 한 쪽이 통째로 미닫이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미파 제자가 열쇠로 돌벽을 잠근 자물쇠를 열었다.

제자가 옆으로 물러나자 정수사태가 앞으로 나선 다음 양 손바닥을 돌벽에 갖다 댔다.

“하아압.”

정수사태가 기합을 토하자 무거운 돌벽이 흔들렸다.

순간 무림인들은 헛것을 본 것처럼 입을 딱 벌렸다. 정수사태의 천령개에 희미하게 금빛이 감도는 것 같은 환시를 느꼈던 것이다.

“저건 관음금정신공(觀音金頂神功)!”

무허자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미파 장문인이 한 단계 경지를 넘어섰군…….”

아미파의 비전 내공심결로 알려진 관음금정신공.

사십대 중반의 정수사태가 아미파 장문인 자리에 오른 건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곧이어 젊은 무림인들이 밀어도 끄덕하지 않을 듯한 돌벽이 서서히 옆으로 돌아갔다.

쿠구구구.

마차 한 대가 통과할 공간이 생기자 정수사태는 장법을 멈췄다.

무림인들은 아미파 제자에게서 마차와 당나귀 고삐를 건네받았다.

서백 일행이 가장 먼저 출발하려는 찰나, 정수사태가 다가오더니 서백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배의 닻줄을 풀 열쇠요. 이 열쇠를 보이면 사공이 명령을 따를 것이오.”

큼지막한 열쇠는 고리 부분에 용틀임하는 구름 모양의 아미파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정수사태는 열쇠와 함께 한 장의 지도도 건넸다.

“일을 끝내면 촉도관으로 복귀해도 좋고 그대로 길을 뚫고 선착장으로 가도 무방하오.”

“감사합니다.”

“소림사에 도착하면 방장님께 안부를 전해 주시오.”

“꼭 그러겠습니다.”

“명심하시오. 갈림길은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가야 되오. 그럼 벌판의 관제묘로 나갈 것이오.”

“예.”

대화가 끝나자 서백은 포권지례를 올린 뒤 몸을 돌렸다.

서백, 왕이삼, 유소운은 당나귀들이 끄는 마차와 함께 빛 한 점 없는 지하통로로 들어갔다.

* * *

끼이이익. 덜컹덜컹덜컹.

어둠 속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바퀴 굴러가는 소리뿐.

지하통로는 눈이 어둠에 적응돼도 앞을 구분하기 힘들 만큼 어두컴컴했다. 촉도관의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백은 석가심결을 시전하고 안광을 돋웠다. 그런 다음 앞장서서 걸으며 일행을 인도했다.

간혹 길 옆에 다른 곳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왔다.

서백은 시선을 주지 않고 일직선으로 걸었다. 정수사태가 말한 주의 사항. 갈림길을 무시하라.

쉬이이익. 툭 투툭.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왕이삼이 물었다.

“이봐, 들었냐?”

“들었습니다.”

“이 지하에서 무슨 소리지? 혹시 망자 아니냐?”

“바람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서백은 대답하면서 생각했다.

‘지상이 가깝다.’

바람소리는 어딘가 지상과 공기가 통한다는 뜻. 물방울 소리 역시 비를 머금은 땅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됐군.’

“곧 비밀통로가 끝날 겁니다.”

서백은 혁낭에서 미리 준비해 둔 단검을 빼냈다.

“선배님, 단검은 없으십니까?”

“응. 난 도검수잖아.”

서백은 다른 단검 한 자루를 왕이삼에게 건넸다.

“이걸 쓰시죠.”

“박도가 있는데 왜?”

“아직까지 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부터는 다릅니다. 비밀통로의 출입구는 낡은 관제묘라고 했으니 망자가 들어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유소운이 끼어들며 말했다.

“자네 대검과 박도는 좁은 장소에서 쓰기 힘드니 단검을 쓰잔 말이군.”

“맞습니다.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죠.”

그 말에 왕이삼도 수긍했는지 단검을 받아들었다.

서백이 가진 단검은 마침 세 자루였지만 유소운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나는 됐다.”

그러더니 혁낭을 돌려서 활과 활통을 꺼내 어깨에 멨다.

“이 어두운 곳에서 활을 쏘겠다고?”

왕이삼이 묻자 유소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않소.”

“둘이 죽이 척척 맞는군.”

곧이어 지하통로에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비스듬한 오르막길을 올라가자 드디어 지상이 나왔다. 지하통로의 출입구는 무신 관우의 위패를 모신 제단 뒤쪽이었다.

제단 뒤의 공간에 교묘하게 숨겨진 출입구.

제단을 박살 내지 않는 이상 지하통로는 보이지 않는다. 중원 사람들이 무신 관우의 제단에 손을 댈 리 없으니, 망자 창궐이 아니었다면 지하통로는 영원히 비밀 속에 남았으리라.

“제가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서백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석가심결을 시전했다.

팟.

어두컴컴한 사방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백은 발소리를 죽인 채 이동했다. 그리고 관제묘를 나와서 주위를 살폈다.

망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안심하고 뒤로 돌아서는 순간, 망자 하나가 서백의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서백은 코앞에서 망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키에에에엑!

서백은 호흡을 멈춘 채 무표정을 유지했다. 동시에 단검을 눈높이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스으으윽.

…다행이 망자는 서백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그 망자를 제외하면 관제묘 주위에 더 이상 망자는 보이지 않았다. 서백은 일행을 향해 안전하다고 수신호를 보냈다.

일행은 관제묘를 나가기 전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서백은 대검, 왕이삼은 박도를 들었고, 유소운은 화살 한 발을 활시위에 매겼다.

셋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마차를 끌고 관제묘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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